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작가의 말


 







 

   사방에서 새벽빛이 툭툭, 터진다. 눈이 시다.

   일곱번째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보낸다.
   이 작품은 육 개월 동안 연재된 원고를 초고 삼아 지난겨울 동안 다시 썼다. 겨울만이 아니다. 봄과 이 초여름 사이…… 아니, 방금 전까지도 계속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쇄되기 직전까지도 쓰고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책이 나온 후에도. 어째 나는 십 년 후…… 이십 년 후에도 계속 이 작품을 쓰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작년 초여름, 첫 문장에 들어가기 전에 아래와 같은 약속을 했었다. 
 


   ―새벽 세시에 깨어나 아침 아홉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으려고 합니다. 요가원에 다녀와 점심을 지어 식구와 먹고 어쩌면 조금 더 잘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요. 간혹 누군가를 만나 밤늦게까지 헤어지지 못해 이야기를 더 나누거나 길을 걷는 일도 있겠지요. 그런 날들 속에서도 되도록이면 이른 저녁을 먹고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세시쯤엔 깨어나는 단순한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소설은 완성되겠지요.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려퍼지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쓰려는 소설이 그런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지금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노트를 들여다보듯 그들 마음 가까이 가보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청춘에만 갇혀서는 또 안 되겠지요. 누구에게든 인생의 어느 시기를 통과하는 도중에 찾아오는 존재의 충만과 부재, 달랠 길 없는 불안과 고독의 순간들을 어루만지는,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기도 하는 것처럼 세월이 흐른 후의 어느 날 다시 한번 찾아 읽는 그때도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소설로 탄생하기를요. 바흐는 가까운 사람들이 멀어져가도 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연주한다고 말했지요. 이번 소설에 바라는 내 마음도 그런 것입니다. 멀어져가는 가까운 사람들을 보내주는 마음이 읽혔으면 좋겠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나의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요? 
   언어는 상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내가 글을 쓰는 과정의 한 부분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쓰고 누군가는 읽으며 치유되고 회복하기를 바라고 그리 되어도 지나간 시간이 되돌아오는 법은 없지요. 물 위에 떨어진 꽃잎이 물살을 타고 떠내려가듯 붙잡지 않고 보내줄 수 있는 마음이 치유인지도 모르겠어요.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듯이요. 아마도 그 과정에서 문학으로서의 그 ‘무엇’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할 테지요. 무엇이 발생할지,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는 쓰는 나도 모릅니다. 그 ‘무엇’은 얼마 전 이탈리아 강진 때 잔해에 깔린 채 서른 시간 동안 뜨개질을 하며 구조를 기다렸다는 할머니의 모습을 띨 때도 있을 테고, 그때에 겨우 스물셋, 넷이었던 젊은 약혼자들이 서로 껴안은 채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는 모습일 때도 있겠지요. 어떤 과정을 거치든 완성된 후에는 쓰는 나와 읽는 당신께 작은 치유와 성장의 시간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그를 위해 새벽 세시에서 아침 아홉시까지 집중하고 몰입하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쓰는 일이 나에겐 행동이며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증언이랍니다. 혹, 이른 새벽에 깨어나거든 이 세상 어딘가에 쓰는 나도 깨어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주세요. 그러면 그 순간에 우리는 함께 깨어 있는 셈이 되겠지요.
 
 


   약속대로 이 소설은 새벽 세시에서 아침 아홉시 사이에 씌어졌다. 작품 속의 화자들이 새벽 거리를 걸어다니고 새벽 시간에 서로를 찾아다니거나 새벽에 내리는 눈을 보고 새벽 빗소리를 듣고 새벽에 어디선가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풍경이 잦은 것은 이 작품을 쓰고 있던 시간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작가의 말을 쓰고 있는 시간도 새벽이다.  

