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링크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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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으로 처음 읽은 책이다. 그 뒤로 그의 작품을 야금야금 찾아 읽게 되었으니,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나를 로베르토 볼라뇨로 이어준 고마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제는 꽤 지난 일이긴한데, 로베르토 볼라뇨가 국내에 처음 출간될 즈음 열린책들에서는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라는 666원짜리 버즈북도 발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떤 작가이기에 이토록 크게 알리는 것일까 궁금해서 살짝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내 흥미는 사그라졌다. 볼라뇨는 칠레 출신으로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라틴아메리카에 등장한 최고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바로 그 수식어 때문에 나는 흥미가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나는 라틴아메리카나 스페인어권 문학에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든지 ‘환상문학’ 등등의 수식어가 이쪽 문학에 많이 붙던데 내가 그런 문학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칠레’ 출신 ‘마르케스’ ‘보르헤스’의 뒤를 잇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의 작품은 몇 년 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났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주변에서 누군가가 추천하기에 그럼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읽어보기 시작했다. 읽다 보니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는데……. 어라? 재미있네? 작품이 워낙 잘 읽히기도 해서 금세 읽었다. 책장을 덮었을 즈음에는 볼라뇨의 다른 작품도 웬만하면 다 찾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로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로베르토 볼라뇨 전집을 다 마련하고 싶은 욕심까지 들었달까.

이 작품은 사실 환상문학, 마술적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처음 <아이스링크>를 받아 들었을 때는 추리소설인가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추리소설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추리 형식을 빌려왔지만 그 얼개 안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소외받은, 평범한 이들의 삶, 주변인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볼라뇨 문학의 특징은 독자 흥미를 끌고자 ‘추리’ 비슷한 구조를 빌려와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그런 형식을 통해 전하려는 주제는 주로 주목받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이들의 삶이다.

이야기는 한 저택의 아이스링크와 관련 있다. 무대는 스페인 Z시로 스페인 최고의 피겨스케이팅 선수인 ‘누리아’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Z시 공무원 ‘엔리크’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엔리크는 누리아를 보고 반해 그녀만을 위해 아이스링크를 짓는다. 물론 공무원 신분을 남용해 아무도 모르는 대저택에 문제의 아이스링크를 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와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 아이스링크는 엔리크와 누리아만의 공간이 될 수는 없다. 그 비밀을 아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엔리크와 모란, 가스파르 세 남자의 시점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며 ‘아이스링크’를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화자가 되기에 한 사건을 보고 서술하는 내용은 제각각이고 관점도 다르다. 이런 방식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런 장치를 통해 주변부의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면서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게 보여준다.

<아이스링크>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데뷔작이다. 아주 놀랄 만큼 대단한 명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아이스링크>이후 작품들을 궁금하게 하는 힘은 분명 지녔다. 굉장한 대작이라고 일컫는 <2666>도 있던데, 이 작품까지도 언젠가는 읽어볼 생각이다.


내가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 해도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독서의 폭을 넓히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술적 리얼리즘' '환상문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개인적인 거부감 때문에 이 작품을 계속 읽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원히 로베르토 볼라뇨를 모르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이 책을 권한 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볼라뇨의 다른 작품을 하나 더 장바구니에 담아본다.


암튼, 우연한 기회에 독서의 지평선을 넓히는 일은 살아가면서 보람을 느끼는 드문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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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7-0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볼라뇨 작품 세계에 빠져보려고 두권 구입했는데 자꾸 미뤄지네요.
리뷰 읽다보니 얼른 읽어야겠어요.^^

잠자냥 2017-07-06 11:07   좋아요 0 | URL
어떤 작품을 사셨는지 궁금하네요. ^^

yamoo 2017-07-0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폴스타프 님 서재에서 자주 뵙게되더라구요~ 인사를 해야될거 같아서뤼^^;; 근데 볼라뇨 소설이 재밌단 말씀이지요.. 하~ 고것참 고민되네요. 바르가스 요사 작품들을 모으는 중인데 벌러뇨가 재밌는 작가라면..출혈을 감수하고라도 사재기를 해야 할 듯해서요. 이 작가 작품도 많더라구요..ㅜㅜ

잠자냥 2017-07-06 11:17   좋아요 0 | URL
하하하. 안녕하세요. 네 제가 폴스타프 님 서재를 애정해서 가장 많은 하트와 댓글을 남기는 서재인 것 같습니다. ㅋㅋㅋ 암튼 반갑고요. 네 이 작가 작품수도 많죠... 심지어 열린책들에서 전집도 뽀대나게 나와있습니다. ^^;; 그거 사고 싶지만 참고 있는 중이에요... ㅠㅠ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1386543
 

어릴 적 나는 사회과부도와 지리부도 보는 걸 좋아했다. 지구본을 들여다보며 어떤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아했다. 사회과부도를 보며 특히 좋아했던 일은 각 나라의 국기와 수도를 외우는 거였다. 지도 보는 게 정말 재미있었다. 혼자 퀴즈를 내고 혼자 푸는 놀이를 즐겨했다. 예를 들면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 딩동댕’ 이런 식. 이런 취향 때문이었는지 세계사나 세계지리 같은 과목을 중 고등학생 때 꽤 좋아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수능에 세계사나 세계지리 문제는 고작 몇 문제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업 시간은 확 줄어들었다.

