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사실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대학교 때 <향수>와 <좀머씨 이야기> 이 정도만 읽고 나랑은 좀 안 맞는 작가네... 하고는 그 뒤로 거의 이 작가 작품은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보고는 이 책이 문득 읽고 싶어졌다. 제목이 멋져 보여서 그랬나.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다. 무지 슬픈 신화인데도, 왜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그리스로마 신화는 다 잊혀져도 이 이야기는 잘 잊혀지지 않는다. 명백히 비극이고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구구절절
보여주는 신화인데도 그냥 좋았다. 죽은 아내를 찾기 위해 지옥으로 찾아가서 결국 지옥의 신들을 감동시키고 죽은 아내를 다시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오르페우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의심이 들어 이승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신들의 말을 거역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시 저승으로 끌려들어가는 에우리디케의 모습. 다시 아내와
함께 이승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마음 속에 든 의심때문에 한순간에 잃어버린 오르페우스의 모습에서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데도 우리는 종종 살아가면서 오르페우스와 같은 짓을 너무나도 많이 한다. 그렇게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지 알면서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사랑의 추구와 발견>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의 현대적 재현이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 어느날, 문득
사랑에 빠져버린 미미와 비너스. 서로의 눈에 서로만 보이던 완벽하게 충실했던 시간들이 사라지고 7년 뒤에 그들은 각각 겉으로는
상관없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결국 헤어진, 그래서 더 이상은 사랑하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남남인
존재로. 이들이 처음 만나서 나누는 대화들이 의미심장한데, 다음과 같다.
미미 :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이 틀림없지?
비너스 :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절대 아니에요. 전 테크닉도 없고 성량도 풍부하지 않고, 고음도 저음도 제대로...
미미 : 고음을 제대로 낼 줄 아는 사람은 만나지 못한 지 벌써 오래됐어. 물론 저음도 마찬가지고...
비너스 : .... 게다가 전 너무 감정적이에요. 자신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하는 데다가 너무 감정에만 치우치조. 목소리는 그걸 못 따라가고...
미미 : 젊은 여자가 옛날 카스토라토를 위해 만들어진 곡을 무조건 노래할 필요는 없지.
비너스 : 스스로 믿지 못하는 사랑에 대해서 노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일생일대의 위대한 사랑 같은 거요. 죽음을 뛰어넘고, 어쩌면 죽음까지도 굴복시키는 그런 사랑 말이에요.
미미 : 왜 안 된다는 거지?
비너스 : 왜냐하면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물론 과거에도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고요. 그런 사랑은 단지 환상에 불과해요.
미미 : 환상이라고?
비너스 :
(매우 격정적으로) 당신은 그 정도로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어요? .... 그렇게 영원히....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저승까지도 쫓아갈 정도의 사랑 말이에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찾아간 것 같은 그런 사랑이오.
미미 : (미소 띤 얼굴로) 당신은 그런 사랑을 믿지 못하나?
비너스 : 난 믿지 않아요!
미미 : 그 말은 못 믿겠는데. 당신은 내가 뭘 믿고 있는지 알거야. 난 그걸 믿어....
처음
그들이 초창기에 나눈 대화에서 비너스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찾아간 것 같은 사랑의 존재를 믿지 못한다. 그건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그런 사랑은 없다고. 반면 미미는 그런 비너스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미소를 보내며, 둘의 관계에 어떤 확신 같은 것을
한다. 의미심장하게.
미미 : 어디 가려고?
비너스 : 집에요
미미 : 지금 집에 있잖아.
비너스가 깜짝 놀라 미미를 쳐다본다. 미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민다.
미미 : 여기서 나랑 같이 살아!
비너스 : 음.... 그렇지만....
미미 : 여기 있어. 다시는 어디에도 가지 말고!
(클로즈 업) 비너스가 미미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미미의 손에 이끌려 침대로 되돌아온다. (근접) 두 사람이 포옹을 한다.
비너스 : 우리는 이제 사랑하는 거죠. 항상 그리고 영원히?
미미 : 항상 그리고 영원히!
