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많은 복잡한 것들은 결국 단순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소설책은 결국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착한 소녀가 계모를 만나 힘들어 하다가 나중에 복을 받은 이야기(신데렐라, 콩쥐팥쥐), 눈먼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고 몸을 바친 효녀 이야기(심청전), 우연히 만난 남녀가 신분차이를 극복하고 일찍 성에 눈 뜬 덕분에 모진 시련을 이겨 사랑을 이룬 이야기(춘향전), 이복형과 아버지 애첩의 간악함을 떨치고 가출하여 자수성가하는 이야기(홍길동전). 이런 식으로 간명하게 정리되는 이야기라야 길고 복잡하게 이어질 수도, 식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결국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내가 하고픈 얘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상이 너무나 당연하여 궁금증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닳고 닳아버린 내 생각의 덩어리들. 뇌는 분명 골골이 파여 있지 않고 그 골골이 메워지면서 민무늬의 덩어리가 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만난 ‘앱’ 하나. 이 우연한 만남이 나에게 궁금증을 가지게 할 줄이야 내가 어찌 알았던가! 딸내미가 동네 언니를 통해 우연히 알아온(역시 생활의 지혜는 학교가 아닌 동네 언니 오빠들이 알려주는 것이란 만고불변의 진리) ‘나만의 실험실’이라는 제목의 앱. 동네 언니가 설치했다면서 지 아빠에게 설치해 주길 원했으나 ios체제에선 없고 안드로이드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만 해 준 그 앱. 그리하여 나랑 같이 사는, 안드로이드를 *무시하며 아이폰을 받들어 마지않는 XY 염색체는 나에게 아이폰으로 갈아타지 않을 것을 - 자기는 진작에 나에게 갤럭시를 버리고 갈아탄 주제에 은근히 ‘아이가 있는 집은 아이폰도 있고 갤럭시도 하나 있어야 할까봐’라는 말도 안 되는 대사를 날리며 – 은근히 종용하며 그 이름도 절절한 ‘나만의 실험실’을 내 폰에 깔았다. 물론 ‘한 붓 그리기’ 처럼 애들 놀잇감이겠거니 생각하고 애가 놀도록 내버려 뒀다가 내가 더 빠져버린 앱, 김중혁이 개발할 듯도 싶은 앱.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더라는.
늘 그렇듯이 이야기는 이렇게 느닷없이 엉뚱한 방향에서 시작된다. 일단, 이 앱은 구매자(?)에게 ‘흙/물/불/공기’라는 기본 요소를 주고 만들어야 할 ‘첫 번째 레시피’를 지루한 ‘과제’인 양, 심심하고 무뚝뚝한 모습으로 툭 던져준다. ‘교육용 앱이군’이라고 생각하게끔 말이다. 그렇게 심상한 모습으로 드러난 첫 번째 레시피에는 ‘강, 구름, 대기, 땅, 모래, 바다, 바람, 벽돌, 비, 사막, 수증기, 식물, 안개, 압력, 에너지, 오아시스, 지진, 진흙, 태풍, 화약, 황사’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하여 이 과젤 완성하면 단계로 넘어가는 식이다. 보충, 심화 학습으로 단정 짓기도 뭣하고, 단계별 학습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뭐라 한 마디로 단언할 수 없는 묘한 과정과 단계들. 일단 ‘강’은 ‘물’과 ‘물’을 섞으면 완성되고, ‘강’을 두개 섞으면 ‘바다’가 된다. ‘구름’은 ‘수증기+공기’가 만나야 하는데 ‘수증기’는 또 ‘물+불’이 만나야 한다. 결국 여기서 제시한 과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본 요소’만 가지고 이리 저리 엮고 끊고, 이러쿵 저러쿵하여 지지고 볶아야 한다는 소리다. 네 가지 기본 요소로 모든 걸 완성하라니 이건 천지창조가 따로 없지 않은가! ‘나만의 실험실’이라는 말만 믿고 어설픈 과학적 지식에 소견을 보태어 마구 조합하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들이 꽤 있다. 기본 요소들을 우연히 조합하여 만들기도 하고 어설픈 지식으로 만들어 지기도 하는 레시피들. ‘모래+압력’은 ‘유리’가 되고, ‘유리+유리’는 ‘안경’이 된다. ‘안경’이 ‘모래’를 만나 ‘모래 시계’가 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식물+구름’이 만나 ‘목화’가 되는 것은 상상력과 과학 언저리의 어디쯤이라고 해야 할밖에. 