   여러 개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사랑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으나 내게는 사랑이 죽음이기도 한 것인지 끊임없이 죽음이 따라 나왔다. 작품을 쓰는 동안 놀랍고 쓰린 마음으로 애도해야 했던 연이은 큰 죽음들의 잔상이 내 책상 앞까지 따라왔을 수도 있고…… 함께 지내다가 예기치 않았던 일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가까웠던 사람들이 내게 남긴 내상들이 나를 그쪽으로 인도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 때문이었든 작품을 마쳐놓고 한동안 얼굴 한쪽이나 어깨 한쪽이 무엇에 쓸린 것처럼 아파 작품을 저만큼 밀어놓았다.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어느 새벽 시간…… 가만히 원고를 끌어당겨 책상 앞에 펼쳐놓고 한쪽으로 쏠려 있는 이 작품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아니라 죽음 이야기가 되어버렸어, 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서 기뻤던 순간들을 줄기차게 생각했다. 깨어나기 싫었던 꿈들을, 여행길에 스쳐 지났던 잊히지 않는 풍경들을, 광장의 사람들이 풍기던 열기와 손을 가져다 대고 싶었던 어린애들의 어여쁜 뺨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청춘들의 숨소리와 그들이 번성시킬 아름다움을. 그 여운들이 별 하나하나 같은 나의 모국어에 실려와서 이 작품을 사랑 쪽으로 이끌고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하여 이제야 이 모습이 되었다.  

   사랑의 기쁨만큼이나 상실의 아픔을 통과하며 세상을 향해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젊은 청춘들을 향한 나의 이 발신음이 어디에 이를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울한 사회풍경과 시간을 뚫고 나아가서 서로에게 어떻게 불멸의 풍경으로 각인되는지……를 따라가보았다. 최승자 시인의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제목을 생각해냈다. 가능한 시대를 지우고 현대 문명기기의 등장을 막으며 마음이 아닌 다른 소통기구들을 배제하고 윤이와 단이와 미루와 명서라는 네 사람의 청춘들로 하여금 걷고 쓰고 읽는 일들과 자주 대면시켰다. 풍속이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도 인간 조건의 근원으로 걷고 쓰고 읽는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 안에서 나는 작품 바깥에서 글쓰기를 했던 셈이다. 미래의 이야기를 쓰면서 팔이 떨려 책상에서 몇 번이나 벌떡 일어났던 순간, 단이의 이야기를 쓰다가 젊은 청년의 우수에 마음이 고즈넉해져 새벽 거리를 쏘다녔던 순간, 글을 쓰지 않는 새벽에 실종과 의문사에 이른 이들의 기록들을 식탁 위에 펼쳐놓고 읽다가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잠시 애도의 시간을 가졌던 순간…… 종래는 작품 속의 그들 또한 글쓰기 앞에서 뭔가에 벅차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느꼈던 그 모든 순간순간들을 여기에 부려놓고 이제 나는 다른 시간 속으로 건너간다.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   
    


 

 

2010년 5월
신경숙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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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뒤통수와 정수리를 2019-06-2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성하고 있는 만곡한 덮개판을 떼어내고, 이어서 그보다는 만곡도가 덜한 측두부 덮개들을 떼어내는 것으로 수술을 시작했다. 얼굴 덮개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지만, 구속 브래킷에 물려 있어서 전망경을 써도 나는 그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밖으로 드러난 나의 뇌였다. 뇌는 십여 개의 하위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하위 부품의 표면은 정교하게 주조된 외피로 덮여 있었다. 전망경을 외피들을 가르고 있는 틈 가까이로 가져가자 그것들 내부의 엄청난 메커니즘을 일별할 수 있었다. 김질날 만큼밖에 안 됐지만,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 내가 목격한 그 어떤 기계장치보다 더 정교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 만들어낸 그 어떤 장치도 범접할 수 없는 이것이 신의 작품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테드 창, ‘숨‘, 숨(p70) 중에서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2019-09-24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또 다른 생의 긴 알리바이를 보았던 것이다.
-은희경, 빛의 과거(p13) 중에서

