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선인장 - 사랑에 빠졌을 때 1초는 10년보다 길다
원태연.아메바피쉬.이철원 지음 / 시루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서로를 첫 눈에 알아본 순간, 이미 하나가 되었다
-원태연, 『고양이와 선인장』을 읽고

 햇살 좋은 창가에 화분을 내어둔다. 가끔 물을 주고, 가끔 말을 걸고, 가끔 눈길을 준다. 가끔이지만 지속적인 관심. 그래서일까. 화분 속의 그것은 생기가 넘쳐 보인다. 매끈한 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싱한 탄력. 나와 같이 숨을 쉬고 하루를 살고 있다는 생각에 묘한 동질감마저 느껴진다. 생명을 지닌 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의지. 강렬하고도 애틋하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봐주는 대상이 있을 때 그 에너지는 더 강해지는 법.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본 고양이와 선인장처럼 말이다.

 오디오그래픽노블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고양이와 선인장』은 원태연 시인이 10년 만에 내놓은 에세이집이다. 오디오그래픽노블? 낯설지만 새롭고 신선한 느낌! 곧바로 음악을 다운로드 받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창가에 놓아둔 화분에서 아이비가 바람에 한들거린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고양이 외로워와 선인장 땡큐의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이 더 싱그럽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고 괜스레 미소도 짓게 된다. 전보다 더 애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오로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을 때 가능한 일. 사랑은 사람을 새롭게 살게 한다. 어느 날 서로를 알아본 고양이와 선인장이 그랬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고양이와 선인장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본 것만으로 이미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서로를 더 알고 싶은 호기심, 서로를 걱정하는 안부, 서로를 소유하고 싶은 질투,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관심……. 모든 사랑의 과정에 동반되는 이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고양이와 선인장의 마음에 투영되어 있는 책,『고양이와 선인장』은 빛처럼 맑고 투명하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삶은 고단하다. 괜스레 주눅이 들고 눈치를 보게 된다. 나도 불편하고 상대방도 불편해한다. 그쯤 되면 혼자일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 나만의 공간 안에서 갇힌 듯 자유롭게 사는 법을 터득해간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일까. 소위 말해 사회부적응자. 고양이 외로워가 그랬고, 원태연 시인이 그랬다. 열일 곱, 처음 자신의 시가 남들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부터 마흔 하나가 된 지금까지 원태연 시인은 시인도, 작사가도 영화감독도 아닌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한 박탈감. 시인으로는 이례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주목과 비난을 동시에 받아야 했던 인생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고양이 외로워에 투영된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고양이와 선인장의 이야기는 비단 고양이와 선인장의 이야기만은 아니기에 공감이 간다.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떠나보내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 살아있는 한 늘 반복되는 고질병과도 같은 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나 사랑으로 인해 충만해짐을 알기에 그 아픈 사랑을 자꾸만 되풀이하곤 한다. 반복되는 사랑, 그럼에도 어느 한 순간도 똑같지 않은 신비한 마법과도 같은 사랑. 때론 미.친.거.아.냐.라는 말을 들어도 좋을 만큼 사랑은 목숨을 걸게 만들기도 한다. 땡큐를 향해 온 몸이 부서질 듯 달려가는 외로워처럼.

 고양이와 선인장의 사랑이야기? 유치하지 않냐구요? 유치하지 않답니다. 가볍지 않냐구요? 글쎄요, 저에게는 가벼운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원태연’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선입견이 이 책을 유치하거나 혹은 가벼운 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추측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인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수식어. 결국은 대중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그를 평가절하 해온 게 일정부분 사실이니까요. 실은 제가 그랬답니다. ‘원태연 시인의 책이네. 고양이와 선인장이라고? 유치할 것 같은데. 왠지 가벼워 보여.’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었습니다. 원태연 시인으로 인해 한 시절을 무사히 건너온 제가 세류에 휩쓸려 그를 평가절하 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런데요, 땡큐와 외로워의 이야기는요, 선인장과 고양이의 사랑이야기만은 아니기에 마음이 아프고 절절하고 애틋하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 고흐, 마지막 70일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페터르 크나프 지음, 유예진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불꽃같은 열정을 피워낸 반 고흐의 마지막 70일

