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델로의 단편은 영화를 보는 듯하다. 짧은 단편들인데도 한 편 한 편 읽노라면 눈앞에서 생생한 캐릭터들이 잔뜩 나오는 이탈리아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등장인물은 주로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소박한 이들이며, 그들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안타깝고 연민 가득한 그런 영화 말이다. <어느 하루>를 다 읽고 나면 왜 그의 작품에서 영화 같은 느낌을 받는지 곧 깨닫게 된다. 극작가로 널리 알려진 피란델로는 생전에 250여 편에 이르는 단편소설을 남겼다. 그 가운데 <어느 하루>에 실린 9편은 모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라고 한다. 아하, 비밀이 거기 있었구나! 더욱이 그의 유명한 희곡 중에는 단편소설을 개작한 작품이 많단다.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한다. 피란델로의 머릿속에서 단편 소설은 애초부터 하나의 영상처럼 그려졌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희곡작품으로 개작하기에도, 영화로 만들기에도 좋았던 것은 아닐까.
사실, <어느 하루>의 첫 번째 단편인 ‘미차로의 까마귀’를 읽었을 때는 루이지 피란델로의 매력을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어느 양치기가 절벽에서 까마귀 한 마리를 붙잡아 마을로 데려오면서 시작한다. 정작 잡아온 까마귀로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양치기는 기념으로 방울을 달아준 뒤 까마귀를 풀어준다. 방울을 달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오르는 까마귀. 그런데 이 녀석은 방울 소리를 내면서 하필이면 어느 농부의 빵을 훔쳐 먹는다. 그러려니 하면 그만일 것을, 이 농부는 까마귀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는 까마귀에게 자기 뜻대로 한방 멋지게 먹였을까? 이 이야기는 다분히 우화적이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모든 작품이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하면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갔다(그리고 이 단편집을 모두 읽고 나면 이 작품이 왜 서두에 위치해 있는지 알게 된다).
두 번째 작품인 ‘또 다른 아들’을 읽으면서 나는 피란델로의 세계로 서서히 빠져 들어갔다. 아,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어! 조금씩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노파 마라그라치아는 아들 둘이 아메리카로 떠난 뒤 혼자 부랑자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유일한 기쁨이라면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인데, 글을 모르는 그녀는 마을의 과부 닌파로사에게 늘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토록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도 떠난 아들들로부터는 답장 한 번 없다. 그래도 노파는 오늘도 닌파로사에게 편지를 부탁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편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다! 어찌된 일일까? 편지의 비밀과 함께 이 노파의 굴곡진 삶이 드러나면서 뜻밖에도 커다란 비통함을 마주하게 된다. 진실을 알고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 노파의 모습에서 인간은 어쩌면 비참한 현실에서도 꿈꾸기를 멈추지 못하는 존재는 아닐까 숙연해지기도 한다.
세 번째 작품인 ‘달의 저주’는 자신을 늑대 인간이라 믿는 농부와 이 사실을 모르고 그와 결혼한 신부의 이야기로, 첫 번째 작품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고, ‘또 다른 아들’과는 더더욱 다르다. 알고 보니 피란델로는 소설 속 공간에 따라 크게 ‘시칠리아 이야기’와 ‘로마 이야기’ 두 가지를 썼는데,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주로 고풍스럽고 토속적인 분위기로 미신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존재감이나 현대의 비극을 초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단다. ‘달의 저주’는 그야말로 토속적이면서도 미신적인 세계를 담으면서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을 날카롭게, 그러나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달의 저주’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인 표제작 ‘어느 하루’도 초현실적인 이야기로, 매우 짧은 분량인데도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실수였는지 몰라도, 돌연 누군가에 의해 잠에서 깬 나는 어느 간이역에 멈춰 선 기차 밖으로 내던져졌다. 한밤중이고, 내 수중엔 아무것도 없다. (‘어느 하루’. 94쪽)
