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텅 빈, 그럼에도 충만한
- 김훈, 『내 젊은 날의 숲』을 읽고
가끔 사물이 아닌 삶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현미경, 눈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작은 물체나 물질을 확대해서 보는 기구. 이 신통방통한 물건으로 삶의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면 과연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종종 타인의 시선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내 삶의 모습은 낯설다. 익숙하지만 한 발 거리를 두게 만드는 낯설음.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낯설음은 자각하지 못했던 삶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
돌아서면 하루, 한 달, 일 년이 금방이다.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만은 아닌데 지난 삶이 텅 비어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가만, 가만……. 지나치게 바삐 달려왔구나, 지나치게 앞만 보며 살아왔구나. 어쩌면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아왔구나. 이럴 때 필요한 것.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 먼발치에서 겉도는 게 아니라 생의 본질 속으로 한 발 들여놓는 순간 실마리는 풀리곤 한다. 괜스레 움츠러들게 만드는 근원적 불안감이 무엇인지, 생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연말이라는 시기적 요인과 『내 젊은 날의 숲』이 삶의 본질 속으로 한 발 들여놓게 만들었다. 느릿느릿 자연의 시간을 더듬어 극세밀화를 그리는 주인공처럼 관심을 기울인 관찰은 무언의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사진이 담아낼 수 없는 생명의 정교함, 그 팔딱거림을 포착해 내기 위한 지긋한 기다림. 그 기다림, 그러한 관심, 그러한 애정으로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현미경을 비추듯 세밀하고 정교하게 온 신경을 곧추세워 찬찬히. 한 번 뿐인 내 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텅 비어 있는지, 충만하게 차올랐는지, 비어있으면서도 충만할 수 있는지…….
- 빼도 박도 못할 가족이라는 운명
삶의 근원적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빼도 박도 못할 운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가족이라는 이름. 태초에 나를 있게 한 핏줄이라는 운명적 고리를 탐색하다 보면 ‘삶의 구조와 토대를 이루었던 바닥의 풍경(p.94)’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자존감을 살려주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기도 하고 한없이 옹송그리게 만드는 열패감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자신을 살게 한 생존의 모든 구비 조건들이 아버지의 비리에 의해 충족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근원적 열패감에 시달리게 된다. 비굴하고 치사하고 온갖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어낸 것들. 그것들로 채워진 삶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비굴함으로 점철된 비리를 순순히 시인하고 형을 산 것은 당사자인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아버지와 가족이라는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어머니와 나까지 담장 밖에서 마음의 형을 집행하며 살아간다. 무엇을 해도 완전무결할 수 없는 근원적 결핍. 그 옛날 독립군으로 활동했다는 할아버지의 불투명한 활약상과 정확한 이력을 알 수 없는 할아버지의 말 좆내논과 조용조용 비리를 일삼던 아버지의 왜곡된 삶이 ‘나’의 삶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땅 속으로 폭삭 내려앉은 나무처럼 생을 다한 황폐한 뿌리가 끝끝내 뽑히지 않고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살아있는 숨으로 가득한 숲에서라면 치유가 가능할까.
- 텅 빈, 그럼에도 충만한
한 시절 피어났다 소멸하는 짧은 생애를 온전히 들여다본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눈물이 날만큼 감격스러울 것이다. 한편으로는 애처로워 내내 마음이 쓰일지 모른다. 민통선 안 국립수목원의 세밀화가로 취직한 ‘나’의 업무는 식물의 표본을 그리는 것. 사진으로 표현되지 않는 식물의 살아있는 질감과 표정을 담아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바라보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집중해야 한다. 인간의 생이 몇 십 평생에 걸쳐 느리게 진행된다면 한 철을 살아내는 식물의 시간은 속도를 가늠하기 힘들만큼 빠르게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생애의 가장 역동적인 순간에 작동하는 식물의 생명의 표정은 어떤 모습일까(p.115).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짧은 시간에 집중되는 식물의 삶은 비상과 동시에 추락을 생장과 동시에 소멸을 담고 있다. 생을 향한 고요한 집중, 소멸을 향한 망설임 없는 질주는 삶의 가장 낮은 부분부터 더듬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생을 이루는 근원적인 것들이 자그마한 생명들 앞에서 하나둘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단 한 번의 우회전으로 텅 비어있는, 그럼에도 충만한 세상 속으로 들어서게 된 ‘나’는 식물들의 생애를 그리는 동안 이런 근원적인 생각들과 마주하게 된다. 숲이라는 군집체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단독할 수 있는 나무처럼 인연으로 얽히지 않고 다만 홀로 설 수 있기를 꿈꾸면서.
- 새 책을 만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 뒤표지의 글과 띠지의 글부터 눈에 담는다. 그 속에서 만난 한 구절.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는 작가의 말. 그냥 한 줄의 글로 읽고 넘겼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작가의 이 말이 마음 깊이 와 닿는다. 눈이 참으로 아팠겠구나, 세상을 간절하게도 들여다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 본 세상을 글로 마주한 나 역시 눈이 시릴 만큼 세상을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내 개인의 삶을 집중해서 들여다보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 비춰진 내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지 않으려면 한 번쯤 찬찬히 자신의 생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다보면 자신을 옥죄여오던 문제가 무엇인지,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 주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어떤 나무로 살아야 할지, 함께이면서 또 홀로인 이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젊은 날의 숲』이 뿜어내는 거대한 숨소리와 그 숲이 품고 있는 다단한 생명들이 오늘, 이 생을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