진로 이야기를 하면서 선배는 2019-10-0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실 자기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 나는 NGO단체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는데 국화는 난데없이 자기는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기는 사람,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강심장이 되겠다는 뜻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그게 아니고 이기는 사람,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 그렇게 이기는 사람. 정확히 뭘 이기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국화는 냉정하고 무심하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노아 선배는 그 말이 뭐가 그렇게 감동적인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뭐 그런 말이 있냐,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다 해.
-김금희, ‘체스의 모든 것‘, 오직 한 사람의 차지(p25~26) 중에서

물론 딱 맞는 사람과 결혼하지 2019-11-0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거다. 만약에 바로 그 사람, 내가 사랑하고 원하고 또 나를 사랑하고 원하는 사람과 진실하고 건실하고 충만하고 만족스럽고 행복한 결합을 이룬데다가, 내 짝의 사랑도 식지 않고 나의 사랑도 식지 않고 두 사람 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살해당하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그렇게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다면? 정말로, 진실로, 그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나? 이곳 공동체는 그럴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크고 지속적인 행복을 바라는 것은 과도한 일로 봤다. 그래서 의심, 죄책감, 후회, 두려움, 절망, 원망 속에서 끔찍한 자기희생을 치르며 결혼하는 것이 이곳에서는 암묵적인 필수 코스였다.
-애나 번스, 밀크맨(p363) 중에서

어쩌면-올해의 책!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2019-11-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권여선, ‘하늘 높이 아름답게‘,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p67) 중에서

바로 복희가 내 삶에 개입한 2019-12-0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배우라면 내게도 복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보호, 그건 앙리와 리사, 그리고 정우식 기관사가 내게 취한 태도이자 행동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조해진, 단순한 진심(p130) 중에서

노래할까요. 2019-12-10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재 씨가 말했다.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수 없어요.
왜요.
콩밭, 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콩밭 매는 아낙이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
그렇군요.
-황정은, 백의 그림자(p73~74) 중에서

아이 앞에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2019-12-16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덮으며 어색한 시범을 보인다.
-엄마도 예전에 늘 헷갈렸거든. 실수할까봐 긴장하고. 그런데 이렇게 외운 뒤로 안 잊어먹었어. 밥 먹는 손 가리는 손, 밥 먹는 손 가리는 예...... 아 참, 엄만 너랑 반대고.
-김애란, ‘가리는 손‘, 바깥은 여름(p217) 중에서

누구에게든 이토록 순하고 연한 마음이 있는데, 그것들은 그토록 순하고 여리기만 해서 남들, 핸드폰, 소셜, 미래, 평균 같은 그다지도 힘센 것들 앞에 자꾸만 무릎을 꿇고 만다. 찬성이도, 도화도, 정우도, 재이도...

언제나 떠나고 싶으면서도 떠나 2019-12-2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 못하는 여자애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애는 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여자애를 가로막고 있는 바다를 떠올렸다. 이 소설은 그 바다의 이미지에서 시작됐다. 쇼코가 제일 먼저 내게 왔고, 소유가, 할아버지가, 엄마가 내게 왔다. 이 소설을 쓰면서도 나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들은 내 소설 속에서 나와 무관하게 수박을 먹고 산책을 하고 팔짱을 끼고 그림을 그리고 싸우고 야간버스를 타고 여행을 했다.
활자로 인쇄되어 나온 그들은 조금 더 낯설어졌고, 나는 소설에도 제 나름의 생명과 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은 나라는 사람에게만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리하여 당신에게로 갔다. 당신에게 읽히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사랑받기를 원하면서.
-최은영, ‘작가노트/나를 다독이면서‘, 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p304) 중에서

그리고 그녀는 이해하고 2019-12-27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주된, 그리고 가장 큰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시비만은 예외여서 그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었고, 그녀 또한 그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았다. 그것이 사람들을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피부였다-자신의 인생을 공유하는 또다른 누군가의 사랑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무엇이든 가능하다(p76) 중에서

새해 복 많이 2020-01-03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받으세요.