이렇게 시작하는 ‘어느 하루’는 기차에서 잠들었다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간이역에서 내던져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꿈과 환상, 정신착란과 환각 등 시공간을 벗어난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는 기이한 일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는 온갖 일을 겪고 난 뒤 순식간에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항아리’는 가장 많이 알려진 피란델로의 단편 중 하나로, 수많은 버전으로 연극 무대에 올라졌을 뿐만 아니라 영화와 발레극으로도 재현됐다고 한다. 익살스럽고 재미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꽤 철학적이어서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주 돈 롤로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귀한 항아리는 마련했는데, 그만 그 항아리가 둘로 쪼개지고 만다. 어쩔 줄 모르던 그는 신통방통한 고무접착제를 발명한 땜장이 디마를 불러와 항아리를 원래대로 고쳐주면 값을 후하게 쳐주겠다고 말한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만 받았던 디마는 드디어 자신의 기술을 뽐낼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신나게 항아리를 붙인다. 이윽고 항아리는 감쪽같이 새것처럼 붙는다. 그런데 아뿔싸 이를 어쩌나? 디마는 자신이 항아리 안에 들어간 채 붙이고 만 것이다. 항아리를 깨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디마와 항아리를 절대로 깰 수 없다는 돈 롤로. 이들의 대립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 상황에서 돈 롤로에 비해 디마의 체념은 조금 빠른 편인데, ‘디마는 진정됐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이 별난 사건에 재미를 느꼈고, 이를 불행한 사람들 특유의 슬픈 유쾌함으로 웃고 있었다.’는 구절에서 피란델로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나면서 서글픈 웃음을 짓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단편집의 백미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작품 ‘유모’와 ‘침묵 속에서’이다. 그의 다른 작품은 읽지 않더라도 이 두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유모’의 주인공 안니키아 또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여인으로,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이웃에게 맡기고 시칠리아에서 로마로 유모살이를 하러 떠난다. ‘로마’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 작품은 다분히 현실적이고 그 안에서 이 힘없는 여인의 삶을 비극적으로 그려나간다. 안니키아는 오래전부터 아가씨로 모시던 에르실리아가 막 출산을 하자 그 갓난아이의 유모로 마지못해 고향을 떠난다. 에르실리아는 사회주의사상에 경도된 변호사 모리와 결혼했는데, 신혼인데도 그들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 모리는 사회주의사상의 인도적인 관점에 매료된 상태이지만, 사실 그는 위선적인 부르주아일 뿐이다. 순박한 안니키아를 보고도 ‘그 무지몽매함을 참을 수 없어’하고, ‘노예근성이 이렇게나 깊게 뿌리박힌 시칠리아의 최하층민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식을 불어넣는 게 가망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빠져들 뿐이다. 이런 부르주아 인텔리의 위선은 이 작품 끝에 가서 절정에 달하는데, 안니키아의 비극을 앞에 두고도 모리는 방관자적 태도로 멀거니 지켜만 본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비극을 사회주의자 모임 회담 주제로 삼기로 하고는, 기계적으로 글을 쓸 뿐이다. 그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습에 분노를 느끼면서 안니키아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지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게 된다.
마지막 작품인 ‘침묵 속에서’는 근면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늘 칭찬받던 소년 ‘체사리노’가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는 요즘 무슨 일인지 공부에 통 집중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체사리노. 그는 이제껏 아버지를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어떤 사람인지 도통 알지 못한다. 집안에는 아버지의 사진 한 장 없고 어머니는 그에게 단 한 번도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는 종일 어머니 얼굴을 보지 못해 어머니 또한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늘 바쁜 어머니. 잠시도 지칠 줄 모르는 어머니는 그렇게 많은 일을 한 덕분에 체사리노가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이 소년에게 삶은 고독하고 적막할 뿐이다. 그런데 이 고독하고 적막한 생활일지언정 어머니 곁에서 계속 학교에 다니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갑자기 그에게 기숙사 입학을 제안하고, 체사리노는 그대로 따른다. 그리고 어느 날, 기숙사로 전해온 어떤 소식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한껏 상처받기 쉬운 열여덟 체사리노 앞에 닥친 가혹한 인생의 무게에 한숨짓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를 열렬히 응원하게 된다. ‘침묵 속에서’는 인생의 슬픔, 기쁨, 비극이 모두 담겨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끝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193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지 피란델로는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 내 작품에는 모든 사람에 대한 쓰라린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이 아홉 편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그의 단편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이 단편집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