나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감성 발달을 위한 사계절 그림책
린리쥔 지음, 린리치 그림, 린리치웅 미술편집, 심봉희 옮김 / 베틀북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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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보물을 사랑하고 즐기는 세 자매, 정말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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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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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님의 글이라면 신문에서 드문드문 짧게, 거의 언제나 비통한 어조의 글을 읽어왔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대해 말하자면 어두울 수밖에 없으려니 하면서도 더불어 마음이 무거웠던 것도 사실이어서, 책이 나왔대도 선뜻 손이 가지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 <생각의 좌표>가 남아있어, 도서관에 간 참에 신간으로 들어와 있기에 얼른 빌렸다. 읽는 내내 내겐 다행이랄까, 역시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대한 예봉이지만 어둡고 무겁지만은 않았다. 지은이 스스로 밝히기를,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 그렇기에 다시금'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하니. 희망의 근거인 젊은이들에 대한 위무와 격려의 느낌이었을까? 조금이라도, 어딘가 한 귀퉁이 한 조각이라도 따뜻한 느낌이었던 건 그래서였을까? 비판의 날은 엄정해도 신문에서 보듯 한 편 한 편이 모두 비통하진 않았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고 젊은이들에게 질문한다. 지은이는 얼마나 자주 맹목적인 편견을 접했던지, 그 근거없는 믿음의 뿌리는 대체 어디일까? 어째서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치명적으로 알게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믿음에 대해 회의하지 않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는다.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기존 생각을 수정하려면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용기가 필요한데, 대부분은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는 용기만 갖고 있다. 머리가 나쁜 탓이 아니다.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대체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지, 잘 살아가고 싶고 나름대로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런데도 평범한 내가 이토록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유야 생각해보면 한둘이 아니고, 막연하게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확신을 갖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면 그저 한탄조로 흐르고 말던 기억들, 그 기억들을 밀어내며 지은이는 이렇게 일러준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지만(學), 저렇게 익히면서(習) 살아간다, 고.  

 ‘배움’ 없이 인권의식이나 연대의식을 형성하기 어렵지만 배움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좋은 가치라 해도 몸에 익히지 않으면 공염불에 머물기 쉽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려면 익히고 또 익혀야 하는 것이다. 환경과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사람은 어렸을 때 형성된다’라는 교육 금언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의 교육환경과 일상이 이웃에 대한 배려나 인권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 수 있다.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혼자 이기는 것을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인권 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같이 잘 살라고 권하는 사회라고, 내 몸은 익히질 못했다. 불특정한 (실은 이 조차 요즘은 '특정한' 누구일수도 있다..) 옆 사람을 누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익혀왔다. 그 와중에 역시나, 함께 잘 사는 사회가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라고 머리로는 또 슬며시 배워왔다. 그 말씀 그대로다. 배움과 익힘의 이 괴리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도 대부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새 몸은 익힌대로 가고 있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합리화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사는 게 어디 책에 쓰인 대로만 되던가 말이다..하면서. 그러니,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내 몸이 경쟁에 휘둘리고 오히려 앞서가려고 아둥바둥할 때에도, 모두들 그것이 요즘 세상의 최고의 선이자 필요조건이라고 부추길 때에도 남는 의문은 그것이다. 경쟁에서 뒤쳐질 때는 그럼 어쩔건데...? 사실 그건 경쟁의 카테고리 안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생각이다. 생각하고 있는 그순간에도 나는 벌써 한 단계쯤 뒤쳐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살벌한 순간에도 엄연히 의문은 존재하더라는 거다. 중학생인 아이를 좀더 공부하라고 다그칠 때에 그 의문은 최고조에 이른다. 어느 수준 이상 이해하면 모두 그 선을 넘어서버리는 절대평가가 아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아무리 갈고 닦아도 결국 어느 수직 좌표 위에 한 점으로 찍힐 수밖에 없는, 애초에 한계가 없는 무한경쟁을 아이들은 하고 있다. 그 무한경쟁에서 가능한 윗자리에 점을 찍으라고 아이를 어디까지 내몰 수 있는 것일까? 언제나 거기서 막힌다.  

교육이라기보다 차라리 집단 광란 상태라고 불러야 마땅한 그 도가니 속으로 자식을 보내면서 고민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 고민은 우리 배움과 익힘의 괴리, 아니 아예 상관없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나눔과 분배를 구별짓는 우리 사회의 잣대를 이야기한다. 온정적이고 시혜적이고 사적인 나눔에는 발벗고 나서는 '조중동'이 공적이고 사회연대의 성격을 갖는 분배에는 쌍심지를 돋우며 반대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서글픈 아이러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가진 자들의 시혜나 온정이나 바랄 것이지, 불온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일까. 소득 2만불을 넘긴 우리 나라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대학무상교육을 유럽의 여러 복지국가들에서 1만불을 넘긴 시점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지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다소나마 열린 사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힘이 된다. 미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떠돌던 생각들이 좌표를 찾아 자리를 잡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그 어떤 미래도 펼쳐주지 못한 채 오직 젊은이들을 구덩이로 떠밀고 있는 듯한 이 사회에서,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어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묶어 낸 이 책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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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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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의미에 두 개의 층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스투디움'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는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이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이라 부른다. 

