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 주식회사 로알드 달 탄생 100주년 기념 컬렉션 5
로알드 달 지음, 이원경 옮김 / 베틀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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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머러스함과 기막힌 반전, 도무지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그 속에서 성욕, 소유욕, 명예욕 등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낱낱이 까발린다. 여기 실린 9편 모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라 그동안 로알드 달 작품을 많이 접했던 사람들도 흥미롭게 볼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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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1-1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때 지금은 절판된 로알드 달의 단편 시리즈들 엄청 좋아했어요. 그 중에 ‘카티나‘ 라는 소설 읽고 정말 미친듯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뒤로 로알드 달의 장편도 찾아 읽었지만, 장편은 너무 아니어서 조금 실망했답니다.

잠자냥 2019-01-17 14:29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절판된 판본으로 열심히 읽었답니다. ㅎㅎ 지금도 집에 있어요. 전 로알드 달 장편은 시도해 본 적이 없는데 다행이군요. ㅋㅋㅋ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랍니다~ 다시 또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 듯. ㅎㅎ
 
어느 하루 - 피란델로 단편 선집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정경희 옮김 / 본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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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델로의 단편은 영화를 보는 듯하다. 짧은 단편들인데도 한 편 한 편 읽노라면 눈앞에서 생생한 캐릭터들이 잔뜩 나오는 이탈리아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등장인물은 주로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소박한 이들이며, 그들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안타깝고 연민 가득한 그런 영화 말이다. <어느 하루>를 다 읽고 나면 왜 그의 작품에서 영화 같은 느낌을 받는지 곧 깨닫게 된다. 극작가로 널리 알려진 피란델로는 생전에 250여 편에 이르는 단편소설을 남겼다. 그 가운데 <어느 하루>에 실린 9편은 모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라고 한다. 아하, 비밀이 거기 있었구나! 더욱이 그의 유명한 희곡 중에는 단편소설을 개작한 작품이 많단다.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한다. 피란델로의 머릿속에서 단편 소설은 애초부터 하나의 영상처럼 그려졌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희곡작품으로 개작하기에도, 영화로 만들기에도 좋았던 것은 아닐까.


사실, <어느 하루>의 첫 번째 단편인 ‘미차로의 까마귀’를 읽었을 때는 루이지 피란델로의 매력을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어느 양치기가 절벽에서 까마귀 한 마리를 붙잡아 마을로 데려오면서 시작한다. 정작 잡아온 까마귀로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양치기는 기념으로 방울을 달아준 뒤 까마귀를 풀어준다. 방울을 달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오르는 까마귀. 그런데 이 녀석은 방울 소리를 내면서 하필이면 어느 농부의 빵을 훔쳐 먹는다. 그러려니 하면 그만일 것을, 이 농부는 까마귀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는 까마귀에게 자기 뜻대로 한방 멋지게 먹였을까? 이 이야기는 다분히 우화적이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모든 작품이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하면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갔다(그리고 이 단편집을 모두 읽고 나면 이 작품이 왜 서두에 위치해 있는지 알게 된다). 


두 번째 작품인 ‘또 다른 아들’을 읽으면서 나는 피란델로의 세계로 서서히 빠져 들어갔다. 아,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어! 조금씩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노파 마라그라치아는 아들 둘이 아메리카로 떠난 뒤 혼자 부랑자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유일한 기쁨이라면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인데, 글을 모르는 그녀는 마을의 과부 닌파로사에게 늘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토록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도 떠난 아들들로부터는 답장 한 번 없다. 그래도 노파는 오늘도 닌파로사에게 편지를 부탁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편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다! 어찌된 일일까? 편지의 비밀과 함께 이 노파의 굴곡진 삶이 드러나면서 뜻밖에도 커다란 비통함을 마주하게 된다. 진실을 알고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 노파의 모습에서 인간은 어쩌면 비참한 현실에서도 꿈꾸기를 멈추지 못하는 존재는 아닐까 숙연해지기도 한다. 


