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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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대한 또다른 우화. 폐지더미 속에서 찾아낸 온갖 책들. 그 안에서 주인공 `한탸`는 아무리 고독해도 `텍스트`가 있기에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텍스트 없는 세계, 이제 `백지`앞에 서야 할 그에겐 오직 `절망`뿐.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탸의 이 희망과 절망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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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하면서 책이 너무나도 짐스러워져서; 책 사는 일에 신중해지기로 했다. 웬만하면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가끔 정말 사고 싶어지는 책이 있다. 이 잡지에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장정일이 새 주간을 맡으면서 어느 언론사와 한 인터뷰 기사를 읽고는 이번 호는 꼭 챙겨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응원하는 마음에서 한 권 꼭 사보기로.


아래는 인터뷰 기사 중 발췌


‘말과활’ 쇄신을 준비하며 가장 고심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 지식인 잡지 대다수가 빠져있는 ‘성맹(性盲)’을 탈출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한국 계간지들은 여성 편집위원 몫이 지나치게 적거나 형식적이다. 비판적 지식계를 대표해 온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사회’는 남성지식인을 위한 ‘지큐(GQ)’ 혹은 ‘맥심(MAXIM)’과 다를 게 없다. 우리 잡지가 그 고민을 시작했으니 다른 잡지들도 바뀌지 않을까.”


기사 전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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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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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 10년 전에 읽었다면 나도 이 작품 속 샐과 딘처럼 미친 듯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을 듯하다. 그 사이 늙어버린 것인지, 하염없이 길 위에서 떠도는 그들을 보아도 그다지 큰 동요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이 무대책 젊은이들의 방랑기에 살짝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특히 딘처럼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오로지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런 사람을 친구로 두자면 무척 버거울 것 같다.

<길 위에서>는 케루악 자신의 경험담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두루마리 원고’로 유명하다. 종이를 갈아 끼우면서 원고 쓰는 게 거추장스러웠던 케루악은 타자지를 길게 이어 붙여 만들어 약 40미터 길이의 종이 위에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커피와 각성제에 의존하며 약 3주 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초기 원고는 여백도 단락 나눔도 없고 마침표나 쉼표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초기 두루마리 원고에서 수정과 수정을 거쳐 출간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수다, 지칠 줄 모르는 리듬감, 도저히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열정은 작품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때문에 좀 산만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딘과 샐은 함께 혹은 샐 홀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다. 동부에서 서부로, 서부에서 다시 동부로 때로는 멕시코로 목적지가 바뀌기도 한다. 가진 것도 없는 이들이 여행하는 방법은 히치하이크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또 달린다. 그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길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이 이 작품의 주된 이야기다. 달리고, 마시고,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하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여자를 사귀고 다시 달리고. 자동차, 히치하이크, 술, 마약, 섹스, 재즈 이런 단어들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그들은 즐겁다. 내일은 필요 없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샐과 딘은 ‘이 인간 세계에서 무명으로 사는 게 저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대체 저 세상이란 뭔가? 이 지상은 뭔가? 모두 관념이 아닌가.’(‘길 위에서’, 2권 108쪽) “정치가나 부자 같은 다른 사람들이 뭘 바라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거야.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거지.”(‘길 위에서’, 2권 116쪽)이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 어디에도 오래 안주하지 못하고 계속 길 위를 헤맨다. 샐보다 방랑벽이 더 심한 딘은 이곳저곳에 아내를 두고 아이까지 낳지만 그 평범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떠날 수밖에 없다. 길에 서지 않으면 그들의 자유는 감금당하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으로 가득한, 부패한 미국 사회에서 모범생처럼 살며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아무런 속박도 구속도 없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 계속 길 위에 서는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낭만적이고 달콤한 유혹이다. 때문에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당시 수많은 청춘을 길 위에 오르게 했고, 지금도 여전히 청춘의 바이블처럼 읽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오늘의 청춘은 샐과 딘처럼 돈 한 푼 없이 길 위에 서지는 못한다. 여행의 낭만과 자유를 찾지만 그 자유도 보통은 어떤 일정한 기간 내에만 허락된 것일 뿐이고, 그마저도 돈이 없으면 갖기 어려운 ‘여유’가 되어버렸다. 물질을 온몸으로 거부했던 샐과 딘의 ‘길’은 이미 사라져 버린, 전설 속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가 떠올랐다. 오토바이를 타고 끊임없이 달리는 그들. 이십대 초반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들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끝없이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긴 나는,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읽으며 더는 <이지 라이더>의 빌리와 와이어트 같은 딘과 샐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좀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다고나 할까. 늙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예전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자유에 대한 갈망 자체가 사라져 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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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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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려면 언제나 큰 결심을 해야 한다. 그 첫째 이유는 그의 작품은 보통 분량이 방대하다는 점, 둘째는 그럼에도 첫 번째 산을 넘어 엄청난 분량의 책을 집어 들면 수많은 등장인물의 복잡한 이름과 계속 씨름을 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힌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그런 등장인물들과 씨름하기도 바쁜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황한 문장과도 싸워야 한다는 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위에 나열한 세 가지 이유만으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내 취향은 아닌 작가다. 그럼에도 문학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의 작품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 또한 그렇다. 아주 오래 전 읽었던 <죄와 벌>이후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읽지 않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직은 <악령>은 도전할 마음은 생기지 않고(엄두가 나지 않고) 먼저 집어든 게 <미성년>이다. <미성년>은 제목이 매혹적이라 끌렸다. 그러고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많은 작품 중 우선 읽어보고 싶어지는 것들은 제목에 끌려서일 때가 많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분신>, <가난한 사람들> 등등 제목만 봐도 좀 끌리지 않나?(사실 분량이 가볍기도 하다..;) <미성년> 이후로 또 읽는다면 <상처받은 사람들>, <영원한 남편> 등을 생각 중이다. 