이 어이없고도 우스운 짓거리에 감탄하다 못해 감명까지 받아 여기에 빠져버린 딸내미와 나는 2단계 레시피에서 ‘달’과 ‘별’과 ‘우주’와 ‘목화’를 만들지 못해 헤매이고 있었다. 생활에 찌들고 권모술수에 닳고 닳은 어멈은 어린 생명체 몰래 몰래, 물어보면 무엇이든 알려주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필적할 만한 ‘네이*’를 검색하여 앱 사용자들이 공개한 레시피를 훔쳐본 후 ‘별’과 ‘달’을 제조하였으나 컨닝이 늘 그렇듯이 쉬운 만큼 개운하진 않았고, 또한 스포일러를 영접한 후 보는 영화처럼 온몸을 떨게 할 짜릿함도 선사해 주지 않았다. 측은하게 날 보면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거래 엄마. 엄마 네이* 봤지?’라고 말하는 저것이 정녕 8살이던가! 그래서 이젠 어린 것 앞에서 웬만하면 답을 보지는 않기로 나름의 결심을 한다. 보더라도 어린 것이 전혀 눈치 챌 수 없도록, 나이에 걸맞고, 나의 영민함에 걸맞게 보리라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바쁘게, 퇴근하자마자 씻지도 않고 – 아이에겐 늘 외출했다 오면 씻어라, 메르스가 요전에 있었던 일이다. 무슨 병이 널 쫓을지 모른다, 넌 나의 모든 것이다 등등의 모든 잔소리를 하면서 정작 나는 하지 않는 것, 그게 모름지기 부모인 것이지- 앉아 8년된 미확인 생명체랑 레시피를 만들기 시작한다. 어린 것은 자기가 하는 앱이니까 폰을 자신에게 달라고 외치고, 나는 내 폰에 깔았으니까 내가 해야 한다며 항변하면서, 제각각의 논리적인 근거를 들이대며 싸우는 이 광경. 유교적 예의범절에 눌려 가부장적 억압을 탈피하고자 하는 새로운 부모와 자녀 간의 소통하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본인의 노모는 혀를 쯧쯧 차며 ‘어린 것이랑 에미가 뭣하는 거여’라는 표정으로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으나 그건 분명 노모가 나에게 이리 해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눈빛이 분명하렸다. 그러나 효심 가득한 나는 노모에게 괜찮다는, 이해한다는 눈빛과 제스추어를 보여 주었고, 그것에 감동한 노모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쯧쯧’이란 두 음절의 감탄사를 뱉으며 돌아섰다.
여튼 뭐가 나올지 모르는 3단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누르다가 결국 우린 ‘바다’에 ‘에너지’를 결합해 ‘생명’을 만들어 냈다. ‘생명’이라니. 정말 세상을 창조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짜릿함을 8년 된 생명체와 40년 된 생명체가 함께 느끼다니. 신께서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늘’에 ‘생명’을 넣었더니 ‘새’가 되고 ‘새’가 ‘새’를 만나니 ‘알’이 되고 ‘알’이 ‘불’을 만나 ‘달걀 후라이’가 되더라니.. 이건 무슨 생명창조의 신화가 배를 채운 듯 포만감을 느끼게 하더니다. 그리하여 탄력받은 우리는 ‘땅’에 ‘생명’을 불어 넣어 인간을 만들고 ‘인간’과 ‘인간’을 모아 ‘사랑’까지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랑’에 ‘인간’을 첨가하였더니 ‘아기’까지 탄생했다는... 이 오묘한 탄생의 신비.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호한 사람 두 개로 ‘아기’를 만들다니 이건 요즘 새로 등장한 호모와 레즈에 대한 놀라우리만치 관대하고도 자유로운 성에 대한 담론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아이에게 따로 성(性)에 대해 설명할 필요조차 없더라는. 놀라운 발견의 연속이여.
그런데 우연히 ‘사랑’에 ‘바람’을 불어넣었더니 ‘결별, 이혼’이라는 완성품이 나왔다. 이건 뭐지? 이렇게 단순한 것을. 그냥 ‘바람’이 ‘바람’이 아니구나. 그래서 ‘바람’을 ‘바람’이라 하는구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구나’라는 선승의 문답을 듣고 웃고 말았더니 ‘바람이 바람이고, 바람이 바람이 아니로구나’라는 생각이 내 등짝을 죽비로 내려치는 순간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 싶더란 거지.‘ 이건 뭐....
그리하여 나에겐 ‘슬슬 감이 오는 레시피’란 제기발랄한 제목의 두 번째 레시피를 지나 ‘이제야 좀 할 만한 레시피’라는 제목의 세 번째 레시피 속에 있는 ‘천사’만 완성하면 네 번째로 달려간다. 그대들도 하고 싶지 않은가? 그대만의 실험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