세 번째 작품인 ‘달의 저주’는 자신을 늑대 인간이라 믿는 농부와 이 사실을 모르고 그와 결혼한 신부의 이야기로, 첫 번째 작품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고, ‘또 다른 아들’과는 더더욱 다르다. 알고 보니 피란델로는 소설 속 공간에 따라 크게 ‘시칠리아 이야기’와 ‘로마 이야기’ 두 가지를 썼는데,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주로 고풍스럽고 토속적인 분위기로 미신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존재감이나 현대의 비극을 초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단다. ‘달의 저주’는 그야말로 토속적이면서도 미신적인 세계를 담으면서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을 날카롭게, 그러나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달의 저주’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인 표제작 ‘어느 하루’도 초현실적인 이야기로, 매우 짧은 분량인데도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실수였는지 몰라도, 돌연 누군가에 의해 잠에서 깬 나는 어느 간이역에 멈춰 선 기차 밖으로 내던져졌다. 한밤중이고, 내 수중엔 아무것도 없다. (‘어느 하루’. 94쪽)


이렇게 시작하는 ‘어느 하루’는 기차에서 잠들었다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간이역에서 내던져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꿈과 환상, 정신착란과 환각 등 시공간을 벗어난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는 기이한 일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는 온갖 일을 겪고 난 뒤 순식간에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항아리’는 가장 많이 알려진 피란델로의 단편 중 하나로, 수많은 버전으로 연극 무대에 올라졌을 뿐만 아니라 영화와 발레극으로도 재현됐다고 한다. 익살스럽고 재미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꽤 철학적이어서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주 돈 롤로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귀한 항아리는 마련했는데, 그만 그 항아리가 둘로 쪼개지고 만다. 어쩔 줄 모르던 그는 신통방통한 고무접착제를 발명한 땜장이 디마를 불러와 항아리를 원래대로 고쳐주면 값을 후하게 쳐주겠다고 말한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만 받았던 디마는 드디어 자신의 기술을 뽐낼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신나게 항아리를 붙인다. 이윽고 항아리는 감쪽같이 새것처럼 붙는다. 그런데 아뿔싸 이를 어쩌나? 디마는 자신이 항아리 안에 들어간 채 붙이고 만 것이다. 항아리를 깨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디마와 항아리를 절대로 깰 수 없다는 돈 롤로. 이들의 대립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 상황에서 돈 롤로에 비해 디마의 체념은 조금 빠른 편인데, ‘디마는 진정됐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이 별난 사건에 재미를 느꼈고, 이를 불행한 사람들 특유의 슬픈 유쾌함으로 웃고 있었다.’는 구절에서 피란델로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나면서 서글픈 웃음을 짓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단편집의 백미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작품 ‘유모’와 ‘침묵 속에서’이다. 그의 다른 작품은 읽지 않더라도 이 두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유모’의 주인공 안니키아 또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여인으로,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이웃에게 맡기고 시칠리아에서 로마로 유모살이를 하러 떠난다. ‘로마’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 작품은 다분히 현실적이고 그 안에서 이 힘없는 여인의 삶을 비극적으로 그려나간다. 안니키아는 오래전부터 아가씨로 모시던 에르실리아가 막 출산을 하자 그 갓난아이의 유모로 마지못해 고향을 떠난다. 에르실리아는 사회주의사상에 경도된 변호사 모리와 결혼했는데, 신혼인데도 그들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 모리는 사회주의사상의 인도적인 관점에 매료된 상태이지만, 사실 그는 위선적인 부르주아일 뿐이다. 순박한 안니키아를 보고도 ‘그 무지몽매함을 참을 수 없어’하고, ‘노예근성이 이렇게나 깊게 뿌리박힌 시칠리아의 최하층민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식을 불어넣는 게 가망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빠져들 뿐이다. 이런 부르주아 인텔리의 위선은 이 작품 끝에 가서 절정에 달하는데, 안니키아의 비극을 앞에 두고도 모리는 방관자적 태도로 멀거니 지켜만 본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비극을 사회주의자 모임 회담 주제로 삼기로 하고는, 기계적으로 글을 쓸 뿐이다. 그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습에 분노를 느끼면서 안니키아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지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게 된다.