-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 . 페터르 크나프, <반고흐, 마지막 70일>



반고흐가 이 생에서 보낸 마지막 70일이 궁금하다면 <반고흐, 마지막 70일>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 책은 반고흐가 프랑스 오베르에서 보낸 마지막 70일에 관한 기록이다. 책에는 그가 지인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와 70일 동안 작업한 80여점의 작품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70일 동안 완성한 작품이 80여점이라면 하루에 한 편 이상의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이야기인데, 이토록 놀라운 창작열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가 품었던 불꽃같은 열정과 마지막 삶을 추적할 수 있는 책 <반고흐, 마지막 70일>. 최근 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그가 생을 마감한 오베르에서의 마지막 70일은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안타깝게도 반고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곳은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와즈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와즈 강변에 위치한 전원 마을. 그 곳 라부 여관에서 그는 1890년 7월 29일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오베르에서 머문 70일 동안 그는 약 80여점의 작품을 완성시켰다. 물론 그 때의 모든 작품이 완성도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습작을 포함해 간혹 진위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작품까지 모두를 아우른 것이다. 습작이든 완성도가 떨어지든 70일 동안 80여점의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은 과히 놀랄만한 성과다. 반고흐가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던 오베르에서의 마지막 70일을 만난다는 건 그래서 의미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그는 오베르에서의 매일매일을 그는 성실히 살아냈다. 마치 기관차가 폭주하듯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던 시간, 70일!

자신의 삶이 노동자나 농부들의 삶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보다 더 편한 생활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때론 생활고를 느낄 만큼 검소할 수 있었던 이유이며 그가 그들을 화폭에 담은 이유이기도 했다. 일찍 잠자리에 들 것, 술을 적게 마실 것, 정해진 시간에 식사할 것, 많은 시간 걷고 또 걸을 것. 그는 몇몇 규칙들을 세워 엄격하게 지키며 작업에 임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자신에게 내린 처방이기도 했다. 책에는 오베르에서 그린 작품 전체와 각각의 그림에 반고흐가 보낸 최후의 날들에 대한 묘사가 덧붙여져 있다(머리말 참조). 이것은 고흐의 작품과 삶에 한 발 짝 더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의 빈센트 반 고흐 -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서', 2부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유화 작품과 습작- 전 작품 수록', 3부 '반 고흐 유작 계승자 요안나 봉허-기록 에세이'가 그것이다. 이 책의 작가는 반 고흐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의 오류에 대해 꼬집고 있다. 일명 '가난뱅이, 병자, 미치광이, 우울증 환자, 알코올 중독자, 성격 파탄자 등의 수식어에 고립된 사회부적응자, 거친 성격의 소유자, 실력을 인정받지 못해 살아 생전에 오로지 한 개의 작품밖에 팔지 못한 화가'(서문 참조)라는 인식 말이다. 나 또한 반 고흐를 비슷하게 평가해왔다. 그럼에도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성실함 때문이다. 그림에만 올인한 삶. 그를 따라다니는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상쇄시킬만큼 그가 보여준 그림에 대한 열정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몇 해전 우연히 읽게 된 <반고흐 영혼의 편지>를 통해 반고흐와 그의 작품을 더 눈여겨 보게 되었다. 모를 때는 그냥 보아 넘겼던 그림들이 그의 내면과 소통한 후에 고뇌와 환희에 찬 완벽한 작품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반고흐에 대한 존경과 갈망.

다시 만나게 된 반 고흐 이야기 <반고흐, 마지막 70일>은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꿔놓았다. 일평생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그림에 온 열정을 쏟아부은 불운의 화가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을 바로 알게 되었다는 말이 더 적확하겠다. 미술 상인으로 부와 명성을 쌓은 동생 테오로부터 부족함없는 지원을 받았다는 것, 살아 생전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한 것이 아니라 테오가 그의 그림을 판매하는 판매책이었다는 것, 사후에 더욱 유명해지긴 했지만 살아 생전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았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책은 그가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와 작품을 근간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입증하고 있다. 작가는 오로지 화가의 작품과 사실적인 정보만을 토대로 그의 최후에 접근하고 있다. 어떤 짐작이나 추론을 배제시킨 채 오늘날까지 밝혀진 객관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반 고흐를 소개하고 있다.(책 참조) 이 역시 다른 각도에서 반 고흐를 해석하고 있는 반 고흐 전문가들에게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소지가 있지만 저자들의 해석은 들어볼만하다. 기존의 상식에 반기를 들기 때문이다. '반 고흐 다시보기'를 시도한 책.