'항상, 그리고 영원히'를 꿈꿨던 사랑이 7년 뒤에 끝이 나고, 미미가 작곡해 준 노래를 통해
대단한 성악가로 성공한 비너스. 그와는 달리 미미는 떠나간 사랑의 잔영에 늘 괴로워하며 피폐하게 살아간다. 비너스의 경우 성공과
또 다른 남자 해리까지 곁에 두고 있는 상태다. 술과 담배에 찌들어 아무것도 할 의욕을
보이지 않는 미미에게 그의 친구는 이런 식으로 미미와 비너스의 사랑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한다.
테오 : 처음부터 그랬어, 미미! 사실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거든, 그녀는 자네한테 맞지 않았고, 자네 역시 그 여자한테 맞지가 않았어.
미미 : 테오, 그녀는 내 인생의 하나뿐인 위대한 사랑이야. 우린 7년간을...
테오 : (말을 중단시키며) 두 사람은 늘 싸우기만 했어... 난 자네가 그녀의 무식함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다 지켜봤다고.
미미 :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녀는 아주 지적인 여자야. 물론 머릿 속에 든 게 별로 없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영혼은 안 그래. 아무튼 가슴으로 느끼는 것에서는 자네 부인 머리보다 더 지적이야.
항상
싸우는 관계, 늘 서로를 괴롭히고 상처주고 했던 관계, 사실 비너스의 경우 미미의 성격으로 인해 늘 자기 자신이 괴롭힘 당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그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해리라는 아주 평범한 남자를 만나기는 하지만.... 그 상태를 잘 견디지
못한다. 늘 공허해 하고, 마음 속 머리 속으로는 끊임없이 미미와 연결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작사 작곡 해준 노래들을
부르며 그를 그리워하고,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미미와 함께 산책한 거리를 밤마다 배회하고, 해리 곁에서 평온해 하는 척 하지만
늘 미미가 연락해 오는 핸드폰 속 음성 녹음에 더 신경이 곤두설 뿐이다. 그러다 결국, 미미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삶이 끝날 때까지 항상 함께 같이 있어야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미미. 그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지만 왜 이런 깨달음은 항상 늦는 것일까? 비너스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 그에게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미미는 자신과 비너스가 7년이나 살았던 집에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며 친구 테오와 그의 아내 헬레나의 별장이 있는 곳에
와서 결국 자살을 하고 만 뒤다. 이 부분에서 미미는 비너스 이전에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가 있었던 것을 암시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테오에게 "도저히 이 집에서 살 수가 없어, 집안 모두가 비너스의 냄새로 가득하다고" 라고 했더니 테오는 역시 냉랭하게 "이
집에 들락 거린 여자가 비너스 말고 한 두 명인가? 그런데 왜 유독 비너스 냄새만 난다고 하는 거야?" 그 말에 미미는 "다른
여자들은 다 떠났지만 비너스의 냄새는 온 방을 가득 채운다"며 비너스가 떠난 뒤에도 언제나 그곳에 그녀가 머물고 있음을 말한다.
위대한 사랑의 존재를 늘 의심했던 비너스와 달리 그녀가 자기에게 생애 단 한번의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미미는 알았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미미가 별장으로 떠나기 전에 챙기는 물건 중 파란색 칫솔이 있는데, 이 칫솔은 미미와 비너스가 함께 여행다니면서 하나로
같이 쓰던 칫솔이라는 것. 미미가 먼저 닦고 비너스가 닦고 이런 식으로.. 그리그 이 파란 칫솔은 결국 미미가 자살을 하면서
비너스에게 남긴 유서와 함께 남겨진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고? 오르페우스가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서 저승으로 간 것처럼
죽은 미미를 찾아 비너스가 그를 찾아 저승으로 가게 된다. 절대로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와 같은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비너스가, 어느 순간 자기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의 명백한 현대적 재현이라는 점에서 저승에서 만난 그들이 행복해하는 것도 잠시... 결국
오르페우스의 의심이 그 둘이 함께 다시 영원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 것처럼, 이 둘 역시 그렇게 된다. 함께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고 다시 묵묵히 걸어가던 두 사람. 그들은 차라리 침묵을 택한다.
내레이션 : ..... 이제 두 사람은 기분 나쁜 말, 상처 주는 말,
애매모호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느니 차라리 침묵을 택한다. 왜냐하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그
끔찍한 선례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 뒤를 돌아봄으로써 순식간에 사랑과 행복을 전부 잃어버린 그 끔찍한 일을.