  

마지막 작품인 ‘침묵 속에서’는 근면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늘 칭찬받던 소년 ‘체사리노’가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는 요즘 무슨 일인지 공부에 통 집중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체사리노. 그는 이제껏 아버지를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어떤 사람인지 도통 알지 못한다. 집안에는 아버지의 사진 한 장 없고 어머니는 그에게 단 한 번도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는 종일 어머니 얼굴을 보지 못해 어머니 또한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늘 바쁜 어머니. 잠시도 지칠 줄 모르는 어머니는 그렇게 많은 일을 한 덕분에 체사리노가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이 소년에게 삶은 고독하고 적막할 뿐이다. 그런데 이 고독하고 적막한 생활일지언정 어머니 곁에서 계속 학교에 다니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갑자기 그에게 기숙사 입학을 제안하고, 체사리노는 그대로 따른다. 그리고 어느 날, 기숙사로 전해온 어떤 소식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한껏 상처받기 쉬운 열여덟 체사리노 앞에 닥친 가혹한 인생의 무게에 한숨짓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를 열렬히 응원하게 된다. ‘침묵 속에서’는 인생의 슬픔, 기쁨, 비극이 모두 담겨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끝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193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지 피란델로는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 내 작품에는 모든 사람에 대한 쓰라린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이 아홉 편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그의 단편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이 단편집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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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단편만 읽고는 아, 이런 우화같은 이야기면 쫌 그런데 하면서 다음 단편 읽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당장 다음 단편들 읽어야겠어요.

잠자냥 2019-01-09 09: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죠? 첫 단편이 조금 읭? 스러운데 다음 단편부터는 괜찮으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아니면 아예 마지막 두 단편만 읽으시던가요-

카알벨루치 2019-01-0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있시유~피란델로 ㅎㅎ

잠자냥 2019-01-09 09:20   좋아요 1 | URL
재미나게 읽게 되시길 바랍니다! ㅎ
 


지난주에 영화 한편을 봤다. <인생 후르츠>. 사실 이 영화를 내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 12월에 개봉했을 때는 완벽하게 관심 밖의 영화였다. 영화 포스터 속 해맑게 웃는 노부부의 모습과 ‘인생 후르츠’라는 제목이 거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백년해로한 노부부의 삶을 중심으로 인생에 대해 적당히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어떤 깨달음을 전하려는 진부한 이야기려니 했다. 일본 영화라서 왠지 더 뻔해보였다. 나는 1950~60년대 일본영화 황금기에 만들어진 영화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등 현대의 몇몇 감독 작품이 아닌 이상 일본 영화를 굳이 찾아서 보게 되지는 않는다. 일본 영화, 드라마 느껴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오글거림이나 ‘에~?’ 하면서 놀라는, 지나치게 과장된 액션에 거부감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 친구에게 영업당해 결국 보게 되었다. 친구도 별로 없는 나로서는 주변 인물 두 사람이 강력하게 이 영화를 추천하니 <인생 후르츠>에 정말 뭐가 있는 게 아닐까 살짝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좋을 것 같다나. 무엇이 이토록 그들을 이 영화에 빠지게 한 것일까. 그래, 어디 보자 싶어 팔짱을 끼고 스크린을 주시한다.