반 고흐의 집안은 대대로 목회자 혹은 미술 상인이라는 두 가지 직업군으로 양분화되었다고 한다. 반 고흐 역시 목회자로 일정 기간 몸담은 후에 화가로 전향했다. 그가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를 분석해 보면 언급한 작가만 해도 무려 150여 명에 달하고 책은 20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수천 점이 넘는 그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로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늘 새로운 발견에 목말라했던 대단한 독서광이자 그림에 대해 끊임없는 열정을 불살랐던 열성적인 화가이자 박학다식한 엘리트. 기행에 가까운 일화들이 부각된 나머지 그의 진면목은 상당부분 가려져 있었는데 책을 통해 만나게 되어 기쁘다. 오해로 점철된 위대한 화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값진 수확.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마지막 작품들을 한 권의 책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는 것 역시 특별한 의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맑은 날엔 도서관에 가자 독깨비 (책콩 어린이) 2
미도리카와 세이지 지음, 미야지마 야스코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 책 사람 세상이 만나는 곳

- 미도리카와 세이지, 『맑은 날엔 도서관에 가자』를 읽고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날, 상쾌한 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면 집안에만 있기가 쉽지 않다.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 운동화 끈을 느슨하게 묶고 가벼운 산책길에 오른다. 어디가 좋을까. 발길 닿은 대로, 눈길 닿는 대로 걷다가 들어선 곳은 집과 그리 멀지 않은 동네 도서관. 어디 멀리 떠나고 싶다가도 햇살 좋은 창가에 기대어 책 읽는 기쁨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광이 선사하는 따뜻하고 포근한 위안. 볕이 고맙게 느껴지는 이 계절에만 누릴 수 있는 소박한 기쁨이다.


책의 주인공 시오리도 맑은 날엔 도서관에 간다. 흐린 날에도 도서관에 간다. 어떤 날이라도 도서관에 가는 걸 즐기는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다. 날씨가 좋다고 밖에 나가서 놀다보면 그 시간만큼 책을 읽을 수 없으니 ‘맑은 날엔 도서관에 가자’를 외치는 일명 책벌레 소녀. 두근두근 콩닥콩닥. ‘오늘은 또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p.17)’ 책을 향한 무한한 설렘이 오늘도 시오리를 도서관으로 이끈다. 도서관에서 시오리가 만난 것은 책만이 아니다. ‘책’을 매개로 ‘도서관’이라는 하나의 장소에 모여든 ‘사람들’과의 만남.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는 이 만남들을 통해 5학년 작은 소녀는 사람과 세상을 조금씩 알아나간다.


『맑은 날엔 도서관에 가자』는 제목만 보면 ‘책’에 관한 이야기라 생각하기 쉽다. 물론 책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책만 다룬 게 아니어서 이야기가 더 풍성하다. 책에는 다섯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추리물을 즐겨 쓴다는 작가의 이력답게 사건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방식에 추리가 등장한다. 물론 5학년 아이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그리 긴박하지 않은 추리들. 어른이 읽기에는 다소 밋밋한 감이 있지만 주 독자층인 아이들이 읽는다면 꽤 흥미진진해 할 것 같다.


어느 날 보호자도 없이 도서관에 나타난 꼬마 여자아이 마사에, 60년 만에 책을 반납하게 된 야스카와네 할아버지의 특별한 첫사랑, 친구의 잘못을 감싸주기 위해 노력한 다케자와, 그림책에 각별한 애정을 보이는 겐타, 그리고 시오리가 10년 만에 재회하게 된 아빠와 그 가족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훈훈하고 정이 넘친다. 책을 통해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한다. 책을 통해 인연을 만나고 우정을 이어나간다. 자신감을 회복하고 용서와 화해를 구하기도 한다. 책은 단순히 읽는 행위를 넘어 읽는 이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세상과 소통하게 만들어준다. 책은 작지만 위대한 메신저인 셈이다.