I have sometimes 2020-01-09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been sad that Tennessee Williams wrote that line for Blanche DuBois, ˝I have always depended on the kindness of strangers.˝ Many of us have been saved many times by the kindness of strangers, but after a while it sounds trite, like a bumper sticker. And that‘s what makes me sad, that a beautiful and true line comes to be used so often that it takes on the superficial sound of a bumper sticker.
-Elizabeth Strout, My name is Lucy Barton(p83) 중에서

어떤 삶은 이유 없이 2020-02-24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식당 주방에서 일한다는 그들 남매의 엄마는 난쟁이였다. 선우를 좀더 가혹하게 눌러놓은 것처럼 작았다. 그 엄마를 보자 이상하게도 내가 앞으로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살아갈 방향도 정해졌다. 일단 엄마에게서 독립할 것이다. 엄마는 어떤 일에도 연루되어선 안된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
-권여선, 레몬(p145) 중에서

엄마, 대구에 계신 엄마...

‘아니, 서른 한 살에 인생은 2020-03-1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끝난 게 아니야.‘ 안드레이 공작은 단호하게 결심을 굳혔다. ‘내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해야 해. 피에르도,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어 하던 그 소녀도, 모두들 나를 알게 해야 해. 나의 삶이 나 혼자만을 위해 흘러가지 않도록, 사람들이 그 소녀처럼 나의 삶과 무관하게 살지 않도록 해야 해. 나의 삶이 모든 사람들에게 반영되도록, 그들 모두가 나와 더불어 살아가도록 해야 해!‘
-레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중)(p24) 중에서

올가 (두 누이를 끌어안으며) 2020-08-20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리도 명랑하고 씩씩한 음악 소리를 듣고 있으니 살고 싶어져! 오, 하느님! 세월이 지나가면 우리는 영영 떠나가고, 결국엔 잊히겠지. 우리의 얼굴, 목소리, 우리가 몇 명이나 있었는지 다 잊힐 거야. 하지만 우리의 시련이 우리 뒤에 살아갈 사람들에게는 기쁨으로 바뀔 거야. 이 세상에는 행복과 평화가 오고,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를 따스한 말로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감사할 거야. 오, 사랑하는 내 동생들아, 우리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아가는 거야! 음악이 저리도 명랑하고 즐겁게 울리는 걸 들으니, 우리가 왜 사는지, 왜 고통을 받는지 알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아...... 그걸 알 수만 있다면, 알 수만 있다면!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세 자매‘, 체호프 희곡선(p324~325) 중에서

그리고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2020-11-1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마를 댄 채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구겨진 신발 위에, 양말도 없이, 까치발을 한 채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집마다 매달려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 사이로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는 풍경을, 그저 황홀하게.
-백수린, ‘고요한 사건‘, 여름의 빌라(p104~105) 중에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2020-11-1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 나는 당신이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나는 이 여름, 그런 당신의 분투에 나의 소설들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같은 책, ‘작가의 말‘(p290) 중에서

2020년 겨울의 문턱에서,
ㅇㅇ

새해 복 2021-01-0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많이 받으세요.