영화가 시작하자 반가운 배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 일본의 어느 도시. 흔하디흔한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가운데 유독 나무로 우거진 작은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여느 집과 달리 이 집은 마당에 빼곡하게 온갖 채소와 과일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 채소들과 나무를 가꾸는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가 이윽고 등장한다. 하루 종일 밭을 일구고 열매를 따고 그렇게 딴 열매와 채소로 온갖 음식을 만드느라 쉴 틈 없이 분주하다.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한데 이 노부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그들이 90세와 87세, 둘이 합쳐 177살 고령의 나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60년 이상 함께 하며, 40년 넘는 세월 동안 이 집에 살면서 과일 50종과 채소 70종을 키우는 노부부.

할아버지 ‘슈이치’는 노란 팻말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와 식물이름을 일일이 적으면서 귀여운 그림과 함께 짧은 문구도 덧붙인다. ‘작은 새들의 옹달샘, 와서 마셔요.’ ‘능소화, 붉은 꽃의 터널을 지나보세요.’ ‘작약, 미인이려나?’ ‘여름밀감, 마멀레이드가 될 거야.’ 등등. 솔직히 처음에는 할아버지의 팻말에 ‘귀엽네’, 미소 지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음 역시, 오그라들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밭을 일구고 마당을 가꾸는 모습과 함께 키키 키린의 음성으로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그리고 천천히’ 이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서서히 열려간다.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는 건축가로 1960년대에 나고야 시 교외 아이치현 고조지 뉴타운 설계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 그는 마을에 숲을 남겨 바람이 통하고 숲이 살아있는, 자연 친화적인 마을을 꿈꾸었지만 자신의 건축 도면대로 도시는 조성되지 않고 개발 논리에 밀려 아파트 숲을 이루게 된다. 이에 낙심한 것일까. 그 뒤로 그는 자신이 하던 일과 거리를 둔다. 1970년대에 고조지 뉴타운 집합주택에 입주했던 슈이치 가족은 5년 뒤에 뉴타운 안에 300평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겠다고 마음먹는다. 집마다 한사람씩 숲을 조성한다면 결국 도시 전체가 숲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뉴타운의 민둥산 다카모리 산도 츠바타가 1970년대에 그 지역 초등학교에 제안해서 1만 개의 도토리 묘목을 심게 된다. 그리고 지금 그 산은 잘 자란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 되었다.

이 부부의 반평생을 9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지켜보노라면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는 이 명확한 자연의 이치가 결국 우리 삶의 이치와도 다르지 않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 무엇을 하든 ‘차근차근, 천천히 스스로’ 이 말 또한 그렇다. 처음에는 허허벌판이던 300평의 땅이 이제는 나무와 풀로 우거진 숲을 이루고 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차근차근 천천히 그렇게 자라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두 부부의 손으로 조금씩 일군 공간. 뉴타운 조성 시기에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어차피 세상은 다 그렇지’하고 평범한 건축가로 살아갔다면 아마 츠바타 슈이치의 삶은 제대로 열매 맺은 기분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건축가 ‘츠바타 슈이치’인가 싶기도 하지만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가 없었다면 그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결코 그럴 수 없었으리라. 젊은 시절부터 아내가 뭘 하든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 남편, 그런 남편을 믿고 또 완벽하게 지지하면서 함께 그 길을 간 아내. 이 두 부부의 모습에서 진정한 ‘동반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에서는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들이 천천히 차근차근 빚어낸 집과 삶은 말 그대로 ‘보석상자’처럼 빛난다. ‘오래 살수록 인생은 아름다워진다.’는 말 또한 잊히지 않는다. 아마 이 두 사람처럼 산다면, 오래 살수록 인간이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지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 영화는 앞으로 다가올 노년에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 내 인생의 열매를 어떻게 맺을 것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게 한다. 몇몇 장면에서는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울컥 나기도 하는데, 영화를 볼 이들을 위해 그건 비밀.