책을 처음 접하게 된 사연과 좋아하게 된 사연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책이 한 사람에게 특별하게 스며드는 과정은 비슷하다. 온전히 책속으로 빠져들었을 때, 책은 보이지 않는 행간의 의미까지도 세밀하게 전달해 준다. 마음을 다해 읽으면 진심을 보여준다. 그것이 책이다. 책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 시오리도 그렇게 책을 읽는다. ‘한 권의 책은 그대로 한 권의 세상’인데 어찌 마음을 다해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서관’을 ‘책’하고만 연관 지어 가기 싫어하는 아이가 이 책을 읽는다면 새로운 시각으로 도서관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만나는 곳, 사람을 만나는 곳, 세상을 만나는 곳, 그곳이 바로 도서관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만 년 동안 절대 말 안 해 웅진 우리그림책 12
허은미 글, 김진화 그림 / 웅진주니어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앞으로는 다들 조심해. 안 그러면! (귀여운 꼬마의 달콤살벌한 경고)
- 허은미 글, 김진화 그림, 『백만 년 동안 절대 말 안 해』를 읽고

 하루에도 수천 번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세상의 쓴 맛 단 맛 다 본 나이가 되어도 마음은 늘 갈대밭을 맴돈다. 하물며 이제 갓 세상이라는 큰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한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라면 어떨까. ‘넌 어려서 몰라’, ‘쪼그만 게 무슨 걱정?’ 운운하며 그들의 고민 정도는 하찮게 보아 넘기기 일쑤인데 이건 어른들만의 크나큰 착각이다. 그들도 그네들만의 고민거리가 있다. 어른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아이에게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종말론보다 더 긴박한 절체절명의 위기일 테니까. 그러니 한 번만 더 자신을 속상하게 하면 ‘백만 년 동안 절대 말 안 해’라고 외칠 수밖에.

 제목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백만 년 동안 절대 말 안한다구? 어쩜 이리도 귀여울까, 싶어 한참을 웃었다. 아이의 생각을 정확하게 짚어낸 폭탄 발언 같은 제목부터 흥미로운 책. 무엇이 이 아이에게 이처럼 독한(?) 생각을 품게 만들었는지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백만 년 동안 절대 말 안 해』는 무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나에게 왔다.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머릿속 생각들도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엄마는 툭 하면 화를 낸다. 엄마 좋아하는 건 잔뜩 사면서 내가 사달라는 건 하나도 안 사준다. 몸에 나쁜 음식은 먹지 말라면서 만날만날 커피 마시고, 팝콘도 원샷 수준으로 마셔버린다. 아빠 역시 너무하다. 아빠가 늦게 까지 텔레비전 보는 건 괜찮고 내가 늦게까지 자지 않고 있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 아빠 배는 산만큼 나왔으면서도 나보고 뚱뚱하다고 놀리고, 애완용 동물 키우는 건 무조건 반대다. 이유라도 일관성이 있으면 덜 억울한 텐데 아빠 마음이란다. 공주병에 걸린 언니는 또 어떻고. 자기 껀 무조건 자기 꺼, 내꺼 역시 자기 껄로 생각한다. 너무해. 너무해. 정말 너무해. 가족 같은 건 다 필요 없다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폭탄선언을 해 버린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뒤죽박죽 엉킨 실타래를 가만히 풀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없으면 우리 가족은 안 될 것 같다. 장수풍뎅이에게 밥을 줘야 한다. 아빠의 장난도 받아주고, 엄마 커피에 설탕도 넣어줘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없어졌다고 가족들이 슬퍼한다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이라고 걸려버린다면. 이건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뭐, 성격 좋은 내가 한번은 참아야지. 참자, 그래 내가 참자. 그러니 앞으로는 다들 조심해. 안 그러면 백만 년 동안 절대 말 안할 거야!

 주인공 꼬마 아이, 정말 귀엽지 않은가. 발랄하고 성격 좋은 장난꾸러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따뜻함을 품고 있는 녀석. 혼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어느새 기진맥진해지지만 곧바로 긍정모드로 돌변. 아이의 고민과 걱정거리를 발랄한 시선으로 잡아낸 이 책은 그래서 재미있고 유쾌하다. 아이 혼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동안 가족들은 천하태평 그대로이지만 생각을 바꾸니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가족은 없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고민이 우리 가족들의 면면을 둘러보게 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족은 보이지 않는 하나의 끈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은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대면 대면하며 살았던 가족들의 마음을 찬찬히 헤아려보고 싶어진다. 엉켜버렸다면 풀면 되고 보이지 않으면 보려고 노력하면 된다. 가족은 분명 그들만의 끈끈한 애정과 사랑으로 연결된 결속력 강한 이 사회 최초의 집단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용서를 구하라, 용서하라! 구원을 구하라, 구원하라! 

