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책, 벗이 되고 길이 되고 꿈이 되어줄 이야기
- 이영서, 『책과 노니는 집』을 읽고
윙윙-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밤, 뜨끈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책을 읽는다. 절절 끓어오르는 온돌에 데일세라 이리 저리 몸을 굴려본다. 그래도 시린 코끝을 감출 수는 없다. 이불을 뒷목까지 끌어올려 위풍을 막아 보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한 줄 한 줄 곱씹으며 읽을 수 있는 책이 있고, 엄마가 정성으로 구워낸 군고구마가 있어 달콤했던 유년 시절. 『책과 노니는 집』은 딱 이런 느낌의 책이다.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게 하는 뜨끈한 아랫목 같은, 꿈을 꿀 수 있게 만들어주는 책과 같은,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는 달달한 군고구마 같은. 장이에게 마음이 쓰이지만 장이로 인해 위로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책!
네가 감당할 수 없거든 도움을 청하란 얘기다
사람은 태어나서 기고 서고 걸으면서 겪게 되는 몸의 성장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성장통을 함께 겪게 된다. 문장, 필사쟁이 아버지 덕분에 ‘문장’이라는 멋스런 이름을 얻게 된 우리의 주인공 장이 역시 시대상황과 맞물려 억울하게 아비를 잃고, 장안의 왈패로 소문난 허궁제비에게 책이 잡혀 모진 마음고생까지 하게 된다. 위기의 순간, 장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대신 그저 묵묵히 고통을 감당해 내는 일 뿐. 이 때 짠하고 나타나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건 장이보다도 어린 겁 없는 낙심이다. 아버지를 여윈 이후 처음으로 세상에 내 편이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 장이. 네가 감당할 수 없거든 도움을 청하란 얘기다(p.115). 큰 위로가 되어준 이 한마디 덕분이었을까. 잔뜩 주눅 들어 살던 장이는 몇 해 전 아버지를 잃게 만든 천주학 사건에 또다시 주변 사람들이 휘말리자 위험을 무릅쓰고 정면승부를 펼치는 기지를 발휘한다. 아버지가 그랬듯 목숨을 건 사투를.
일련의 사건을 겪는 동안 장이는 몸도 마음도 훌쩍 커졌을 것이다. 어린 아이에서 소년으로, 홀로 살아가던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으로 한 걸음 나오게 된 것이다.
“어려운 글도 반복해 읽고, 살면서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아, 그게 이 뜻이었구나!’ 하며 무릎을 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는 어려운 책의 깊고 담백한 맛을 알게 되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허전하고 괜스레 불안해진다. 대단한 애서가나 다독가라서가 아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책이 좋아진 것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듯 책에 빠져드는데도 이유는 없다. 함께 하면 마냥 좋다! 이런 황홀한 마음이 『책과 노니는 집』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책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장이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었다,를 넘어 책에 빠져드는 오롯한 즐거움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제목 또한 ‘서유당(書遊堂), 책과 노니는 집’이 아닌가. 필사쟁이 아버지를 통해 자연스레 책을 접하게 된 장이가 본격적으로 책의 진맛에 빠져들게 된 것은 홍교리와 인연을 맺고 난 뒤부터다. 뽀오얀 닭곰탕을 먹을 때와 같이 침샘을 자극하는 ‘깊고 담백한 맛’이 책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찌 책을 마다할 수 있으랴. 같은 책도 읽을 때마다 다르다. 최서쾌가 책 읽을 사람의 처지와 마음을 고려해 책을 권하듯 어떤 상황 어느 시기에 읽느냐에 따라 책의 맛은 달라진다.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강렬한 중독성.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일일이 손으로 책을 썼던 필사쟁이, 이야기책을 전문으로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직업, 마치 연극을 관람하듯 전기수를 초청해 책을 감상하는 장면 등 ‘책’의 매력 속으로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책과 노니는 집』. 읽기 좋은 서체와 보기 좋은 표지나 삽화 대신 일일이 손때가 묻고 목소리가 녹아든 색다른 책읽기의 매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책이란 애틋하고 진솔한, 참으로 고마운 벗과 같은 존재!
