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나요, 내 인생
최갑수 글.사진 / 나무수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나이, 서른과 마흔 사이 

- 최갑수, 『잘 지내나요, 내 인생』을 읽고

‘책’만큼 ‘빛바랜’이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말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십여 년 전... 대학시절 읽었던 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를』을 오랜만에 펼쳐들었다. 이미 색이 좀 바랬고 오래 묵은 책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러고 보니 대학시절이 아닌 여고시절 친구에게 선물 받은 시집이었음을 메모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남은 기간 공부 열심히 합시다, 친구가’라는 메모 곁에 사인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친구’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집을 건네면서도 공부 이야기를 빼놓지 않은 걸 보니 그 시절 우린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나름의 돌파구로 낭만을 꼭 부여잡은 채 말이다. 누구였을까. 짐작해보면 3년 동안 문예반에서 동고동락했던 아홉 명 중 한 명이었던 것도 같고, 시를 좋아하는 나의 성향을 고려해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 명이 선물했던 것도 같다. 그 시집이 대학시절까지 잘 읽히다가 서가의 맨 아래에 자리한 채 켜켜이 먼지를 입은 지도 오래. 잊고 있던 이 시집을 불현듯 찾게 되었다. 그리고 몇 편의 영화와 몇 곡의 음악을 보고 들었다. ‘그’ 덕분이었다. ‘잘 지내나요, 내 인생’하고 물어봐준 바로 ‘그’ 덕분에!

‘잘 지내나요’라는 말 속에는 한 동안 연락을 하지 못한 소원함을 단박에 무너뜨리고 한 발 다가서게 만드는 간절함이 있다. 혹은 다소 어색해진 사이에 대화의 물꼬를 트게 만드는 상투성도 담겨있다. 전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 대화를 열어주는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로서의 상투적인 안부멘트. 특별할 것 없는 이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게 된 건 『잘 지내나요, 내 인생』을 만나고 난 후부터다. ‘잘 지내나요’라고 말하면 괜스레 눈물이 난다. 안부를 묻는 그 사람이 정말이지 잘 지내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해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잘 지내고 있기를, 언제까지나 잘 지내주기를. 언젠가 불현듯 생각나 ‘잘 지내나요’라고 안부를 물었을 때 덧없는 무음이 돌아오지 않기를 살아가는 문득문득 기도하게 된다. 서로 안부를 전하지 않더라도 그저 잘 지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나이, 서른과 마흔 사이. 내 나이 서른 셋, 이제 며칠 만 있으면 서른넷이 된다. 실감이 나지도 쉽게 인정할 수도 없는 나이. 나이란 언제나 그렇듯 서먹하고 먹먹하다.

이 책은 시인이자 여행 작가인 저자가 ‘서른과 마흔 사이’를 통과하는 동안 보고 듣고 만나고 생각한 것들을 사진과 글에 담아 펴낸 에세이집이다. 갓 스물과 서른 초입의 사람들을 위한 책은 많다.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는 나이, 무언가를 꿈꿀 수 있는 나이. 그러므로 설렘이 가득한 나이. 그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서른을 넘어 마흔을 향해가는 나이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책은 많지 않다. 작가의 말처럼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나이’이기에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와 격려도 그만큼 줄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자꾸 주춤거리게 된다.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아 언제나 전전긍긍하게 되는 나이. 실은 마음껏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스물과 서른보다는 마흔을 향해가는 나이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희망과 위로가 필요한 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쉽게 위로를 건네지 못한다. 누구도 위로받고자 속내를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서른과 마흔 사이는 그래서 외롭다. 그래서 더 막막하다. 그래서 더 위로가 필요한 지도 모른다.

『잘 지내나요, 내 인생』은 제목에 먼저 끌렸고, ‘누구나 통과하는 시간, 서른과 마흔 사이’라는 부제에 또 한 번 끌렸다. 서른을 넘어 마흔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에 적절한 위로가 필요했고, 적절한 공감이 필요했다. 책을 읽는 동안 조금 당혹스러웠다. 스무 살 혹은 서른 초입에 읽었던 여러 자기계발서와 에세이들처럼 근거 없는 희망이라도 발견하길 바랐다는데 그런 건 없었다. 서른과 마흔 사이의 작가는 소리쳐 불러도 대답 없는 희망을 노래하는 대신 생활 그 자체를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다. 지치고 반복되는 일상, 눈부시게 빛났던 사랑, 이해와 오해로 맺어진 타인, 위로가 필요한 날 떠나게 되는 여행 그리고 인생에 대해. 그렇지, 그런 거지. 지금 우리에겐 별 일 없는 평범한 일상이 더없는 행복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이 조금이나마 주어진다면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보다는 ‘누군가’의 ‘무엇’으로 양 어깨 가득 무거운 짐을 부려놓고 살지만 그 책임감으로 살아갈 힘을 내는 아이러니를 안고 사는 나이. 버거운 현실 앞에 숨이 턱 막히다가도 차곡차곡 쌓아둔 추억들로 행복할 수 있는 나이. 그것이 서른과 마흔 사이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서른과 마흔’이라는 물리적 나이를 염두에 두고 책을 읽은 건 아니다. 작가 또한 나이에 국한해 글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감성이 몹시도 풋풋하고 간혹 나이보다 어리고 여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그러면서 내가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해 고정관념과 일종의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누구나 그러하다고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건 아닌데, 그러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에 전전긍긍했었나 보다. 살아오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박힌 무서운 고정관념들을 이 책을 통해 조금은 털어낼 수 있었다. 타인이 아닌 나를 향해 진심으로 ‘잘 지내나요?’ 하고 물어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어쩌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추억들을 찬찬히 불러내 보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들의 이야기, 그 시절 나의 이야기와 마주하는 동안 참으로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할 일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일상을 누군가의 눈에 비친 세상을 들여다본다는 건 그래서 의미 있다. 그것이 시인이자 여행 작가인 저자의 눈을 통한 것이라 더 오롯하고 생생했다. 눈에 담을 사진이 마음에 새길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물어보라. ‘잘 지내나요, 내 인생’ 하고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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