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
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주해연 옮김 / 산책자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30-32

아렌트가 처음 연방주의를 고민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파시즘에 대항한 동맹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으며, 이후에는 1940년대 중반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관련하여, 그리고 <혁명론>에서 매디슨주의적인 주장(31)을 재고하면서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을 쓸 당시에는 이런 논의가 매우 흐릿합니다. 비록 간헐적이긴 하지만 아렌트가 지속적으로 연방주의에 의지하는 것은 주권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는 흥미롭습니다.

아렌트는 개별주권의 연합에 반대합니다. 대신 개인주의를 넘어서고 주권을 분산시킬 수 있는 사회적 다원성 개념을 제도화하는 방법으로 연방을 사유했습니다. 그녀의 논의는 공동체주의와도 거리가 있는데, 연방이란 여러 집단의 공동작업을 전제하긴 하지만 이 집단들 사이에 필연적인 공통의 소속감을 가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아렌트는 문화적 친밀성을 통치기반으로 요구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야말로 우리가 아렌트의 민족주의 비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아렌트는 유대원 주권이라는 원칙에 의거한 이스라엘 건국에 반대했습(32)니다. 아렌트는 이스라엘 건국 움직임이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 이스라엘과 영토를 공유하고 있는 정당한 거주자인 비유대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을 영원히 지속시킬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57

버틀러: 아렌트가 대명사를 사용하는 방식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녀는 혁명을 이론화하면서 인간 존재들은 함께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혁명은 '우리'가 함께 행동할 때만 일어날 수 있지요. 즉 어떤 행위가 효과가 있으려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여야 합니다. 아렌트는 이 글에서 '나'로부터 '우리'로의 변환을 효과적으로 해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러한 변환 자체가 충분히 실효성 있는 행위라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행동의 필요조건을 구성한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예컨대 아렌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정치적 삶은 우리가 조직을 통해 평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정에 기대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오직 다른 것을 형성하는 사람들과 평등한 관계에 있을 때에만 행동할 수 있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공동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58

여기에서 '인간'이란 개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공통성과 평등의 상황을 가리키며, 공통성과 평등은 변화와 행위를 구축하는 기본 전제입니다.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평등한 존재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행동하고, 변화를 만들어내고, 무엇인가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그의 개인적 행동은 평등의 조건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그 개인적 행동은 무엇보다 평등을 확립하는 행동이어야 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행동은 복수의 행동이 되고,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행동이 될 기회를 갖게 됩니다.

 

63-64

아감벤과 아렌트 중 누구도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이 노래(스페인어로 불린 미국 국가-인용자 주)를 충분히 이론화하지 못했으며, 이 노래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는 언어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화 작업은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만들어지는 민주주의, 정치적인 영역에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미학적인 표현, 그리고 우리가 '공적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과 노래의 관계를 다시 고찰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노래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데, 이때 거리는 집회의 자유를 얻지 못한 자들이 자유롭게 모이는 모순의 장소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로 이러한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노래를 부를 장소로 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64)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또한 거리라는 공간의 틀을 다시 짜고, 법적으로 금지된 바로 그 순간에 집회의 자유를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적인 정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법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하는 행동 자체가 인정을 요구하는 바로 그 법에 반하는 것이라는 모순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75

오늘날 우리는 전지구화 국면에서 민족국가의 쇠퇴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국가의 계보적 힘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일반적으로 민족국가의 쇠퇴는 전지구적 자본의 이해를 위해서 국가를 재구조화한 정치적, 경제적 과정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 쇠퇴의 이유가 애초에 민족국가라는 형태가 결점투성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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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관련 기사

국가, 극복할 것인가 지켜낼 것인가
“민족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방인 추방”
“세계적 자본주의 횡포에 구성원 보호”
페미니스트 버틀러-스피박의 두 시각
 
 
고명섭 기자
 




 

»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가야트리 스피박 대담, 주해연 옮김/산책자·1만원


주디스 버틀러(사진 위)와 가야트리 스피박(아래)은 페미니즘 이론 영역에서 가장 왕성한 지적 생산력을 보여주는 여성 학자들이다. 버틀러가 동성애자로서 퀴어이론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면, 스피박은 인도 출신으로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모로 통한다. 두 사람의 학문활동을 관찰하면, 페미니즘 이론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론적 지반에 다소 차이가 있는 이 두 사람은 페미니즘 담론 내부의 경합적 관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는 이 출중한 학자들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열다섯 살 아래인 후배 버틀러가 먼저 발제 성격의 문제제기를 한 뒤 두 사람이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은 2006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어바인 캠퍼스의 비교문학과에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를 주제로 삼아 연 학회에서 이루어졌다. 제목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이 대담의 내용은 페미니즘 이론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지구화 시대의 국가’라는 인류적 차원의 문제를 페미니스트적 감성으로 포착하고 있다. 특히 이 대담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흔히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로 번역되는 네이션 스테이트(nation-state) 문제다. 여기서 네이션(국민·민족)이 문제인 것은 어떤 기준에 따라 특정 집단을 네이션으로 포섭하고 그 기준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이 네이션 체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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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가 대담의 주제가 된 것은 그 시점에서 벌어진 사태와 관련이 있다. 2006년 4월 미국 전역에서 ‘미등록 이민자’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돕거나 고용하는 사람들까지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이 법안을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수십만명의 라틴계 이민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 더 중요하게는 이들이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불렀다는 사실에 버틀러는 주목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자신들에게 추방·배제·박탈을 안겨준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상적인 좌파적 관념이라면, 이런 상황을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자발적으로 말려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버틀러는 그런 통념과는 다른 적극적 이해를 모색한다. 네이션 스테이트의 틀에 균열을 냄으로써 그 틀을 극복할 전망을 언뜻 보여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버틀러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빌려, 자유는 자유의 요구, 자유의 수행 자체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자신들을 추방하는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말로 부름으로써 그 국가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이 모순적 사태야말로 어떤 전망을 보여준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 노래는 언어적 다수집단에 대한 비판이고, 언어적 다수집단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며, 민족을 단일한 개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다문화주의의 한 방식입니다.”

이때 버틀러가 국가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대담 내내 버틀러는 국가를 곧 ‘네이션 스테이트’로 인식한다. 국가란 근본적으로 국민/비국민을 나누는 배제와 분리를 존재 방식으로 삼고 있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 국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가 버틀러의 고민이자 질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박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낸다. 스피박이 보기에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발호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하는 장치로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시민주의는 어찌 보면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어울리는 이념일 수 있다. “국가는 우리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최소한의 추상적 구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재분배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착취·수탈·불평등을 막아내고 교정하는 기능을 국가가 수행할 수 있으며, 그런 기능을 수행하도록 국가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국가의 박탈·추방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피박은 국가의 저항 거점 성격을 강조하는 셈이다. 대담 말미에 버틀러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서 자기창조”에 관해, 다시 말해 혁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만약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통받았기 때문이고, 비판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서로 뭉쳤기 때문이며, 역사와 분석에 기반해 연대를 구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피박도 이 설명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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