비단 대학입학 시험에 나오는 비중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에서 세계사나 세계지리 를 홀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국에게 있어 세계란 곧 미국, 아니면 일본, 더 확장한다면 중국이나 북한 정도인 듯하다. 텔레비전 뉴스를 봐도 그렇고 신문의 국제란을 봐도 그렇고, ‘세계’에 대한 대한민국의 관심은 참으로 미미하다. 오로지 국가나 민족뿐이다. 그렇게도 글로벌을 부르짖는데, 우리에게 세계란 고작 미국 아니면 일본이다. 대미, 대일 의존도가 높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과연 이런 현상이 옳을까?

전에 읽었던 르 몽드 관련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 신문의 제호는 르 몽드(Le Monde, 세계)이지 라 나시옹(La Nation, 국가 또는 민족)이 아닙니다.’ 라는. 한편으로는 신문이나 언론, 방송이 궁극적으로 나아갈 길은 국가나 민족 자기 안의 일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관계 전문시사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의 ‘르몽드 세계사’는 세계 = 미국, 일본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반면 세계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쉽게 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시리즈는 일단 무척 재미있고, 흥미롭다. 각 주제에 대한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심층적이다. 무엇보다 지도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도를 표현하는 아이디어도 반짝반짝 빛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설명한 것의 부록 느낌으로 지도가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 그 자체가 이미 독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다. 다루고 있는 이슈도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핵심적인 일을 총망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환경,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 기아와 부채에 시달리는 남반구 대륙들의 문제점, 물질적인 면에서는 풍요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붕괴되고 있는 서구 사회의 문제점, 경제적인 성장을 부쩍 이뤘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 아시아의 국가들, 그리고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들의 이야기까지.

특히 한국의 위치가 지금 어떤지 가늠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한국은 여전히 국제 사회에서 주요 분쟁 지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대인 지뢰 생산을 중단했는데도, 한반도에서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여전히 대인지뢰가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수도권에서는 물을 펑펑 쓰는데 알고 보면 한국은 전 지구적으로 물 스트레스 국가에 속한다는 사실도 또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여전히, 대미 의존도가 얼마나 높은지 깨달으면서 굴욕적인 감정이 들기도 했다. 거의 뭐 친미국가로 표기되어 있는 지도를 보니 뭐랄까... 정말 주권이 없는 국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소말리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소말리아 인근 해협에는 해적이 날뛰고 있어도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말리아 위쪽으로 독립을 했으나 아직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소말릴란드’가 존재한다는 것 알게 되었고(소말릴란드 뭔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나라 같다;). 캐나다는 원주민인 이누이트에게 땅을 많이 되돌려 주어 국제사회의 모범이 되고 있고,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원주민과 함께 하는 나라들이 속속 캐나다의 사례를 본 받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분쟁 지역의 원인을 보면, ‘인간의 탐욕(권력에 대한 욕심, 천연 자원에 대한 욕심, 땅에 대한 욕심)’ 때문인 경우가 허다한데 인간이 이렇게 욕심을 조금 줄이면 ‘모두가 평화로운’ 상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볼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책값이 좀 부담스러워서 도서관 같은 곳에서 빌려 읽을까 싶었는데, 두고두고 보면 좋을 것 같아 책을 샀다.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이렇게 개괄적으로 읽고 난 뒤 책꽂이에 꽂아두고 궁금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찾아보기에도 딱 좋은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1권에서 끝난 게 아니라 계속해서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난 그 책들도 하나씩 사들여놨다. 그리고 흥미롭게 읽은 뒤, 필요할 때마다 또 꺼내보곤 한다. 아무리 출판 불황이라고 해도, 좋은 책, 잘 만들어진 책은 결국 빛나기 마련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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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7-07-04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권을 다 모셔오던 날 무지 뿌듯했었죠. 물론 아직도 완독을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남경태님의 <종횡무진 서양사>부터 읽고 기초지식 쌓은 다음에 이 시리즈로 좀더 심화학습 해봐야지 싶습니다. ^^

잠자냥 2017-07-04 18:0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있는 것만 봐도 어쩐지 배가 부른 시리즈라고 할까요? ㅎㅎ
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럴 땐 막 안타깝더라고요. 이 책은 두고두고 봐도 좋은데 왜 팔았을까!! 이런 생각에서 말이에요. ㅎㅎ

보빠 2017-07-04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때 나랑 취미가 같네요...사회과부도 저도 엄청 좋아했는데....괜히 엄청 반갑네요

잠자냥 2017-07-05 09:50   좋아요 0 | URL
하하 그렇군요. 참 재미난 취미죠? ㅎㅎ 어린 시절 보던 사회과부도 버리지 말걸 그랬어요. ㅎㅎ
 
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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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동안 아껴가면서 읽었다. 당신이 하나의 예술로서 단편 미학에 탐닉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당신이 단편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문학을, 소설을 탐닉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900페이지라는 두께도 그렇지만 여기 실린 작품 하나하나가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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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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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나면 늘 후회하는 믹스 커피 같은 우엘벡의 작품. 뒤끝이 영~~ 텁텁하고 찝질하다. 2022년, 이슬람 정당 출신 대통령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적 프랑스. 근데 그게 거리에서 미니스커트가 사라지고 일부다처제가 만연하는 정도의 상상력에서 그치면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참 그지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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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것이 카프카 - 99가지 습득물
라이너 슈타흐 지음, 정항균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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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갇힌 K처럼, 이 책을 읽노라면 카프카라는 복잡한 한 인간의 내면을 미로를 헤매듯 거니는 느낌이 든다. 그는 외롭고 고독했지만 유머러스하고 다정다감했다.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은 카프카를 만나는 즐거움과 함께, 숨겨졌던 그의 글도 만날 수 있다. 죽기 직전 부모에게 쓴 편지는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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