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한 10년 전에 읽었다면 나도 이 작품 속 샐과 딘처럼 미친 듯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을 듯하다. 그 사이 늙어버린
것인지, 하염없이 길 위에서 떠도는 그들을 보아도 그다지 큰 동요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이 무대책 젊은이들의
방랑기에 살짝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특히 딘처럼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오로지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런 사람을 친구로 두자면 무척 버거울 것 같다.
<길
위에서>는 케루악 자신의 경험담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두루마리 원고’로 유명하다. 종이를 갈아 끼우면서 원고 쓰는 게 거추장스러웠던 케루악은 타자지를 길게 이어 붙여 만들어
약 40미터 길이의 종이 위에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커피와 각성제에 의존하며 약 3주 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초기 원고는
여백도 단락 나눔도 없고 마침표나 쉼표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초기 두루마리 원고에서 수정과 수정을 거쳐 출간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수다, 지칠 줄 모르는 리듬감, 도저히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열정은 작품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때문에 좀 산만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딘과 샐은 함께 혹은 샐 홀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다. 동부에서 서부로, 서부에서 다시 동부로 때로는 멕시코로 목적지가 바뀌기도 한다. 가진 것도 없는 이들이 여행하는 방법은
히치하이크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또 달린다. 그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길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이 이 작품의 주된
이야기다. 달리고, 마시고,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하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여자를 사귀고 다시 달리고. 자동차, 히치하이크,
술, 마약, 섹스, 재즈 이런 단어들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그들은 즐겁다. 내일은 필요 없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샐과 딘은 ‘이 인간 세계에서 무명으로 사는 게 저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대체 저
세상이란 뭔가? 이 지상은 뭔가? 모두 관념이 아닌가.’(‘길 위에서’, 2권 108쪽) “정치가나 부자 같은 다른 사람들이 뭘
바라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거야.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거지.”(‘길 위에서’, 2권
116쪽)이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 어디에도 오래 안주하지 못하고 계속 길 위를 헤맨다. 샐보다 방랑벽이 더 심한 딘은
이곳저곳에 아내를 두고 아이까지 낳지만 그 평범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떠날 수밖에 없다. 길에 서지 않으면 그들의 자유는
감금당하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으로 가득한, 부패한 미국 사회에서 모범생처럼 살며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아무런 속박도
구속도 없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 계속 길 위에 서는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낭만적이고 달콤한 유혹이다. 때문에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당시 수많은 청춘을 길 위에 오르게 했고, 지금도 여전히 청춘의 바이블처럼 읽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오늘의
청춘은 샐과 딘처럼 돈 한 푼 없이 길 위에 서지는 못한다. 여행의 낭만과 자유를 찾지만 그 자유도 보통은 어떤 일정한 기간
내에만 허락된 것일 뿐이고, 그마저도 돈이 없으면 갖기 어려운 ‘여유’가 되어버렸다. 물질을 온몸으로 거부했던 샐과 딘의 ‘길’은
이미 사라져 버린, 전설 속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가 떠올랐다. 오토바이를 타고 끊임없이 달리는 그들. 이십대 초반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들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끝없이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긴 나는,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읽으며 더는 <이지 라이더>의 빌리와 와이어트 같은 딘과 샐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좀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다고나 할까. 늙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예전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자유에 대한 갈망
자체가 사라져 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