<인생 후르츠> 앓이 중인 친구는 이 노부부의 삶을 다룬 책 <밭일 1시간, 낮잠 2시간>도 사서 완전히 푹 빠져있던데, 영화를 보고 나니, 나도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게 되더라. 이제 책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틈틈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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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레베카 (개정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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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듀 모리에 대표작답다. 단 한순간도 책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는 이야기. 다 읽고 나면 정말? 정말? 정말일까 하게 된다. 그 어떤 인물보다(심지어 주인공보다) 레베카라는 인물이 더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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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1-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작품은 어차피 리뷰 써봤자 다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리뷰는 생략. 근데 할말 참 많은 작품이긴 하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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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청춘을 호명한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이십대가 아닌, 서른을 넘긴 나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주로 떠올리는 청춘의 기억은 설익고 치기어린, 그렇지만 그래서 뜨거웠을 어느 한 시기일 것이다. 때문에 읽는 동안 그 시절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오고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 무렵을 떠올리느라 밤잠을 설치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H전집’에 얽힌 ‘그들’의 이야기가 생각지도 못하게 나의 20대, 정확히는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제목으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라는 말. 그 앞에는 무수히 많은 의미가 생략되었으리라. 그런데 어떤 말이 생략되었을지는 감으로 헤아릴 수 있다. 어리석고 치기어리고 부족하고 미숙하고 실수투성이에 엉터리 같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었고, ‘그래도’ 청춘이었다는.

헌책방에서 H전집을 발견하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 후미오. 후미오의 약혼녀인 세쓰코는 그 책에 찍혀 있는 옛 소유자의 장서인이 낯익다. 어찌된 일일까? 알고 보니 그 책은 세쓰코가 대학 때 알고 지낸, 도쿄대 역사연구회 회원이었던 사노의 것이었다. 후미오는 세쓰코의 부탁으로 사노의 행적을 좇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후미오와 세쓰코, 거기에 사노의 이야기까지 펼쳐진다. 이 책을 읽노라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후미오나 세쓰코보다 사노가 더 깊이 인상에 남는다. 사노의 절박함과 절망이 담긴 편지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사노는 한때 지하 군사조직에 참가할 정도로 극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렇지만 1955년 무장투쟁을 지향하던 일본 공산당이 이른바 ‘육전협(제6회 전국협의회) 결의’ 이후 평화혁명으로 노선을 바꾸자, 학교로 돌아와 정치투쟁과 선을 그은 채 평범한 대학생활을 이어간다. 겉보기엔 육전협이 노선을 바꿈으로써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지만, 사실 그가 그토록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더더욱 없지만 스스로 자신을 배신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배신은 치명적이어서 그는 학생운동에 뜨겁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소시민성과 그걸 비판하는 양심 사이의 모순’을 겪으면서 그저 조용한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사노의 모습에서 대학 시절 한 선배가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전혀 낯선 풍경이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운동권 끝자락이 존재해서 나보다 학번이 훨씬 높은 선배들 가운데는 여전히 거리 투쟁을 벌이고, 그 때문에 수배를 받고 학교에서 숨어 지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정말로 사노처럼 마르크시즘에 열렬히 경도된 사람도 있었는데, 그 선배가 그랬다. 그는 정말 열정적이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 또한 몇 번은 거리에 서기도 했는데, 그것조차 나는 곧 시들해져서, 그들의 권위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그 세계를 떠났다. 그때 그 선배는 몹시 안타까워했는데, 나는 그 또한 언젠가는 그 세계를 떠나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학창 시절의 운동은 홍역 같은 거야. 시간이 지나 취직하면…….” 하는 말을 한다. 지금은 대기업에 적을 둔 나는 겉으로 보기에 아마 전형적인 인물이겠지.(<그래도 우리의 나날>, 70쪽)


이 구절을 읽는데,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사노처럼 소시민으로 살면서 주말에는 명동, 광화문, 종로, 대학로 등지에서 쇼핑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면서 살았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나는 어느 날 그 선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한 번도 아닌 여러 차례였다. 그때마다 그는 을지로, 광화문, 종로, 대학로에서 여전히 그 누군가를 위해 ‘투쟁’중이었다. 어느 해 5월 1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명동 거리를 걷다가 노동절 시위 무리에 있는 그 선배를 보기도 했고, 용산 참사 진실 규명을 외치는 시위 무리에서도 그를 보았으며,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시위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그를 보기도 했다.