라고는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나는 푼크툼이라는 것이 얼마나 스투디움의 도움을 받고 있는지를 더 절절히 느꼈다고 해야겠다. 진중권이 바로 자신에게 꽂힌 열두 편에 대하여 '사밀한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 사밀한 체험 들은 실상 그에게는 '마치 바늘에 찔리는 듯한' 푼크툼이었을지언정, 내게는 이미 존재했던 그 모든 해석들 속에서 또다른 가능성을 내비치는 행위, 어쩌면 스투디움의 더미를 슬쩍 불리는 일처럼 느껴진 게 여러 번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푼크툼을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지면을 스투디움의 기록물에 의존한다. 그것들은 저자가 말하듯, 몇 가지를 제외하면 99퍼센트 인터넷을 통해 찾은 것들이다. 

따라서 여기에 모은 글들은 독자들을 대신하여 그림을 읽어주기 위함이 아니다. 굳이 말하면 이 책의 성격은'범례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책은 독자들을 향한 적극적 독해의 요청, 다시 말해 '그림을 이처럼 읽어보라'거나 '이와는 다른 식으로 읽어보라'는 채근에 가깝다.   

'오랫동안 세상은 이렇게 읽어왔는데 이제 나는 이렇게 읽었으니, 앞으로 너는 너대로 읽어보라'고? 그러나 어쨌든 이 책의 지면을 채우는 것은 '세상이 읽고 지은이가 읽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 다음은 독자의 몫이니 알아서들 해야지! 말을 하나 안하나 그건 그런 건데.

사실, 미술사를 꿰고 도상학을 익힌 전문가의 수준이 아니라면, 그림 보기를 즐기나 그림 보기에 익숙치 않은 일반인들이야 늘 그림을 읽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저 그림 보기를 즐기려도 대체로 조언에 의존하지 않고는 안된다. 그런 조언들의 세계를 이미 여러 번 거닐었던 사람이라면야 나름의 견해가 생기기도 하겠지만, 일단 호오 만으로는 완결되지 않는, 뭔가 읽는 방식이라는 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던가.  

그런 수요에 대한 공급이랄까, 여러 전문가 혹은 다소 전문적 훈련을 거친 비전문 애호가들이 스스로의 그림 읽기를 시도한다. 그렇게 나온 책은 사실 돌아보면 우후죽순이다. 그렇다 보니 '나는 누구누구가 읽어주는 그림읽기가 좋다', 라는 기호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씩 그들의 읽기를 귀기울여 듣고 때로 익혀가면서 순수 애호가들은 그나마 단련되어 가는 게 아니겠는가. 그들의 읽어주기에도 차등, 혹은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의도적으로 스투디움의 관점에서 읽어주기를 즐기고, 어떤 이는 스투디움의 관점에 자신의 관점을 넌지시 보태기도 한다. 어떤 이는 아예 일반적인 견해와 상관없이, 자신의 관점만을 주관적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그 여러 방법들 중에서 누가 어떤 방법의 읽어주기를 고르는가 하는 것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 선택은 필요와 기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 혹은 우월하거나 열등함의 문제와 별도로 방법들은 나름의 존재이유를 갖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이 '푼크툼'이라는 것을 다소 과장되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누군가에 의해 꾸준히 시도되고 있는 방법이 아닌가? 많이 떠들썩한 광고를 보고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가 내심 실망하고는 좀 허접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그림 읽어주기가 좀더 방대한 자료를 펼치며 해박하다거나 좀더 주관적이라거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푼크툼'이라는 낯선 단어와 함께 펼쳐지는 그의 그림 읽기(해석)는, 설령 그를 뒤따르며 혹은 함께 걸어가며 즐기는 낯선 길이었을지언정 이미 그런 길들은 그가 처음으로 헤쳐낸 원시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원시림은 이미 여러 안내자들에 의해 여러 갈래의 길을 닦아놓은 상태인 고로, 그는 그 옆에 자신의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이름이 없었더라도 그 길들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갈래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더이상 낯선 길도 아니었다. 이미 멀쩡히 존재하던 대륙에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이름붙이자 그것이 그때부터 신대륙이 되는 거라면, 아무래도 약간 낯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장황하게 뭔가 불편했던 느낌이 떠올라 정리해봤지만, 그게 진중권의 그림읽기에 대한 불편함은 아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창조적 독해'에 대해 그게 뭐 그리 새삼스레 밝힐 일인가, 싶었을 뿐 그의 창조적 독해  그 자체에 대한 반감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조목조목 짚어주면서 그림은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숨은 뜻은 드디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그걸 보는 각도도 하나 둘로 제한된 게 아니라 무궁무진하게 확장된다. 이미 세상에 드러난 여러 개의 해석에 또 새로운 하나를 보태면서 이 시대의 정서와도 교차시키니 그 어찌 솔깃하지 않으랴. 덧붙여 이미 진중권에게는 우리 시대의 논객의 아우라가 겹쳐있지 않는가. 열 두 점의 그림 중에 그가 아니었으면 흘려보냈을 태반을 운 좋게도 소개받은 것, 한 장의 그림을 소개하면서 시대를 넘어 그 작품의 오마쥬를 넘나드는 즐거움, 물론 이 책의 주작업인 그의 푼크툼을 들여다보는 일들이 어우러져 즐거운 독서였다는 사실도 덧붙여야 비로소 공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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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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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하고 퐁, 하는 그 가벼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박민규의 소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의 발언은 가볍지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심정이 들 만큼 그의 주제는 지구적, 아니 우주적일 정도로 광대무변하고 그에 걸맞게 묵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편, 아니 대체 또 어떻게 이럴 수가?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문체는 무게감을 없앤 채로 전방위적으로 뛰어다닌다. 아니다, 날아다닌다. 박민규말고 또 누가? 모르겠다. 하여간에 내 생각엔 대단한 솜씨고 엄청난 방법이다. 그의 주제와 그의 작법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나야말로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세계가 언제나 듀스포인트라는 걸.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듣기 전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라도 유지되고 있는지, 잠깐씩 생각해보다가도 에이 내가 그걸 어떻게? 하면서 그만 생각하곤 했지.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듀스포인트의 법칙이었다니. 이제 그걸 알게 되었다니...! 앞으로 관망하지 말고 주시해야겠다. (!) 

