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랜드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참기가 힘이 든다. 곶감 빼먹듯이 야금야금 먹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했음에도 스르르 손이 가는 책. 온다 리쿠의 책들이다. 손에 잡으면 도통 놓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연거푸 내리 읽어버려야 할 책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전작의 놀라운 글솜씨에 대한 기대 때문에 책장을 들추며 느끼는 두근거림이란... 잠도 들지 못한 밤에 자려고 애를 쓰다가 불면증을 원망하며 집어든 책. '네버랜드'  다음에는 ' 빛의 제국'부터 먼저 읽으리라 작정했었는데 어둠 탓이었는지, 아니면 아직 인연이 아니었는지 '네버랜드'를 읽게 되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밤을 새게 된 것이다.

'네버랜드'.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제목을 지닌 이 책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밤의 피크닉'과 마찬가지로 학교라는 장소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학교'라...

우리에게 학교란 어떤 곳일까? 뉴스에서는 늘 학교를 치열한 공부를 해야하는 전투장으로, 교사의 폭력이 난무하는 곳으로, 탈선을 일삼는 아이들이 들끓는 곳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학교가 그런 일들만 있는 곳은 아니다.  무시무시한 일보다 소소한 즐거움도 무시못할 정도로 많다. 늦은 밤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살벌한 곳이지만 간간히 매점을 들러 수다를 떠는 곳이기도 하고, 잘생긴 남선생님에 대한 연모의 정을 키우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슬픈 현실 속에 즐거운 일도 분명 있기에 우리에게 '학교'라는 단어는 무수한 이미지를 품게끔 한다.

이러한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누구나 고교 시절을 좋을 때였다고 말한다.  늘 변화무쌍하고 치열하다는 변함없는 제도를 간직하고 있는 학교 생활인데 우린 그 속에서 참으로 많은 추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콧물 줄줄 흘리던(요즘은 아가들이 너무 깔끔하다시피 해서 그럴 일이 없겠지만 우리 때만 해도 콧물 닦는 손수건 한 장씩 가슴에 매달고 다녔더랬다,) 초딩 시절은 논외이고, 약간은 유치하다고 여겨지던 중학생(중딩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다)을 제친 고등학교 시절. 이제 사회로 가기 위한 막바지 관문이라서인지 어른이 된 몸 속에 아이도 어른도 아닌 존재를 품고 있던 시절. 그렇기에 혼란도 배가 되고, 스릴도 배가 되었던 것일 게다. 10대 부터 60대(?)까지, 학생을 비롯한 교사들까지 다양한 성향과 연령이 가득한 곳. 그래서 그곳에서는 어이없는 일도 신기한 일도 많았다. 어느 조직을 보더라도 학교라는 조직처럼 역동적인 조직이 있을까 싶다. 입시라는 엄청난 제도에 억눌려 있음에도 십대들의 통통 튀는 매력과 역동적인 모습은 감출 수가 없는 곳. 그렇기에 그렇게 엄청난 숙제와 시험에 시달렸음에도 우린 모의고사 성적을 기억하기보다 그곳에 담긴 추억을 기억한다. 가끔 동창을 만나 그곳 이야기를 되씹다 보면 웃음부터 나오는 이유도 추억 때문이다. 사회라는 조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웃음이 있는 곳, 그곳이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너 다시 고교 시절로 가라면 갈래?"라고 묻는다면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에 그곳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듯도 싶고, 돌아가기 싫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학교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도 말했다시피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배경이긴 하지만 저런 곳이 학교의 진정한 모습이라 말해버리고 싶은 곳, 바로 네버랜드에 등장하는 남학생 기숙사 '쇼라이칸'이다. 그곳에서 네 명의 친구들이 방학을 보내게 된다.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늘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미쓰히로, 가장 평범하게 묘사된 이 이야기의 서술자 요시쿠니', 천역덕스러우면서도 분위기 메이커인 '간지', 엉뚱한 천재소년 '오사무'. 이들 네 명이 적당한 균형을 이루면서 기숙사 생활을 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헤집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가 목적을 가지고 상대를 괴롭히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라 드러난 생채기는 어느 새 아물어간다. 아마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헤집어 주지 않았다면 그 상처는 곪아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상처 헤집기는 일종의 신성한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통과의례라고나 할까? 

늘 그렇듯이 각자의 비밀을 간직한 채, 자신들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다 어떤 계기를 통해 스스로의 짐을 나눠 담는 그들. 사랑은 둘이 속삭일 수 있어도 우정을 나누기에는 둘보다 셋이, 셋보다 넷이 좋은 모양이다.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주는 능란한 인물이 없는 한 셋의 우정이 유지되기란 좀처럼 힘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속의 '넷'이란 숫자는 등장 인물들 사이에 묘한 균형을 이뤄주고 있다. 마치 '흑과 다의 환상'에 등장한 '리에코, 마키오, 아키히코, 세쓰코'처럼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각자가 진 짐의 무게가 엄청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내하고 묵묵히 짊어지고 나간다. 도피하거나 벗어내려는 듯 보이는 것이 아니라 대면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철이 안 든 나의 입장에서는 그런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늘 나이에 맞게 행동하리라 다짐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행동하라고 말하면서도 진정 그들의 입장이 되어본 적은 없었던 나에게 반성을 하게 한 책이다. 작품속에서 서술자인 요시쿠니가 말한다.

"불공평하다. 간지가 화내는 건 그 점인 것이다. 그들은 일견 어른의 논리로 간지를 대등하게 대하는 척하면서, 실은 부모의 논리를 간지의 목에 들이대고 그에게 자식으로서의 논리로 어른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간지는 처음부터 심한 열세에 놓여 있다. 그는 그 점을 화내는 것이다."

 나도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랬던 것 같다. 일견 '너의 의견을 인정하마.' 말하면서도 '너는 어리니까, 너는 속물이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내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상대방에겐 그들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다. 누군가 말했다. 꾀병도 병이라고. 이제부터라도 누군가 나에게 꾀병으로 다가온다면 나 역시 따뜻한 손을 내밀어줘야겠다.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대등하게 상대를 대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이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강해져야겠지.

'온다 리쿠'는 어쩜 이리도 섬세하게 인물들의 특징을 잡아내고 배려하고 있는 것인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다. 왠지 '네버랜드'의 아이들이 성인이 된다면 '흑과 다의 환상'의 주인공들처럼 될 것만 같다. 늘 이 작가에게선 많은것을 배우고 있는 나는 또 다른 책으로 시선을 돌리련다. 나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이 작품 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리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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