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년도 안 되는 생을 살면서 많은 분들을 보냅니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분들의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천둥소리처럼 번갯불처럼 조용한 일상을 뒤엎고 지난 시간을 정면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요.
2009년 8월 23일, 오늘은 김대중이라는 강인한 이름의 대통령을 보냅니다. 나에겐 대통령 보다는 선생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이름자만 부른 적이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김대중”이라고 쓰는군요. 내가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대통령으로서보다 먼저 선생님처럼 느끼는 것은 당신께서 중요한 순간마다 신중하게 “사랑하고 존경하는…”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참 좋았습니다.
아시는지요? “사랑하고 존경하는…”이라는 말을 그처럼 진중하고 적절이 아름답게 쓰시는 분을 대통령으로 두고 사는 동안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든든하고 행복했었다는 것을요. 말을 품위 있게 하고, 밑줄을 긋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분을 대통령으로 둔 국민으로서 느꼈던 자긍심을요.
한 시대를 당신과 함께 통과해온 국민으로서 어떻게 눈물과 회한 없이 당신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일생을 되짚어보면 이것이 한 사람이 산 일생일까?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그 고난들 때문에 지레 질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 고난들을 어떻게 그리 뚫고 나올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여겨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일생은 누군가에게는 무거운 고통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빛과 희망의 근거로 자리하며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삶과 동행했던 거겠지요.
그 무엇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당신이 생전에 터뜨린 깊은 오열들을 다시 보며, 목숨마저 위태로운 순간에 당신이 남긴 주옥 같은 말들을 다시 들으며 한 시대가 저물어감을 실감합니다. 누가 당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빈자리는 채울 길 없이 크겠지요. 이 힘겹고 어려운 시대에 그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는 분으로 함께 더 계셔주시기를 바랐던 마음을 무엇에다 대겠습니까만, 그래도 보내는 마음이 오로지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당신이 다행히도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 게 그나마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큰 정치인들의 죽음이 평화롭지 못해 애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현실을 몇 번이나 겪으며 살아온 국민으로서 이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죽음을 통해 우리 현대사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 평화롭게 애도할 수 있는 시간, 벼랑 끝에서 서로 악수하듯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 화해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해주어 또 고맙습니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는 말을 마지막 말씀으로 남겨주셔 또 고맙습니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은 우리에게 얼마나 든든한 말인지요. 웃을 때면 나라의 근심을 다 짊어진 대통령도 아니고, 식견이 넓어 대화하기에 어려운 선생님 모습도 아닌, 죄송한 표현이겠지만 개구쟁이처럼 보이던 그 천진하고 긍정적인 모습의 근원이 그 말씀 속에 다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자면 또 한이 없다 했지요. 납치와 연금, 사형선고 같은 고난은 잔상으로도 간직하지 마시길. 당신의 마당이나 즐겨 읽던 책, 서로 사랑하고 존경했던 분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만 생각하시길. 당신이 가장 험한 곳에서 겪은 고난들이 오늘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우리는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의 일생은 힘껏 달려왔습니다. 넘치게 이루어놓았습니다. 그 위에서 후대는 그때보다는 조금 덜 고통스럽게 질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 당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것이라 여기고 평온한 빛을 따라 부디 영면하시길.
2009. 8. 23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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