뭐야, 이건 또 왜? 하는 생각이 들게 여러가지 이야기가 불쑥 등장한다. 모아이와 못과 치수에서 모아이와 못과 탁구대로, 탁구대에서 세끄라탱으로 랠리로, 모아이에서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모임으로 9볼트의 에에에에~로, 모아이에서 헤밍웨이의 아류의 아류의 아류...인 존 메이슨으로, 다시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에게로. 그렇게 불쑥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따로 또 같이, 붕붕 날아다니다가 어딘가 살짝 내려앉고 또 다른 데서 뭔가 붕붕 난다. 그 내려앉은 이야기들은 어디선가 직소퍼즐의 한 조각처럼 기막히게 따닥, 제자리를 찾았을지도. 그렇게 그 조각들은 여기저기서 따닥따닥하면서, 어느새 그림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 봐야겠지. 

요즘들어 부쩍 느낀다. 모아이가 말한 대로, 인간 각각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다고.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수천 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利己)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 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 그래서 생존해야 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며,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가까운 탁구장을 찾아주세요"  

도시의 어딘가에선 힘없는 인간이 맞아죽고, 세계의 어딘가에선 힘없는 민족이 폭격을 당한다. 그리고 나는, 괜찮다. 이곳은 별, 문제가 없는- 아마도 그런, 시추에이션.  

속에서, 그도, 나도, <핑퐁>의 못과 모아이도, 살아남은 한 사람이다. 크나큰 두 차례의 전쟁과 존 덴버와 도밍고가 부르는 '퍼햅스 러브'가 뒤섞인 인류의 1교시에서 말이다.  

살아남았다고 해서 인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에선 힘없는 인간이 맞아죽고, 어딘가에선 힘없는 민족이 폭격을 당한다. '퍼햅스 러브'와 같은 노래를 아무리 불러도, 세계의 키워드는 여전히 약육강식이다. 인류의 2교시를 생각한다면, 생존이 아니라 잔존이다. 지난 시간의 인간들이, 그저 잔존해 있는 것이다.      ... 

실은, 인류는 애당초 생존한 게 아니라 잔존해왔다. 만약 인류가 생존한 것이라면 60억 중 누구 하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대체, 왜,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말하자면 이곳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잔존해왔다.  

아직은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은 못과 모아이는 그들에게 결정권이 주어졌을 때 결정한다. 탁구계라는 커다란 계가 일견 하찮은 지구의 운명을 일견 하찮은 그들에게 맡긴다는 건 실은 

 각각 9볼트 정도에 불과한 해악의 조합이, 역시나 실은, 지구의 1교시의 비극의 원인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건지. 선택권을 가진 못과 모아이는, 과연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았으므로, 지구에게 언인스톨을 명령한다. 다, 사라져도 좋다.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언젠가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누군가가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 기억난다. 지금 지구인들에게 주어진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누군가들은 지구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으며 죽음으로 가는 고속 질주를 늦추어야 한다고, 감속하라고, 저속으로 나아가야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그건 거짓말이다. 단 한 가지 우리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실은 유턴 뿐이다. 우리는 거꾸로 가야한다.

아 정말, 유턴은 인류의 관점에서, 인류를 남길 것이다. 언인스톨은 보다 과격하다. 지구의 관점에서 인류를 삭제하고 지구를 남길 것이다. 그러나 지구로서는 그건 끝이 아니라 부활일 것이라니, 아 정말, 인류의 하나로서 갈길을 알 수 없다. 박민규는 나더러 가까운 탁구장으로 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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