“간밤에는 무슨 이야기를 쓰셨어요?”
“우리에겐 밥이 될 이야기, 누군가에겐 동무가 될 이야기,
그리고 또 나중에 우리 부자에게 손바닥만 한 책방을 열어 줄 이야기를 썼지.”
장이 아버지의 꿈은 장이와 함께 배오개 시장 부근에 책방을 여는 것이었다. 장이의 손을 잡고 ‘바로 저 집이다.’라고 일러주며 꿈을 나누었던 아비. 필사를 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것은 돈이 아니라 꿈이었는지 모른다. 장이와 함께 이루고자 했던 꿈. 장이 아버지는 천주학 책을 필사했다는 이유로 관아로 끌려가 모진 매질을 당한다. 장독이 올라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에도 치료보다는 아들의 앞날만을 생각한다. 장이와 함께 꾸었던 꿈을 끝끝내 지켜낸 아버지. 장이는 처음부터 혼자였지만 이런 아비로 인해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우연히 알게 된 출생의 비밀, 아비가 살아있었다면 끝끝내 몰랐을지 모를 출생의 비밀이 장이를 더욱 굳건하게 지켜주는 힘이 된다. 아버지의 꿈, 아버지와 함께 꾸었던 꿈, 마침내 장이의 꿈이 되고 현실이 되는 운명 같은 필사쟁이의 인생. 어쩌면 장이는 ‘문장’이라는 이름을 얻으면서부터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책과 노니는 집』은 단번에 읽히지만 오래도록 가슴에 잔영을 남긴다. 두껍지 않은 책 속에 담긴 가볍지 않은 메시지가 바로 그 비밀이다. 누군가에게는 동무가 되고 밥이 되고 꿈이 되는 이야기. 주 독자층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이야기 전개에 상당한 힘이 느껴진다. 때로는 손에 땀을 쥐게 하고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긴장감까지. 어린이를 넘어 어른에게도 인정받고 사랑받을 책. 성장소설인 동시에 역사동화이면서도 역사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책 속으로 한 발 더 다가서게 만드는 힘인 것 같다. 그럼에도 그 당시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꿈꾸던 간절한 염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담담한 듯 절절하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진실한 염원이 읽는 이의 마음을 두드린다.
『책과 노니는 집』을 읽는 동안 마음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분명 누군가와 벌이는 시합은 아니지만 경쟁하듯 책을 읽어치우는 습관이 부끄러워졌다. 책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어린 시절처럼 한 줄 한 줄 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들여 읽고 싶어졌다. 벗을 대하듯 허물없이 책이 전하는 진심을 읽어야겠다는 생각.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뜨끈해져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情)이 그 온기의 근원임을 알게 되었다. 버려진 핏덩이를 거둬 친자식 이상으로 보듬어낸 장이의 아버지, 아비를 잃고 또다시 혼자가 된 장이에게 보이지 않는 사랑을 쏟은 최서쾌, 신분의 차이를 넘어 책에 대한 오롯한 즐거움을 알게 해준 홍교리, 이름만큼이나 마음씀씀이가 고운 미적 그리고 낙심이까지. 서로를 생각하고 보듬고 헤아리는 마음이 『책과 노니는 집』에는 있다.
살아가는 동안 매 시기마다 내 아이에게 권해줄 요량으로 좋은 책들을 따로 모아두고 있다. 그 중 한 권이 될 『책과 노니는 집』. 책과 만난 날을 기록하고 첫 느낌을 적는다. 밑줄을 긋고 곳곳에 단상을 적어놓는다. 그런 책들을 훗날 내 아이가 펼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나에게 벗이 되어준 이야기, 내 아이에게 꿈이 될 이야기, 길이 되어줄 이야기들을 앞으로도 많이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