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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평점 :
대학교 다닐 때 ‘조경란’의 <식빵 굽는 시간>을 읽고 마음에 들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책도 좋아했었는데... 20대에는 왠지 염세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하기 마련인 걸까. 20대 대 내가 느낀 그 느낌이 어땠나 싶은 생각에 홀연 그 순간이 그리워져 일전에 작은 판본으로 다른 책에 끼여서 배송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다시 읽어 봤더니 20대 때 홀딱 반했던 그 느낌은 아니었다. 이 배신감은 누굴 대상으로 느껴야 하는 것인지. 그때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다른 느낌이 들었다. 책은 같은 책인데 결국 내가 변한 것일 테지. <식빵 굽는 시간>도 식빵 속에 수면제를 가득 넣고 자살을 기도하던 책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 만큼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조차 안 나는데 식빵 속에 수면제를 넣던 장면만 어른어른 거린다. 다시 읽어 보면 그것도 아닐 테지만. 예전 집에서 찾아온 짐 중에 이 책이 있긴 했는데 어디선가 책벌레가 스믈스믈 기어나올 듯 낡고 냄새나 보여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여튼 작가도 늙었고 이제 나도 늙어버렸으니 말이다.
나는 여전히 장편이 좋은데 작가들은 자꾸 단편을 낸다. 그래도 책을 읽어 온 세월이 얼만데, 작가가 아무리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때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갈수록, 여전히,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그래서 예전엔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던 평론가의 해설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는데 정말 옳다구나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평론가의 말이 나를 더욱 미로 속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허다하여 근 20년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며 지냈던가 나의 독서능력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문제집의 정답지를 들춰 보는 마음으로, 내가 읽어낸 내용이 맞는지,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한 것은 아닌지 궁금한 마음에 요즘 들어 평론가의 글을 열심히,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제대로 읽었다면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엉뚱하게 읽었으면 다시 한 번 작가의 의도를 찾고 싶은 마음에 말이다.-하긴 어떤 작가는 오독이 가장 심오한 독서법이라 하긴 했다. 하나의 글이 각자의 독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가는 것. 결국 한 편으로 수십, 수백, 수천 편의 글을 쓴 느낌일 테지.- 그런데 간혹 평론가의 해석이 나를 더 혼란에 빠뜨리곤 하더란 말이다. 최근에 읽은 ‘최정화’의 <모든 것을 제자리에>란 단편이 그러하였고, 그 소설의 평론가의 해설이 그러하였다. 작가들은 갈수록 심오해지고 나는 갈수록 단순해지는 탓일 테지. 그런 반면 이번 조경란 책의 평론가가 한 말은 나름 책을 이해하기 쉽게 해 주어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읽으면서 봉천동에 가로수길을 본 딴 봉로수길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대전에도 봉로수길이 있다는 것, 요즘 가로수를 본 딴 많은 작고 예쁜 상점들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사실마저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여튼 이 책에서는 특별하게 마음에 새기고픈 문장에 포스트잇을 붙인 적은 거의 없는데 평론가의 글을 읽으며 다시 되새겨지는 장면은 간간이 있었다.(이 책 154쪽에 “나는 이렇게 나의 이야기를 처음 쓴다. 사람은 타인의 삶을 빌려서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 걸까?”라는 부분이 그나마 소설에서 내가 멈추었던 부분이었다. 나 역시 무엇인가를 쓰고 싶은데 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하던 차에 발견한 부분이어서 그럴지도.) 그리고 소설 중간 중간에 의미 없이 진하게 표시된 글자가 있었는데 평론가 덕분에 그것이 소설 말미에 하나의 시로 완성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작가가 숨겨놓은 보물들을 평론가가 찾아주지 않았다면 난 의미도 모른 채 외면하고 말았을 거라 생각하면 아찔하고, 무수한 책 속에 감추어진 보물을 내가 얼마나 많이 놓쳤을까 싶으니 속상하기 그지없기도 하다. 일단 알게 된 것은 알게 되어 다행이고, 모르고 넘어간 것은 또 모르고 넘어갔으니 그걸로 그만이어야 할 듯하다. 이러한 것을 보자면 자신의 말을 온전히, 아니 200% 이해하는 평론가의 이해력이 작가는 얼마나 고마울까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든다.
268쪽에서 평론가가 이야기한다. “떠난 적 없지만 돌아올 수 있고 기억에 없지만 잊고 싶지 않다는 말.” 이 문장을 읽고 있자니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다 저러한 듯 느껴졌다. 떠난 적 없으면서 떠날 것을 걱정하고, 다가오지 않은 일을 다가올까 걱정하고, 기억에 없는데 기억하는 듯 괴로워 했던 나날들. 결국 난 모든 걱정을 상상에 기반을 두었구나란 깨달음. 상상 속에서 힘들고 기쁘고 행복하고 괴로워 했구나란 생각들까지.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라는 단편 소설 속 주인공은 베이비 박스를 바라보며 양부에게 길러진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버려짐으로 자기를 규정했는데, 물에 잠긴 집의 지붕 위에서 헬기에 구조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을 버려짐이 아닌 양부에게 구해짐으로 규정짓게 된다. 찰나의 순간. 너무나 상식적인 일들. 버려짐과 구해짐이 한 순간에 일어난 일임에도 우리는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선택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한 순간에 내 머리를 강타했다. 20년의 시간 동안 작가도 나이들고 나 역시 나이들어 만나는 이 기분이란.
<괜찮아지는 중입니다>라는 책에서 작가는 ‘행복은 이제 시작이야’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했다. 행복은 이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삶은 순간순간이 만들어지는 연속체이지 결코 이어짐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며 버려짐과 구해짐이 있다면 이왕이면 난 구해짐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조경란 책의 제목이 원래의 기획대로 ‘모르는 사람들끼리’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하나마나한 생각도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