사람이 집을 짓는 이유는 2021-01-2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돌아갈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집‘이 담는 것은 밥 먹고 잠자는 일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집‘은 그곳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 공간이다. 그 마음은 보이지도 않는데 가끔 이리저리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담는 집의 가치는 보이는 잣대로 계측되지는 않는다.
-서현, 내 마음을 담은 집(p258~259) 중에서

집은 돌아가야 할 곳인데, 그 집에는 항상 나보다 내 마음이 먼저 도착해 있다. 건축가는 미래에 지어질 집을 설계한다. 언젠가 지어질 그 집이 어떤 집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집에 살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고 싶은 집. 그래서 결국 그 마음이 담겨 있을 집.
-같은 책(p260) 중에서

The bride was a 2021-01-2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widow now; but the same beautiful serenity shone in her face, and the sweet resignation of a truly pious soul made her presence a consolation to those who came to comfort her.
‘O Meg! how can you bear it so?‘ whispered Jo, as she met them at the door with a smile of welcome, and no change in her gentle manner, except more gentleness.
‘Dear Jo, the love that has blest me for ten happy years supports me still. It could not die, and John is more my own than ever,‘ whispered Meg; and in her eyes the tender trust was so beautiful and bright, that Jo believed her, and thanked God for the immortality of love like hers.
-Louisa May Alcott, Little men & Jo‘s boys(p231) 중에서

내가 어릴 때 노먼은 2021-02-1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국에 안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고 말하곤 했어. 안나가 거기서 살았다면 다르게 살았을 거라고, 안나는 한국에서 덜 외롭고 더 행복하게 살았을지 모른다고 노먼은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안나는 안나의 삶을 살았어, 여기서.
-황정은, 연년세세(p177~178) 중에서

기다렸습니다 2021-02-18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2021-03-1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김금희, 경애의 마음(p349) 중에서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2021-03-1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고층부 작업하려고 최대한 늘였을 때 꺾였는데, 순식간이었어. 그때 날 그 아래서 끌어냈던 동료들이 오래 찬 바닥에 앉아서 보상금을 받아 줬어. 누나들은 그냥 포기하고 장례 치르려고 했는데 고마웠지. 큰누나가 염할 때 삼베 안 입히고 양복 입히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라. 양복 한 벌 못해 줬다고 우는데 내가 언제 양복이 필요했다고.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p195~196) 중에서

쌀 부쳐따 2021-03-30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김장 보내따
깻잎 바다라
고구마 캐서 보냇따
......
너는 언지나 근사해따
나는 아버지가 되어서 너의 힘이 돼주지는 모타고 니 어깨만 무겁게 햇지마는
너는 언지나 근사해따
-신경숙, 아버지에게 갔었어(p169) 중에서

마음이 어질고 착해서 2021-04-0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 어머니가 힘들어 보이니까 여동생을 등에 업어 기른 아이이며 형과 동생 틈에서 지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늘 양보하며 눌려 지내는 놈인데 무슨 간첩이냐, 등록금 걱정에 학비가 덜 드는 해양대학교에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마음에 구멍이 나서 자전거 여행에 나섰을 뿐인디 무슨 간첩이냐,고 조목조목 말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깜짝 놀랐어. 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거든. 내가 해양대학교에 지원한 이유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둘째의 마음까지도.
-위의 책(p259) 중에서

살아냈어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라고.
-같은 책(p416) 중에서

선생님께 쓰기란 살아내는 것,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가장 소중한 혈육의 상실로 표현되었나요. 선생님의 가장 힘든 상황 속에 그래도 살아내며 한걸음씩이라도 나아가길 온 식구들이 응원하는 글로 어쩔수없이 읽혔습니다. 그게 가족이니까요. 저는 엄마를 부탁해,보다는 외딴방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읽었습니다.
변명, 이해, 진실, 논리, 책임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그저 멀리서라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응원하고 싶었던 것은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제 자신에게 정리했습니다.
며칠전 8주기로 아버지에게 갔었어요. 살아계실때 아빠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묻지 못했던 것이 후회됩니다. 문득문득 아빠를 더 생각하게 해주셔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외로움이여. 오 외로움이여! 2021-05-0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것이 올리브를 괴롭혔다.
평생 그런 감정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그녀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생각했다. 그건 어쩌면 줄곧 존재하던 공포가 마침내 사그라지고, 지금 그녀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외로움이라는 이 밝은 우주에 그 자리를 내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이런 느낌이 혼란스러웠다. 마치 그녀 밑에-평생 동안-큰 바퀴 네 개를 달고 살아왔는데, 그것을 당연히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이제 네 개 전부가 흔들흔들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알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다시, 올리브(p414) 중에서