<미성년>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성장 소설’이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서전적 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도 하다. 주인공인 ‘아르까지 돌고루끼’는 아버지가 있기는 있지만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다. 귀족인 ‘베르실로프’의 사생아인 그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증오, 존경과 혐오를 동시에 갖고 있는 정신분열적인 인물이다(도스토예프스키 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듯). 자신만의 ‘이념’을 간직하고 ‘이념’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마음먹지만 그 ‘이념’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장장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아르까지의 이념은 실현되지 않는다). 아르까지가 그토록 추구하는 이념이란 바로 다음과 같다.

“글쎄요. 자세히 말하면 길어지겠습니다만.... 간단히 말한다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제 이념의 핵심은 그냥 나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단 2루블의 돈이라도 있는 동안은 나만의 공간에서 누구와도 상관 관계를 맺지 않고 그냥 혼자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물론 곧바로 반대 의견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지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끄라프뜨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위대한 미래의 인류를 위한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러한 고차적인 것보다도 개인적인 자유, 즉 나 자신의 자유가 우선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자유가 그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며,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101쪽, 열린책들)


‘개인적인 자유!’ 아무에게도 침해받지 않을 ‘독립적인 공간!’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때문에 아르까지는 로스차일드처럼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돈을 마련할 갖은 방법을 궁리한다(그 중에는 물론 ‘노름’도 있다). 이런 아르까지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방황만을 그린다면 900페이지가 어떻게 채워질까 하는 의문이 들리라. 당연히 아르까지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의 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는 흐른다. 삼각, 사각 관계를 넘는 로맨스와 복수, 협박 등등 흥미로운 요소도 많다. 어찌 보면 <미성년>은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주인공이 끊임없이 방백을 해대는). 때로는 주인공의 방백이 듣기 싫을 정도로 지겨워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흥미진진한 요소 때문에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미성년>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볼 수 있는 ‘베르실로프’- 어떻게 보면 이 인물이 아르까지보다 좀 더 흥미롭다. 인본주의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세계관에 러시아 민족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 방랑자적 기질 등등 매력적인 인격자이자 학자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아를 가진 또 하나의 ‘정신분열적’인 인물이다. 아들 ‘아르까지’에게 이런저런 ‘사상’에 대해 거창하게 논하지만 실상 그는 ‘정열’의 노예이자 ‘사랑’ 앞에서는 이성의 존재를 상실하는 가련한 인간일 뿐이다. 드디어 자신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황홀해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난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기가 무섭게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 180도 돌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측은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미성년’ 아르까지는 시간이 흘러도 결국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실패하고 사람들 속에서 계속 부대낄 뿐이다. 그가 ‘성년’이 되더라도 ‘이념’을 실천할 수 있을지는 영원히 미지수다. 게다가 그가 존경하고 찬탄해마지 않던 ‘베르실로프’ 역시 또 다른 ‘아르까지’일 뿐이다. 이야기가 흘러도 주인공들의 외형적인 모습이나 정신적인 삶은 크게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패자들의 끊임없이 방황하는 삶이 조금 더 와 닿기는 한다. 인간이니까 매일 다른 삶을, 달라진 자기를, 정신적으로 고양된 삶을 꿈꾸지만 결국 인간이므로 실패하고 만다.

