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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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내 친구 왈, 경제적으로 넉넉할 때의 가족은 서로에게 힘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 가족은 짐이 된다고 한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별로 와닿지 않더니 30대가 넘어 보니 몸으로 이해가 된다. 물론 인생의 마침표를 찍지 않은 이상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스코어로는 그렇다는 뜻이다. 내가 힘들 때 그들은 나의 곁에서 묵묵히 힘이 되어 주지만, 정작 서로가 힘들 때에는 서로에게 무지막지하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가족이란 서로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타인들이 주는 상처보다 그 타격이 몇 만 배는 크다. 내 상처 부위를 어쩜 그리도 콕 찝어서 그곳에 소금을 살살 뿌려주는지 마음이 쓰리고 아파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처럼 나를 피폐하게 만들곤 한다. 물론 나 역시 나의 가족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남들에게 이런 고통을 당했다면 다시는 그들을 볼 수도 없을 터이고 보지도 않을 터인데 신기하게 가족들과는 다시 화해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완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처를 준 그 자리에 약을 발라주고, 반창고를 붙여 도닥여 주는 것도 가족이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보다. 

이 책에서는 추리소설의 기법을 차용하여, 너무나 개성적인 사람들이 합리성이나 효율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가족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 역시 가족을 해체하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고 싶어서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가 자신에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한다. 그런 모습이 결국은 가족의 모습이고, 가족으로 살아가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일본 추리소설의 영향 탓인지 요즘 부쩍 이런 기법이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가며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하더니 이 책에서는 '유지'라는 한 소녀를 잃은 가족들이 유지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중소 무역상인 아버지와 화교출신의 어머니, 그들 사이에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태어나 바이올린이라는 귀족적인 악기를 배우고 있는 바이올린 영재인 유지, 그리고 이들의 이복 남매인 은성과 혜성이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가정사가 이들의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 부지런히 돈을 벌어오기는 하나 적절히 무심한 능력 있는(?) 가장, 세련된 강남 아줌마로 살아가며 자신의 아이의 재능을 키워주려 애쓰면서도 공허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방인 엄마, 엄마의 기대를 밀쳐둘 수 없어 조용히 수긍하는 듯 살아가나 나름 살아가는 자들의 의미를 생각하며 나이보다 조숙한 시선을 간직한 유지, 전처 소생이라는 타이틀 속에 버림받았다는 열등감을 버리지 못하고 이곳저곳에서 흥청망청하게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은성, 포커 페이스로 살아가는 온화한 인물로 보이나 마음의 불덩이를 견디지 못해 몰래몰래 불을 지르고 다니는 다감한 개인주의자 혜성까지. 이 소설 곳곳에서는 마음 한 곳이 불구인 채 살아가고 있는 군상들이 등장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가정 속에도 평범한 가정에서 겪는 다양한 고통과 고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 평안함을 가장한 무심함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유지가 사라진다. 별것 아닌 이유로-유지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이유겠지만-외출한 유지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평안함을 가장했던 가정은 분열을 일으킨다. 자그마한 지진이 아니라 강진이 발생한 것이다. 뿌리부터 흔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돈만 벌어다 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가장이 하는 일이 가족은 물론이고 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지 이 이야기를 읽고서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이때 불현듯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이란 시가 문득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바쁜 사람들도/굳센 사람들도/바람과 같던 사람들도/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난로에 불을 피우고/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줄에 앚은 참새의 마음으로/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의사로 살아가는 사람도, 교수로 살아가는 사람도, 환경 미화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사기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장기밀매자로 살아가는 사람도 결국은 누군가의 아버지이다. 사회와 동떨어질 수 없는 가정의 가장은 결국 세상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지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니던 그 사람도 결국 아버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가족들 역시 그의 생활에는 너무나 무관심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아버지라는 이름에, 어머니라는 이름에, 자식이라는 이름에 묻힌 사람도 결국 한 개인임을 알려준다. 그것도 너무나 연약한 개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유지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까발려야 했던 가족은 유지의 귀환으로 하나가 된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그들의 상황은 소설의 초반과 180도로 달라져 있다. 중국에 갇혀있는 가장과 그를 면회해야 하는 아내, 그리고 남아서 연약한 유지를 돌봐야만 하는 은성과 혜성. 그들 모두 처음과는 달리 너무나 연약하여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로만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 혼자 설 수 없기에 서로를 보듬어 주고, 안아주고, 일으켜 주는 그들의 모습은 훨씬 가족다워 보인다. 솔직히 행복하게까지 보인다.
 

언뜻, 부유하게 사는 것보다는 서로의 사랑만 있다면 경제적인 것과 무관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상을 전파하며 계층의 계급화를 선전하는 게 아닌가 싶은 오바(?)스러운 생각이 들기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뒷부분이 궁금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을 만 했다. 부디 나는 무엇인가를 잃기 전에 가족의 고마움을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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