여하튼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시위할 거리가 있느냐고 반문할 때조차도 시위 현장에 있었고, 이상하게도 나는 몇 년에 한번쯤은 그런 그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틀렸구나. 그는 여전하구나. 그를 우연히 마주친 날이면 이렇게 평범하게 소시민적으로 사는 내가 비겁해 보이고, 한심스러웠다. 그는 어떻게 그런 삶이 여전히 가능한 걸까? ‘혁명가이고 싶었지만 혁명가가 되지 못한 사노’와 달리 그 선배는 지금도 생활 속 작은 혁명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선배는 죽는 순간에 떠올릴 만한 확실한 ‘어떤 것’을 가졌으리라.

H전집의 옛 주인인 사노의 편지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라는 엄청나고도 무서운 질문을 평범하게 살아가던 후미오와 세쓰코에게 던진다. 이 책을 읽는 이들도 이 질문을 마주하고 문득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가벼운 충격 같은 것을 느끼리라. 세쓰코는 자신이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갖고 있을 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약혼한 사이지만 후미오와의 생활은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생(生)은 ‘마른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기만 하고 있으니 죽음에 임박해서 움켜쥐려는 손에 뭔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혹해한다. 그런 세쓰코를 지켜보는 후미오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에게는 모두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과 죽음이 있다. (...) 나는 머잖아 어학 강사가 되어 강사로 살고, 두세 권의 역서라도 내서 잠깐 행복해지다, 끝내는 어학 강사로 늙어가려고 마음먹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는 인간이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 99쪽)


후미오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노의 편지가 불러온 파문은 그리 잔잔하지만은 않다. 세쓰코는 세쓰코대로, 후미오는 후미오대로 저마다 과거를 환기하고, 자기가 지금 밟고 선 세계를 되돌아본다. 이런 현상은 세쓰코 쪽이 한층 심하다. 그녀는 “당신은 불안하지도 않아? 죽을 때 아무것도 떠올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죽는다는 건 외로운 일이야. 하지만 외롭다는 것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 일이 무(無)가 되어버리는 것은 전혀 별개 문제야.” 말하며 자신의 공허한 삶을 처음부터 다시 쓰려고 한다.

그에 비해 후미오는 과거를 돌아보기는 하지만 현재의 삶을 크게 조정하지는 않는다. 진폭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인물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인 후미오는 사노나 세쓰코, 또 세쓰코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노세 등 다른 인물에 비해 너무나도 덤덤하고 관조적인, 그래서 아주 예전부터 늙어버린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자신의 과거 속에서도 그는 애늙은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 걸까? 후미오에게는 조금 반감이 들기도 한다. 사노나 노세, 세쓰코에게는 ‘그래도’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시절이 있는데, 후미오에게는 딱히 그럴 만한 시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애초에 ‘공허함 그 자체’인 인물은 아닐까.

후미오의 그런 모습은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세쓰코나 유코)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적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도 주변에 여자는 넘쳐나고 후미오는 아쉬울 것 없이 여자를 만나고 떠나보낸다. 세쓰코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애초부터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런 후미오는 하루키 작품에서 곧잘 등장하는, 아닌 척 하지만 실은 왕자병 기질의 남주인공(<상실의 시대> ‘와타나베’ 같은)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그가 유코와 세쓰코를 대하는 방식에는 전형적인 여성의 대상화가 엿보이는데, 특히 유코, 세쓰코와 처음으로 섹스를 나누게 되는 순간의 묘사나 그때 그녀들의 심리 상태 등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F교수가 가즈코에게 하는 짓거리 또한 그렇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아닐걸? 하고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결점이라고나 할까,

