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려면 언제나 큰 결심을 해야 한다. 그 첫째 이유는 그의 작품은 보통 분량이 방대하다는 점, 둘째는
그럼에도 첫 번째 산을 넘어 엄청난 분량의 책을 집어 들면 수많은 등장인물의 복잡한 이름과 계속 씨름을 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힌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그런 등장인물들과 씨름하기도 바쁜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황한 문장과도 싸워야 한다는 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위에 나열한 세 가지 이유만으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내 취향은 아닌 작가다. 그럼에도 문학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의 작품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 또한 그렇다. 아주 오래 전 읽었던 <죄와 벌>이후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읽지 않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직은 <악령>은 도전할 마음은 생기지 않고(엄두가 나지 않고) 먼저 집어든 게 <미성년>이다.
<미성년>은 제목이 매혹적이라 끌렸다. 그러고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많은 작품 중 우선 읽어보고 싶어지는 것들은 제목에
끌려서일 때가 많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분신>, <가난한 사람들> 등등 제목만 봐도 좀
끌리지 않나?(사실 분량이 가볍기도 하다..;) <미성년> 이후로 또 읽는다면 <상처받은 사람들>,
<영원한 남편> 등을 생각 중이다.
<미성년>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성장
소설’이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서전적 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도 하다. 주인공인 ‘아르까지 돌고루끼’는 아버지가 있기는 있지만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다. 귀족인 ‘베르실로프’의 사생아인 그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증오, 존경과 혐오를 동시에 갖고 있는
정신분열적인 인물이다(도스토예프스키 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듯). 자신만의 ‘이념’을 간직하고 ‘이념’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마음먹지만 그 ‘이념’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장장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아르까지의 이념은 실현되지
않는다). 아르까지가 그토록 추구하는 이념이란 바로 다음과 같다.
“글쎄요. 자세히 말하면 길어지겠습니다만.... 간단히 말한다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제 이념의 핵심은 그냥 나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단 2루블의 돈이라도 있는 동안은 나만의 공간에서
누구와도 상관 관계를 맺지 않고 그냥 혼자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물론 곧바로 반대 의견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지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끄라프뜨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위대한 미래의 인류를 위한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러한 고차적인 것보다도 개인적인 자유, 즉 나 자신의 자유가
우선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자유가 그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며,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101쪽, 열린책들)
‘개인적인 자유!’ 아무에게도 침해받지 않을
‘독립적인 공간!’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때문에 아르까지는
로스차일드처럼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돈을 마련할 갖은 방법을 궁리한다(그 중에는 물론 ‘노름’도 있다). 이런
아르까지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방황만을 그린다면 900페이지가 어떻게 채워질까 하는 의문이 들리라. 당연히 아르까지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의 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는 흐른다. 삼각, 사각 관계를 넘는 로맨스와 복수, 협박 등등 흥미로운 요소도 많다.
어찌 보면 <미성년>은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주인공이 끊임없이 방백을 해대는). 때로는 주인공의 방백이
듣기 싫을 정도로 지겨워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흥미진진한 요소 때문에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미성년>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볼 수 있는 ‘베르실로프’- 어떻게 보면 이 인물이 아르까지보다 좀 더 흥미롭다.
인본주의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세계관에 러시아 민족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 방랑자적 기질 등등 매력적인 인격자이자 학자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아를 가진 또 하나의 ‘정신분열적’인 인물이다. 아들
‘아르까지’에게 이런저런 ‘사상’에 대해 거창하게 논하지만 실상 그는 ‘정열’의 노예이자 ‘사랑’ 앞에서는 이성의 존재를 상실하는
가련한 인간일 뿐이다. 드디어 자신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황홀해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난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기가 무섭게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 180도 돌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측은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미성년’
아르까지는 시간이 흘러도 결국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실패하고 사람들 속에서 계속 부대낄 뿐이다. 그가 ‘성년’이
되더라도 ‘이념’을 실천할 수 있을지는 영원히 미지수다. 게다가 그가 존경하고 찬탄해마지 않던 ‘베르실로프’ 역시 또 다른
‘아르까지’일 뿐이다. 이야기가 흘러도 주인공들의 외형적인 모습이나 정신적인 삶은 크게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패자들의
끊임없이 방황하는 삶이 조금 더 와 닿기는 한다. 인간이니까 매일 다른 삶을, 달라진 자기를, 정신적으로 고양된 삶을 꿈꾸지만
결국 인간이므로 실패하고 만다.
베르실로프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결국 그녀 ‘까쨔’가 아니었을까.
자신과 결혼할 수 없다면 평생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아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자기를 비굴하게 만드는 존재, 그녀 ‘까쨔’.
정신적으로 아무리 편안하게 해주고 고양시켜주는 ‘소피아’ 같은 사람보다는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치졸한 면모까지 드러내게 할지언정
그만큼 이성을 마비시키는 존재가 바로 진짜 사랑하는 대상이 아닐까? 아르까지와 베르실로프를 보고 있노라면 결국 인간이란 영원히
‘미성년’일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