하지만,
미미와 비너스는 결국 인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들이 입을 여는 순간 다시 서로를 의심하고 상처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왜
이승으로 가는 길이 빨리 안 보이지? 비너스, 당신 정말 길 알고 있는 거야? 항상 당신이 가자고 한 길을 따라가면 이상한 길이
나오고는 했잖아. 길 모르지? 이런 비난의 말, 의심의 말. 비너스때문에 여행지에 가서 길을 헤맸던 과거의 일을 끄집어 내서 다시
비너스를 상처주는 미미. 게다가 비너스는 미미가 저승에서 신과 사랑을 나눈 사실을 끄집어 내며(저승에서 미미를 유혹하기 위해
비너스로 변신한 신이 미미와 섹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미는 절망 상태에서 그 신이 비너스라고 착각하고 관계를 가졌고.) 트집
잡기 시작한다. 이런 말다툼 속에서도 비너스는 절대 이승에 도착할 때까지 미미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나도 어이없이 비너스의 등 뒤에서 따라가던 미미가 비너스의 엉덩이가 예전에 비해 볼품없어졌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미미 : 맞아. 그랬었지. 그런데 당신 지금 보니 살이 좀 빠졌군... 거기 엉덩이 말이야.
비너스 : 그래요. 당신 걱정하느라 그렇게 됐어요.
미미 : 그건 별로 좋지 않은데. 그럼 아마 당신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일지도...
비너스 : (상처 받았다.) 나이 들어 보인다고요.... 내 엉덩이가?
미미 : 부정적인 의미로 말한 게 아니야, 내 사랑. 내 말은 보통 여자의 나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할 때, 나이가 들수록 살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보통 전체적으로 조금씩 처지는 걸 보고 알 수 있다는....
비너스 : 그래서 지금 내 엉덩이가 처졌다는 말이에요?
미미 : 그런 뜻이 아니야, 난 단지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 당신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엉덩이를 가졌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비너스가 흥분해서 모든 경고와 목적들을 잊어버리고 미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비너스 : (날카롭게) 내 엉덩이가 더 이상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으면. 그냥.....
미미가 손으로 비너스의 옛날 엉덩이 모양을 만들려는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미미를 다시 하데스로 끌어당긴다.
비너스 : (깜짝 놀라서) 미미....!
미미 : (슬프게) ..... 기억나 당신? 그때 젖은 모래 속에 앉아 있던 때 말이야.....
비너스 : (비명을 지른다) 미미, 가면 안돼요....!
절망 속에서 그녀가 자꾸 멀어져 가는 미미를 향해 손을 내민다.
미미 : (멀리서) 동그랗게 솟아 있던 당신의 그 작은 엉덩이는 정말 이 세상......
비너스 : 미미! 미미!
결국
그들은 그렇게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는 상태를 저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통해서 스스로 박탈해 버리는 것이다. '신화처럼
위대했던 사랑도 별것 아닌 사소한 의견 차이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미미에게서 영원히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가
버린다'는 책의 구절처럼. 오르페우스 신화와 달리 이 책에서는 '엉덩이 발언'으로 평생 지울수 없는 상처를 안고
있을지 모른다는 비너스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단 한번 미미가 비너스를 만나게 될 기회를 얻게 된다. 미미가 찾아간
그때 이미 비너스는 70을 넘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있다. 자기 삶에 단한번 위대한 사랑이 왔던 것만으로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미 죽은 미미의 집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는 노인의 모습으로.
이 책을 이렇게 구구절절, 본문까지 삽입하면서
길게 적고 있는 이유는 사실 미미와 비너스가 하는 행동들이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오류와 실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완벽하지 않고, 이기적인 동물이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저런
실수를 하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자기 일생에 보기 드물게 찾아오는 위대한 사랑을 놓치게 되는 어리석은 일을 속수무책으로 하게
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적어도, 이 구절을 읽는 분들은 그런 무수한 오류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마음에서 그렇다. 의심하고
질투하고 비난하고 상처주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 이 세상 사랑의 보편적인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로 인해 단
한번의 위대한 사랑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지금 하고 있는 사랑, 지금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 생애 다시 오지 않을 위대한 사랑, 그런 사람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