더욱이 이 작품에서 남자들은 사노를 비롯해 노세는 물론 사노가 ‘자신의 또 다른 눈’이라고 지칭한 소네 등 모두 하나 같이 젊은 날 어떤 이상이나 사상에 경도되어 거기에 열정적으로 빠지거나 그런 상황 속의 자기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고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세쓰코나 유코, 가즈코 같은 여자들은 어떤가. 그저 그녀들이 한다는 일은 그런 남자들을 지켜보며 ‘사랑’에 빠지거나 그들의 열정에 감동해 그 열정을 좇을 뿐이다. 스물 한 살 유코에게 가장 절실한 고민이 고작 그 나이에도 ‘남자에게 안기거나 키스 받은 적이 없어’ 자신을 ‘추하다고’ 여기는 일이라니, 실소가 나올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남자에게는 ‘인생 소설’이 될 수는 있어도 여자에게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현실에 머무는 후미오에 비해 자기 삶을 바꾸고자 용감하게 결단을 내린 세쓰코라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의 이와 같은 결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도’ 이 작품은 지금 한 순간, ‘인간의 행복이란 대체 무엇일까’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착각으로 지탱된 날들’일지라도 ‘거기에는 인생과 미래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그럼으로써 기쁨과 관능에 넘쳤던 날들을 떠올리는 세쓰코의 기억에서 우리가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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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0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활 속 작은 혁명가인 그런 선배가 있기에 그래도 누군가는 희망을 걸어볼 비빌 언덕을 찾게 되는 건 아닐까 싶네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루게 되는 책인데 이참에 저도 펼쳐봐야겠어요. ^^
잠자냥님 덕분에 <어느 하루>도 도서관에서 대여해왔는데 이걸 다 언제 읽을지....ㅋㅋㅋㅋ

잠자냥 2019-01-05 17:3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그렇게 쌓여가는 거죠. ㅋㅋㅋㅋㅋ

케이 2019-01-07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이 소설 제가 너무 싫어하는 일본 남자 작가들의 여자 묘사가 있을 거 같아서 읽기 싫어지네요. 모든 여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고 몸도 아주 쉽게 주면서 또 떠날때는 아무 미련 없이 훌쩍 떠나주는 일본 소설 속 무수한 여자 주인공들에 대해 읽는 거 너무 싫었거든요. (대부분 또 얼굴도 예쁨 ㅋㅋ)
가만 보면 이 정도면 절대 존엄이다 생각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그려졌던 거 같아요. 남자처럼 분노하고 질투하고 주도적이고, 어쩌면 남자보다 더 강한 면도 가지고 있는.
역시 아무나 대단한 소설가 되는 거 아니란 생각 다시 하게 됩니다.

잠자냥 2019-01-07 14:1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 바로 그거랍니다! (‘여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고 몸도 아주 쉽게 주면서‘) 하루키 작품이 거의 그렇잖아요? 근데 이 작품 남주인공이 어떤 면에서는 하루키 작품 남주인공스럽다능. ㅋㅋ 가끔 보면 몇몇 일본 남자작가들은 현실에서 자기가 못 이룬 꿈을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나 싶기도 해요. 이 작품은 좀 애매하네요.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은데 그렇다고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뭐한...

케이 2019-01-0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쓴이가 자기 열등감이나 한없이 찌질한 모습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쓰면 오히려 작가가 멋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글쓴이가 자기 글을 통해 대리만족하거나 멋져 보이고 싶어하는 게 은연중 보이면 오히려 글쓴이가 참 딱하게 느껴지니 아이러니합니다.
저는 자신의 은밀하고 추한 모습까지 다 고백한 작가의 용기에 더 감동을 받는 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잠자냥님!

잠자냥 2019-01-07 16: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오늘도 케이 님 댓글에서 여러 가지 배웁니다.
케이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