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만들기 어떻게 할 것인가 - 민속연구 제18집
안동대학교 한국학연구원 민속학 엮음 / 민속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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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공동체(Community)로서의 사회기능은 유효한가. 단호하게 이야기하건데 그렇지 않다. 기껏 자신만의 자본획득을 위한 경제행위가 서로의 살을 깎아 먹을 뿐이고, 국가 구성원인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법과 제도는 소수, 아주 조금에 대한 다량의 이익을 향하고 있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 한없는 희생만 강요당하는 것이 이 땅의 민중이고 보면 이에 대한 해결을 더 이상 국가나 정치에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민중이 스스로의 연대로 자신의 삶과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지자체를 중심으로 농촌에서 벌이는 주민 자치운동인 ‘마을 만들기’는 주목할 만하다. 마을 만들기. 일본의 1930년 대공황기를 맞으며 시작된 농촌의 자력갱생운동에 기인한다. 이 용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만들기와 일으키기와 마을이 결합하여 사용되었다. 오늘날은 전국 각지에서 쓰일 만큼 보편화된 용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각 지자체의 활력사업에 사용되거나 농촌사업에 사용된 것이 불과 5년 정도이다.


주민 스스로가 마을이 가진 환경적, 생태적, 자연적, 인문적 가치를 깨닫고 이를 개발하여 활용하는 것이 그 운동의 주요 목표인데, 지금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 농촌에서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에 대한 의문을 풀어 가는데 좋은 실마리를 던져주는 글이 있다. 안동대 민속학자인 임재해 교수의 ‘다문화주의로 보는 농촌의 혼입여성 문제와 마을 만들기 구상’ 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도시 농촌의 시스템이 도무지 터무니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가장 큰 부분은 대중의 농촌이라는 가치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다. 그저 비전 없는 곳, 그냥 향수의 마음 한구석에나 담아 두어야 할 곳, 아이들 체험학습때나 방문하는 곳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떠나고, 땅값오르기나 기대하며, 개발의 손길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곳일 뿐이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고, 시골에는 사람들이 너무 적어서 탈인 지경에 이르렀다. 공룡에 견줄 만한 거대한 도시사회는 끊임없이 인구가 집중되고 있는데, 낡은 경로당처럼 노인들만 사록 있는 쭉정이 시골마을에는 인력충원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아이들이 잉태되지 않는 불임의 사회가 지금의 시골마을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울이 더 잘 살아야 하고 인구가 더 집중되어야 하며 그 규모도 더욱 비대해 져야 수도답고 중앙답게 된다고 여긴다.  
   

 


버려진 곳, 도무지 ‘돈’되는 것이 없는 곳. 죽지 못해서 농사짓고 있는 노인들. 용돈이라도 벌려고 농사짓고 자식들에게 꼬박꼬박 택배로 곡물 등의 수확을 보내고 있는 역할로 존재하는 늙은 농민들. 그들은 자조 섞인 말로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대도시로 떠난 자식들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마음의 한쪽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시골어른 들은 아예 자신들을 가족들에게서 버려진 ‘고려장’ 신세로 여기고 있다.  
   

 


다만 환경이 바뀌었을 뿐, 석면 가득한 구식 ‘쓰레트’ 지붕에 시멘트 블록으로 구옥을 리모델링한 허름한 집에서 자신의 몸을 뉘이는 오늘의 ‘농업’이 지향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그리고 시들고 죽어가는 농촌을 살려낼 방법은 무엇인가. 얼마 남지 않은 소수의 젊은이 (40~50대가 청년으로 분류되는 곳이 농촌이다)들만 가지고 농촌의 미래를 이야기 하고, 마을을 가꾸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마을조사를 하여 마을문화의 이모저모를 기록하고 디지털 자료로 담아두는 일이다. 둘은 마을을 지속 가능한 우리시대의 새로운 마을로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어떻게 해야 한 다는 말인가.

이제 생산능력이 없는 현재의 시골은 인구 생산이 가능한 인력들이 충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공동의 이익과 선을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늙고 쭈그러든’ 촌(村)에 활력이 되는 인구의 유입이 있어야 한다. 일시적인 관람, 관광객들이 아닌 자신의 삶을 가꾸고 터전으로서 마을을 선택한 사람들과 그들을 통해서 생산되는 유아들이 유일한 희망이다.


