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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용서를 구하라, 용서하라! 구원을 구하라, 구원하라!
- 파울로 코엘료, 『알레프』를 읽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믿음의 유무일까 경험의 차이일까. 여기에 이대로 머무를 것인가.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인가. 그러기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나의 왕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파울로 코엘료의 팬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좀 부족하고 팬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그의 작품에 열광적으로 빠져들지는 못해도 열성적이긴 하니까. 그의 책을 습관적으로 사 모으고 습관적으로 읽는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낯설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그의 작품은 매순간 익숙해지기를 거부하는 듯하다. 언제나 가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 있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그의 새 작품을 읽지 않고 지나치기에는 어딘가 개운치 않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미 한 사람의 작가를 넘어 하나의 문화현상이므로.
알레프. 기(氣)의 세계. 모든 것이 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지점. 그곳에서라면 전생으로의 여행이 가능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해도 실마리를 발견할 수는 있다. 이 생에서 안고 살아가는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지.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인지. 9288 킬로미터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 안에 알레프가 있다. 현재로 온전히 돌아오기 위해 한 번은 제대로 통과해야 할 문, 알레프.
현실은 빠듯하다. 그런데 영적 세계라니. 마법 전승 전생 환생 표지 평행우주 같은 단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럽다. 계획한 일과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이런 신기루 같은 이야기에 탐닉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끝까지 『알레프』에 귀를 기울인 건 ‘가끔은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 될 필요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라는 관찰자가 되어 삶을 들여다보는 것.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보아야 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삶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나의 삶이지만 내 삶이 아닌 것들. 온전히 내 것도 아니면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는 과거, 전생. 쉰아홉의 작가는 이미 스무 살 초입에 마법의 세계에 입문했다. 여러 번 전생을 경험했고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은 채 살아간다. 속죄하고 싶지만 누구에게 무엇을 속죄해야 할 지 모른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의심들, 불신들.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갑자기 나타나 여행에 동참시켜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힐랄 이라는 터키 여인과 함께. 그가 다시 경험하게 되는 알레프. 그녀가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알레프. 그것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삶은 언제나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알레프’를 만난 것이 그랬다(물론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고, 보이지도 않는 전생을 나는 감히 상상해본다. 전생을 상상해본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경험이다. 그 때 저지른 나의 죄와 행했던 나의 옳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것이 지금 이 생의 나를 어떻게 이루고 있는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물론 어떠한 답도 얻을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나를 되돌아보고 성찰해보는 것.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 거기에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어떠한 답이 있을 수도 있다. 삶은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므로. ‘나는 이미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의 결과’이므로.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무수히 많은 말들이 갑자기 내 안에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혼란스럽고 알 수 없는 이 떨림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정리할 수 없다. 다만 선택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뿐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선택받지 못한 것은 결국 배제된다. 나는 이 책을 내 인생을 위해 선택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선택하기로 마음먹는다.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영적 세계로 입문하려거나 환생을 쫒겠다는 말은 아니다. 내면으로의 여행, 성찰과 고찰. 자신을 들여다보는데 시간과 노력을 온전히 기울여야봐야겠다는 말이다.
현실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있다. 이렇게 팍팍한 현실에서 영적 수행 운운하는 건 대부분의 삶에서 불가능하다. 대신 우리 각자에게는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존재한다.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해 보이는 현상만을 쫒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훌쩍 다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이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지혜,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줄 아는 지혜. 내면의 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때 진정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도 남들에게도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 거창한 무언가를 이룩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미약하지만 나는 이 세상을 조금씩 물들여갈 수 있다. 이 생에서 안 된다면 다음 생으로 또 그 다음 생으로 이어나가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경험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생은 기차지 기차역이 아니'잖은가. '이 칸에 탔다가 때로는 저 칸에 타고, 꿈을 꾸거나 기이한 경험에 휩쓸리면 이 칸에서 저 칸으로 가로지르기도’ 해야 한다. ‘내가 항상 같은 곳에만 머물러 있다면 내가 원하는 곳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할 것. 그것이 영적 수행이든, 현실 고행이든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래야 삶의 어느 순간 중국 대나무처럼 갑자기 약 25미터 높이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 테니까. 나는 나의 왕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발견에 달려 있다.
『알레프』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 신비롭다. 그래서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