- 파울로 코엘료, 『알레프』를 읽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믿음의 유무일까 경험의 차이일까. 여기에 이대로 머무를 것인가.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인가. 그러기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나의 왕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파울로 코엘료의 팬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좀 부족하고 팬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그의 작품에 열광적으로 빠져들지는 못해도 열성적이긴 하니까. 그의 책을 습관적으로 사 모으고 습관적으로 읽는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낯설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그의 작품은 매순간 익숙해지기를 거부하는 듯하다. 언제나 가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 있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그의 새 작품을 읽지 않고 지나치기에는 어딘가 개운치 않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미 한 사람의 작가를 넘어 하나의 문화현상이므로.

알레프. 기(氣)의 세계. 모든 것이 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지점. 그곳에서라면 전생으로의 여행이 가능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해도 실마리를 발견할 수는 있다. 이 생에서 안고 살아가는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지.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인지. 9288 킬로미터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 안에 알레프가 있다. 현재로 온전히 돌아오기 위해 한 번은 제대로 통과해야 할 문, 알레프.

현실은 빠듯하다. 그런데 영적 세계라니. 마법 전승 전생 환생 표지 평행우주 같은 단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럽다. 계획한 일과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이런 신기루 같은 이야기에 탐닉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끝까지 『알레프』에 귀를 기울인 건 ‘가끔은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 될 필요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라는 관찰자가 되어 삶을 들여다보는 것.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보아야 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삶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나의 삶이지만 내 삶이 아닌 것들. 온전히 내 것도 아니면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는 과거, 전생. 쉰아홉의 작가는 이미 스무 살 초입에 마법의 세계에 입문했다. 여러 번 전생을 경험했고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은 채 살아간다. 속죄하고 싶지만 누구에게 무엇을 속죄해야 할 지 모른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의심들, 불신들.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갑자기 나타나 여행에 동참시켜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힐랄 이라는 터키 여인과 함께. 그가 다시 경험하게 되는 알레프. 그녀가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알레프. 그것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삶은 언제나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알레프’를 만난 것이 그랬다(물론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고, 보이지도 않는 전생을 나는 감히 상상해본다. 전생을 상상해본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경험이다. 그 때 저지른 나의 죄와 행했던 나의 옳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것이 지금 이 생의 나를 어떻게 이루고 있는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물론 어떠한 답도 얻을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나를 되돌아보고 성찰해보는 것.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 거기에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어떠한 답이 있을 수도 있다. 삶은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므로. ‘나는 이미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의 결과’이므로.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무수히 많은 말들이 갑자기 내 안에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혼란스럽고 알 수 없는 이 떨림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정리할 수 없다. 다만 선택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뿐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선택받지 못한 것은 결국 배제된다. 나는 이 책을 내 인생을 위해 선택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선택하기로 마음먹는다.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영적 세계로 입문하려거나 환생을 쫒겠다는 말은 아니다. 내면으로의 여행, 성찰과 고찰. 자신을 들여다보는데 시간과 노력을 온전히 기울여야봐야겠다는 말이다.

현실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있다. 이렇게 팍팍한 현실에서 영적 수행 운운하는 건 대부분의 삶에서 불가능하다. 대신 우리 각자에게는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존재한다.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해 보이는 현상만을 쫒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훌쩍 다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이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지혜,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줄 아는 지혜. 내면의 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때 진정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도 남들에게도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 거창한 무언가를 이룩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미약하지만 나는 이 세상을 조금씩 물들여갈 수 있다. 이 생에서 안 된다면 다음 생으로 또 그 다음 생으로 이어나가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경험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생은 기차지 기차역이 아니'잖은가. '이 칸에 탔다가 때로는 저 칸에 타고, 꿈을 꾸거나 기이한 경험에 휩쓸리면 이 칸에서 저 칸으로 가로지르기도’ 해야 한다. ‘내가 항상 같은 곳에만 머물러 있다면 내가 원하는 곳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할 것. 그것이 영적 수행이든, 현실 고행이든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래야 삶의 어느 순간 중국 대나무처럼 갑자기 약 25미터 높이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 테니까. 나는 나의 왕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발견에 달려 있다.


『알레프』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 신비롭다. 그래서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