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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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의 인연이란 도대체 어떻게 맺어지는 것인지, 어떤 책에 손을 뻗치게 되는 순간은 참으로 순간적이고 오묘한 것이, 한 사람을 만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과장하자면 사랑에 빠져버리는 순간과도 다르지 않다. 언제 사 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책 <나무 위의 남작>.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단어로든 문장으로든 적어두곤 하는데 오늘은 우연히 2014년도에 적어 두었던 수첩을 뒤적이다 '정혜윤'의 <여행, 혹은 여행처럼>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여기저기에서 베껴 둔 글들을 읽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과 그에 대한 나의 단상들의 나열. 삶을 보는 방식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에 대한 그녀의 글에 대한 나의 생각 가운데

 

p149 <나무 위의 남작> 칼비노

 

라고 적어 둔 부분이 눈에 꽂혔다. 도대체 왜 내용도 없이 이렇게만 적어놨을까. 분명 2014년 그녀의 책을 통해 이 책을 소개받았고 당장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제목만 떡 하니 적어뒀으리라. 그리고 당장 읽겠지 생각했겠지. 늘 그렇듯이.(이렇게 써 둔 책 제목만 몇 개고, 그래서 장바구니에 담아 둔 책만 또 얼마던가...) 그런데 책을 산 기억만 선연하고 읽은 기억이 없더라는. 그래서 어젯밤 책꽂이를 뒤지다 이 책을 발견했다. 새 책임에도 불구하고 새 책다운 면모가 서서히 사라지려고 하는 이 책을. 하얗던 종이의 테두리부터 누르스름하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손에 들고 있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내려놓고 나도 모르게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고, 하루 온종일 이 책에 매달려 있게 된 것이다. 좀처럼 컴퓨터 자판에 앉아 서평이란 걸 쓰지 않던 요즘에 이렇게 나를 주절거리게 만든 책이니 더 말할 것이 무엇이랴. 분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도 무지 매력적이었는데도 다른 책으로 손을 뻗었다는 사실은 나의 책에 대한 바람기를 다분히 설명하는 것이려나? 아니다. 분명 지금이 이 책을 만날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왠지 조강지처를 버리고 바람을 피운 사람이 뭔가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변명하기 위해 하는 말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우주만화>를 통해 그의 필력을 익히 알고 있긴 했지만, 이번 책을 접하면서 또 한 번 그의 매력에 홈빡 빠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이 책이 <우리의 선조들>이라는 3부작 중 2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부와 3부와는 언제 또 사랑에 빠지게 될른지...

 

여튼 아버지와의 불화를 빌미로 나무 위에 올라가서 평생 땅으로 내려 오지 않았으며 하늘로 사라진 주인공 '코지모'는 기인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사랑스러운 철학자이자 치열한 혁명가이며 모든 땅 위의 존재를 사랑한 지식인이자 한 여자를 열렬히 사랑한 사랑꾼으로의 면모를 모두 보여준다.

 

처음 나무 위로 올라간 '코지모'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p105 "여행을 하다 보면 얼마 가지 않은 것 같은데 되돌아 올 수 없는 경우가 있지."

관성의 법칙처럼 무슨 일이든 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순간이 있음을 우리 모두 경험했기에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하는 이 조언을 들으면서 나는 주인공이 나무 위로 도피한 것이 세상에서 도망치기 위한 것인 줄 착각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세상을 등진 것은 오히려 아버지이고, 세상을 온몸으로 사랑하며 세상에 부딪치기로 결심한 것은 '코지모'였음을 알게 되었다. 표피적으로 드러난 말로만 알 수 없는 우리의 세상처럼 말이다. 

 

땅 위에서 다른 곳으로 여행조차 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달리 '코지모'는 나무 위로만 다니면서도 아버지보다 더 먼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자신처럼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도 만나고 그들에게 자신이 익힌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하면서 그는 세상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물론 그들은 세상에서 추방되어 나무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지만 나무 위에서 살아간다는 한 가지 공통점만으로 '코지모'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공통점을 발견한 사람들의 무방비한 호감이라니...

 

그리고 어릴 적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비올라'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p225 사랑의 미덕 중 가장 새로운 것은 아주 단순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형은 그때 자신이 평생 그렇게 단순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p273 그들은 서로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를 알게 되었고 사실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와, 언제나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사람을 복잡하게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랑이 사람을 아주 단순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랑이란 결국 상대를 알고 싶어 시작했다가 자신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외에도 무수한 문장에서 이탈로 칼비노는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나에게 툭툭 던지곤 했는데 그 때문에 나는 아직도 머리가 복잡하다. 그가 던진 질문과 대답만으로도 한 동안 심심하지 않을 것 같긴 하다. 너무 감동스러운 글이라 아주 정성들여 서평을 쓰고 싶었는데 머리가, 시간이 따라주질 않는다. 다음에 보완하고 오늘은 이만 요기까지의 감동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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