지금 유입되는 인구. 귀농귀촌인들이 하나,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는 자원으로서 외국에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자 ‘나이든 신랑’을 택해서 생전 처음 밟아보는 한국의 농촌에서 기꺼이 거주하는 이주여성들이다.


적어도 귀농인을 위한 지원정책은 존재하고 전략화 하는데 비해 이주여성들은 자원으로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이 현 농촌의 실정이다. 그들은 각 농가의 ‘부속’으로 그 가정 내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물론 시골에 대한 복지정책의 하나로 주민자치센터등에 한글반을 운영한다던지 하는 배려가 있지만 정작 그들의 주체적 삶을 위한 지원은 볼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는 도시에서 거주한 이주 남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는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이나 회사는 물론, 국가가 신경 써야 할 경지에 이르렀다. 연일 보도되는 이주여성의 사기, 협박, 폭력에 얼룩진 뉴스와 기획물들을 보면 감히 입을 다물지 못하는 평범한 시민들이라도 만약, 자신이 그 가정에 속하게 될 경우엔 백팔십도 달라지는 그녀에 대한 시선, 관점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그것이 바로 백인에게 지나치게 배려하고 흑인 등의 유색인종을 괄시하는 우리들의 의식화된 선입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돈’으로 굽히고 들어오는 저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기보다 이용하려는 못된 자만심에 근원이 있지는 않을까.



   
  마을에 젊은 외국인 여성들이 혼입되는 상황을 바람직한 가능성으로 유리하게 받아들이고, 그러한 가능성을 더 합리적으로 더 폭 넓게 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문화주의적 마을 만들기의 기본 발상이다. 그러므로 다문화주의 마을 만들기는 농촌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구상이라기보다, 오히려 농촌에 끊임없이 수혈되고 있는 제3세계의 젊은 여성들의 모험적 열정과 진취적 자질을 더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그 문화적 역량을 활짝 꽃피우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둔 구상이라 하겠다.  
   

 



아이 없는 촌에서 유일한 희망. 40이 넘어서야 외국에 결혼여행을 통해서 신부를 수입하는 ‘젊은’농민. 필리핀, 베트남, 중국, 일본 여성들로 구성된 다문화사회. 이것이 현재의 농촌이며 이 다문화 세대는 점점 확장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매주 시사프로나 뉴스 한 꼭지에 소개되는 그들이 멀쩡하게 아이를 빼앗긴 채 자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당하고, 남편이 사고로 죽게 되면 꼭 그 식구들에 의해 남편의 재산이 빼앗겨 분배되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 사회의 단면이 되었다. 모든 다문화가정이 문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4일 이내에 선택되는 결혼이라는 위험천만한 근원적 요소를 포함해 혼혈의 자녀들에 대한 ‘토종’의 괄시와 무시의 태도나 대화와 소통을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마치 노비를 부리는 듯 한 나이든 어른들이 가진 사대주의 또한 문제의 근원이다.


   
  문화에 대한 세 가지 편견을 버려야 한다. 하나는 자문화중심주의이고, 둘은 문화의 우열관념이며, 셋은 문화의 완전성에 관한 편견이다. 앞의 두 가지 문제는 문화상대주의로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문화의 완전성 문제는 생태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상호 의존하여 생존한다. 따라서 생물종 다양성이 풍부할수록 생태계는 건강하다. 문화종도 생물종과 마찬가지이다. 그 자체로 완전한 문화종은 없다. 그러므로 문화종 다양성이 풍부할수록 문화생태계도 건강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다수의 이주여성 가족들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시부모와 같이 살면서도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며 적응하는 경우가 많다. 촌을 떠난 젊은 여성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도시에서 시골로 오는 경우 또한 전무하다. 이런 상황에 농촌사회가 가진 가장 큰 인구수와 초고령화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따로 있지 않다.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려고 낮선땅에 기꺼이 ‘나이든 총각’과 결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들은 대한민국의 미래이자 희망인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고, 더 이상 소모만 일으키는 ‘단일민족’의 신화를 우리 안에서 지워야 한다. 이주 노동자가 우리 제조업의 유일한 희망이고, 인구생산에 기여하고 젊음의 활력으로 촌에 활기를 주는 이주여성들이 농촌의 하나뿐인 ‘기대‘인 지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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