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전에 본 책에서 어느 필자가 말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고 평생 동안 자연만 마주하고 살아간다고. 그들에게는 퍼덕거리며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기지 않는다고.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가 없기에 그들에게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과 같은 게 있을 리도 없다고.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고. 그리고 그들은 지구에게도 행복을 준다고. 나무를 잘라 종이를 만들어 책을 만들어 읽는 것은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는 일이므로 자연과,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이야 말로 완벽한 순환의 톱니바퀴를 이룬다고 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고 한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단다. 그럴 듯 하다. 아니 이 구절을 읽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데 그의 논리를 듣고서 나는 크게 아주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무위자연'이라 외친 노자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자연을 거스르고 인위적인 학문을 수양하여 그의 경지에 다다라야 하는 것처럼, 그의 그런 논리조차 그의 책을 읽는 이만이 수긍도 부정도 할 수 있겠지만 그의 말은 아주 그럴 듯 하다. 물론 논리적으로 그의 주장을 파고들 수도 있을 것이다. 논리적 비약이라든지, 성급한 일반화라든지, 잘못된 명제의 사용이라든지의 이유를 들어서 말이다. 하지만 난 굳이 그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싶지가 않다. 왜냐 하면 내가 병이 든 것을 인정하고서라도 많은 책을 접하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온다 리쿠'의 작품을 접하면서는 내가 병이 든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질문을 너무 에둘러 왔나 보다. 하여튼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어딘가에 몰입하기 위해서이다.  현실을 잊고 어딘가에 잘 짜여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사람들은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영화 같다'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현실은 영화보다 더 냉혹하고 더 참혹하며, 더 리얼하다.(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어느 부분에서 내가 원한다고 해피엔딩이란 결말을 정할 수도 없을 뿐더러 독자의 반응에 따라 줄거리가 바뀔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참혹한 현실을 잊고자 난 이야기에 빠져든다. 간혹 어설픈 이야기를 읽고 허탈해 하기도 하고, 이야기의 선택에서 실패하기도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그 나름의 즐거움과 가르침과 허무함을 나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짜여진 이야기 속에서 나는 더이상 가슴을 졸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온다 리쿠'의 이야기 속에서 난 나도 모르게 마음을 졸이고 있다. 그를 처음 접한 것은 '밤의 피크닉'이라는 소설이었다. 비밀이 담긴 두 고등학생들의 이야기.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학교에서 행해지는 보행제라는 행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잔잔하면서도 치밀한 이야기라는 느낌. 그를 처음 만난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뿐 그의 다른 작품에 관심이 가진 않았다. 보통 같은 작가의 이야기엔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가 녹아 있기에 그의 또 다른 작품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런데. 늘 사건은 그런데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그런데 어느날 나타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란 매혹적인 앞표지를 가진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자보다 더 나를 끌어당긴 앞표지였다. 뭉크의 '절규'처럼 어두컴컴한 듯 하면서도 독자를 유혹하는 듯한 앞표지.  말 없는 수다가 가득할 것만 같았다. 그 책을 집어드는 순간 나는 정말 그 책 속으로 화악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결국 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 책은 그야말로 네버엔딩 스토리.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보다 더한 천 두번째 이야기 쯤 될 것 같다. 그 책을 읽고 매력을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 책을 읽자마자 그의 다른 번역 작품을 기다리던 나에게 어느 순간 그의 책이 쏟아져 들어왔으니까. 그 두 번째 책이 바로 내가 리뷰를 쓰고 있는 '흑과 다의 환상'이다. 네 명의 동창생들이 저마다의 과거를 가지고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떠나는 여행. 현실에서는 좀처럼 꾸리기 힘든 여행 동반자들이긴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고 너무나 흥미진진해 보였다. 그들이 풀어놓을 듯 말 듯한 이야기를 들으며 꼭 그 여행을 함께 하는 것인 양 난 들떠 있었다. 그들의 꿈 얘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그들의 꿈을 꾸었고, 그들의 과거 때문에 나 역시 한 동안 어수선했다.

 '흑과 다의 환상'은 정말 실수로 펼쳐놓다가 완성된 그림이 아닌 완벽하게 짜여진 한 편의 명작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사람을 더 가슴 졸이게 만드는 것일 게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글을 완벽하게 짜 맞추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의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능력이다. 뻔한 거짓말 같지 않아 보이는 그의 글솜씨는 과히 천의무봉이라 할 만하다.

 두 권으로 된 '흑과 다의 환상'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 역시 무엇인가 이야기를 간직한 숲 속을 여행한 기분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설렘이 있었다면 여행을 끝난 후는 아련함과 애틋함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설렘과 긴장만이 가득하다면 좋겠지만 언젠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은 그리 기쁜 일만은 아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의 마지막 번역작품을 읽기 전까지는 이러한 설렘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덕분에 나도 나의 과거를 미스테리인 양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조각난 퍼즐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꼭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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