베르실로프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결국 그녀 ‘까쨔’가 아니었을까. 자신과 결혼할 수 없다면 평생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아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자기를 비굴하게 만드는 존재, 그녀 ‘까쨔’. 정신적으로 아무리 편안하게 해주고 고양시켜주는 ‘소피아’ 같은 사람보다는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치졸한 면모까지 드러내게 할지언정 그만큼 이성을 마비시키는 존재가 바로 진짜 사랑하는 대상이 아닐까? 아르까지와 베르실로프를 보고 있노라면 결국 인간이란 영원히 ‘미성년’일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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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2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뭉크 관련 책을 읽고 있어서 이러다가 도끼 소설까지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뭉크가 니체와 도끼를 좋아했고, 그들의 책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어요. ^^

잠자냥 2016-09-13 10:29   좋아요 0 | URL
네, 그러고 보니 뭉크 그림과 도스토예프스키가 굉장히 잘 어울리네요. ㅎㅎ
책 읽을 여유가 더욱 넘치는 한가위 되시기를 바랍니다~

cyrus 2016-09-13 20: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잠자냥님도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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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였나. 독후감 숙제였을 것이다. 아무런 책이나 선택해서 읽고 쓰는 과제였다. 나는 <이방인>을 읽고 숙제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교무실에서 나눈 그 대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방인>을 볼 때면 언제나 그 장면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그때,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야, 너, 이 책이 이해가 되니?”
“네” 라고 나는 당돌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뫼르소가 왜 살인을 했는데?”
“태양 때문에요.”

선생님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나는 그때 열 네살이었고, 선생님은 나보다 두 배 조금 더 많은 나이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물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방인’이 이해가 되느냐고 물었던 선생님도 이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으리라. 아, 선생님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확실히 그렇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이어 예전에 읽은 작품 중 <이방인>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 책을 들었다. 카뮈 번역으로는 최고(?)로 대접받는 김화영 선생의 번역본이었다.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뫼르소가 ‘엄마’ 혹은 ‘어머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예전과는 달라졌다. 훨씬 자연스럽고 생생하다. 예전에 내가 읽은 번역본에서는 모든 부분이 ‘어머니’로 통일되어 표기되었던데, 뫼르소의 성격상 ‘엄마’라고
부르는 게 어쩐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잘 알다시피 <이방인>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엄마의 죽음 소식을 들은 뫼르소는 장례 준비를 위해 엄마가 머물던 요양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기이한 ‘이방인’. 그는 너무도 담담해 보이고, 심지어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는 등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오열은커녕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보통의 평범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낯선 이방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뫼르소는 심지어 엄마의 장례식이 있은 다음날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녀와 영화(그것도 코미디)를 보기도 한다.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 이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32쪽)' 그의 이런 평범치(?) 못한 태도는 나중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작용을 하게 된다.

우발적으로 ‘아랍인’을 살인하게 된 뫼르소는 법정에 서게 되고 검사를 비롯하여 그에게 유죄를 선언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뫼르소의 이방인적 태도-엄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고, 엄마의 죽음 이후에 여자친구를 사귀어 영화를 보고, 정사를 벌인 점 등등-를 짚어가며 그가 냉혈한, 감정도 없는 살인자임을 증명코자 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모든 게 그저 낯설 뿐이다. 법정에서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웅변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마치 잘 아는 듯이 이야기 하는 것이 그저 기이하고 놀라울 뿐이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 받고 독방에 갇혀 자신의 사형 집행일을 기다린다. 뫼르소는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126쪽)'라며 담담히 죽음을 기다린다.

뫼르소가 ‘이방인’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가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규범을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고(그러나 단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혼하자는 여자친구의 말에 결혼의 필요성을 잘 못 느끼겠다고 말하고, 법정에서는 다른 사람(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항변하지 않는다. 직장에서도 성공을 향한 의미가 도대체 모르겠다며 ‘안주’를 선택한다.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그게 그거고, 또 이곳에서의 내 생활에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가 불만스러운 눈치를 보이며 하는 말이, 나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 언제나 딴전이고 나에게는 야심이 없는데 그건 사업하는 데는 아주 좋지 못한 점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하려고 자리로 아왔다.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나의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해 봐도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학생 때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그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51쪽)


그런 그는 사회에서 영원한 ‘이방인’일 뿐이다.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뫼르소’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는 모두가 마땅히 여기는 사회적 가치나 척도에서 조금 물러나 있을 뿐이다. 그런 그가 과연 ‘이방인’인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사람을 이방인으로 내모는 사람과 사회가 ‘낯선’ 것일까?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뫼르소의 행동이 열네살 그즈음에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그가 왜 그랬을지 이해가 간다. 사회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뫼르소를 보며 공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결코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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