신디가 쓸 수 있는 것은 2021-05-0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월의 햇빛에 대해서였다. 그것이 세상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2월에 대해 불평했다. 춥고 눈이 오고 이따금 비가 오고 눅눅하다고 불평했고, 얼른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신디에게는 2월의 햇빛은 늘 비밀 같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2월에는 낮이 점점 길어졌는데, 잘 관찰하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루의 끝마다 세상이 조금씩 더 열렸고, 더 많은 햇빛이 황량한 나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약속했다. 그 햇빛이, 약속했다. 그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침대에 누워 신디는 지금도 볼 수 있었다. 하루의 마지막 금빛이 세상을 여는 것을.
................
˝네가 죽을지 안 죽을지 나는 몰라.˝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올리브가 말했다. ˝문 앞에 크리스마스 화환이 아직 걸려 있더라. 그러는 사람들을 종종 봤는데 이유를 모르겠어.˝
신디가 말했다. ˝오, 저도 그거 싫어요. 톰한테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이는 왜 떼어내는 걸 자꾸 잊어버리죠?˝
올리브가 허공에 손바닥을 휙 내리쳤다. ˝경황이 없어서 그래, 신디. 요즘 다른 것에는 집중할 수가 없을 거야.˝
어리둥절했지만, 신디는 올리브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단순한 말이었지만, 완벽한 사실이었다. 오, 가엾은 톰! 신디는 생각했다. 톰, 내가 그동안 당신한테 너무했어......
올리브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저길 좀 봐.˝ 올리브가 말했다.
신디가 고개를 돌렸다. 햇빛이 장엄했다. 한낮의 빛이 끝을 향하면서 입 벌린 모습을 한 태양이 연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황홀한 노란색을 쏟아냈고, 그 빛은 헐벗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내리비쳤다.
그리고 그다음 일어난 일은 이것이다-
신디는 이 일을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말했다. ˝어쩜, 나는 늘 2월의 햇빛을 사랑했어.˝ 올리브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쩜.˝ 그녀는 경외감이 깃든 목소리로 한번 더 말했다. ˝2월의 저 햇빛 좀 봐.˝
-같은 책(p199~200, 223~224) 중에서

˝악몽이 아닌 게 없지. 모든 2021-05-14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게 악몽 같은걸.˝
베브는 소파에 앉아 도티의 손을 잡아올렸다. ˝한 번에 하루치만, 도티.˝
˝내 사촌 신디 레이가,˝ 이저벨이 안락의자에 앉아 말했다. ˝코끼리를 먹는 방법은 한 번에 한 입씩 먹는 거라고 말하곤 했어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에이미와 이저벨(p504~505) 중에서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2021-09-23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p. 311) 중에서

물이 순환하듯, 그래서 1948년의 눈이 작년에 내가 맞은 눈과 이어져있듯, 저 멀리의 혼이 이곳의 나와 대화하고, 이미 나무밑에 묻힌 새가 오늘 이곳에 그림자를 드리우듯, 그렇게, 작별하지 않는다. 제주와, 광주와, 그리고 저 진도의 바다와, 그리고... 누군가에게 편두통으로, 위경련, 섬망으로 생채기를 내서라도 기억되고 머무르기 바라는 그 혼들과 작별하지 않는다. 이것은 차라리 명령문이 아닌가. 작가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다.

오랜만에 2024-03-15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녀갑니다.

˝부수기 때문에 무대 디자인을 2024-04-2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고 싶어졌다는 말이에요?˝
내 이야기를 듣는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네.˝
부숴야 할 줄 알면서도 짓기 때문에. 오직 그뿐이다.
-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p12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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