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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ㅣ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1. 프.라.하.의.소.녀.시.대
제목을 보고 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체코슬로바키아란 이름이 더 익숙하게만 느껴지던 예전과 달리 모방송국 드라마로 한때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체코의 한 낭만적인 도시 '프라하'와 '소녀'라는 말에 담긴 특별한 어감 때문이었다. 흔히 '소녀'라 칭함은 순수하고, 어리숭하고, 순정을 품고서, 물정 모르고(?) 살아가는 성인이 되긴 전의 여자를 일컫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 선입견을 가득 머금고 있는 나에게 책표지에 적힌 소갯글이 이채롭다.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소녀들을 통해 그린 동유럽 현대사. 추리소설을 읽듯 두근거리고 묵직한감동이 느껴지는 다큐멘터리' 고개를 돌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앞표지 속 등장인물의 시선을 마주보면서 책장을 넘겨보았다.
첫머리부터 논픽션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작가 '요네하라 마리'와 그녀와 함께 소녀시절을 보낸 친구들의 사진 그리고, 그들의 추억의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이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2. 친구찾기의 여정
이 책의 줄거리는 주인공 마리가 1960년부터 5년 동안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니면서 사귀었던 친구들에 대한 추억을 소개하면서 어느 새 뿔뿔히 흩어져버린 그 친구들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지식으로 반에서 제일가는 '빠꼼이'인 동시에 영화에도 남다른 흥미와 지식을 가진 그리스 소녀 '리차', 자신의 조국 루마니아에 대한 애국심이 남다른 거짓말쟁이의 푸근한 '아냐', 어딘가 모를 고독감을 품은 듯 약간은 어른스러운 모습의 유고슬라비아인 야스나, 이들이 마리가 찾아가는 친구들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단지 소녀들의 약간은 허황되고 가슴 설레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정세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벅찬 감이 있기도 하다. 그들이 보낸 소녀 시절의 풋풋함과 유쾌함이 책 곳곳에 위치하고 있긴 하나 내가 완전히 이해하기엔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도, 동유럽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중부 유럽에 대한 지식도 미흡할 따름이었다. 체코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킨 벨벳혁명이나 바츨라프 광장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은 작가의 뛰어난 글쓰기 능력 덕분이 아닌가 싶다. 만날 듯 만날 듯 하면서 손에서 놓치곤 하는 친구들의 흔적들과 그들을 찾아가는 마리의 노력을 보고 있으면 어느 새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관찰하는 방관자적 입장의 독자가 아니라 마리의 동행자가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간신히 연락이 된 친구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두근두근한 느낌이 들었고, 소녀시절의 모습과 영락없이 닮은 친구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는 슬며시 웃기도 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 친구를 보면 나도 모르게 냉소를 머금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은 바로 내가 마리인 동신에 마리의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3. 친구란...
책 속에서 작가가 말했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나라 사람을 접하고서야 사람은 자기를 자기답게 하고, 타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 자신과 관련된 조상, 문화를 이끈 자연 조건. 그밖에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갑자기 친근감을 품게 된다고."
아마 이러한 과정에서 정립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일 것이다. 동류항 속에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다가 다른 것 사이에서 비로소 자신을 인식하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들여다보기보다 다른 이들과 섞여 있는 자신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친구들이 아닌가 싶다. 나를 알게 해 주는 다른 변수들. 그래서 나의 또 다른 존재인 친구가 소중한 것일 테지......
사람들은 흔히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옛 친구가 그립다고, 나이가 들수록 계산적인 삶에 둘러싸이는 것이 씁쓸하다고.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속물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소리일 것이가. 그래서 예전의 그 순진하던, 빤히 보이기에 정감이 가는 속셈들로 함께 추억을 만들었던 깨벗은 친구들이 더욱 그리운 것일 테지... 하지만 이제 친구들도, 나도 변했다는 것을 알기에 선뜻 친구들을 찾기가 두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마리가 옛 친구들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며 사선에서 헤매는 모습에 나의 마음까지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상상하던 모습과 달랐지만 자신의 생활에 열심히인 리차의 모습을 보고선 마음 속에 뭉클한 감정이, 유대인의 피를 숨기도 그토록 열정적으로 루마니아를 부르짖던 애국자 아냐의 새로운 세계관 앞에서는 나도 모를 배신감이, 언제 파괴될지 모를 아름다운 도시 베오그라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 야스나에게는 애틋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변한 친구들도 역시 예전의 마음을 버린 것은 아니기에 만나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람의 과거는 묻히는 것일 뿐 지워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마리의 이야기를 읽으며 모처럼 친구들 모습을 하나, 둘 떠올려 본다. 핸드폰으로도 블로그로도 찾기 힘든 친구들의 모습이 더욱 애틋하게 그리워지려는 찰나이다. 버려지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이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혹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아니면 친구들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찾아가는 것도 해 볼 만한 여행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