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영화 한편을 봤다. <인생 후르츠>. 사실 이 영화를 내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 12월에 개봉했을 때는 완벽하게 관심 밖의 영화였다. 영화 포스터 속 해맑게 웃는 노부부의 모습과 ‘인생 후르츠’라는 제목이 거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백년해로한 노부부의 삶을 중심으로 인생에 대해 적당히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어떤 깨달음을 전하려는 진부한 이야기려니 했다. 일본 영화라서 왠지 더 뻔해보였다. 나는 1950~60년대 일본영화 황금기에 만들어진 영화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등 현대의 몇몇 감독 작품이 아닌 이상 일본 영화를 굳이 찾아서 보게 되지는 않는다. 일본 영화, 드라마 느껴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오글거림이나 ‘에~?’ 하면서 놀라는, 지나치게 과장된 액션에 거부감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 친구에게 영업당해 결국 보게 되었다. 친구도 별로 없는 나로서는 주변 인물 두 사람이 강력하게 이 영화를 추천하니 <인생 후르츠>에 정말 뭐가 있는 게 아닐까 살짝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좋을 것 같다나. 무엇이 이토록 그들을 이 영화에 빠지게 한 것일까. 그래, 어디 보자 싶어 팔짱을 끼고 스크린을 주시한다.

영화가 시작하자 반가운 배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 일본의 어느 도시. 흔하디흔한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가운데 유독 나무로 우거진 작은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여느 집과 달리 이 집은 마당에 빼곡하게 온갖 채소와 과일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 채소들과 나무를 가꾸는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가 이윽고 등장한다. 하루 종일 밭을 일구고 열매를 따고 그렇게 딴 열매와 채소로 온갖 음식을 만드느라 쉴 틈 없이 분주하다.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한데 이 노부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그들이 90세와 87세, 둘이 합쳐 177살 고령의 나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60년 이상 함께 하며, 40년 넘는 세월 동안 이 집에 살면서 과일 50종과 채소 70종을 키우는 노부부.

할아버지 ‘슈이치’는 노란 팻말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와 식물이름을 일일이 적으면서 귀여운 그림과 함께 짧은 문구도 덧붙인다. ‘작은 새들의 옹달샘, 와서 마셔요.’ ‘능소화, 붉은 꽃의 터널을 지나보세요.’ ‘작약, 미인이려나?’ ‘여름밀감, 마멀레이드가 될 거야.’ 등등. 솔직히 처음에는 할아버지의 팻말에 ‘귀엽네’, 미소 지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음 역시, 오그라들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밭을 일구고 마당을 가꾸는 모습과 함께 키키 키린의 음성으로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그리고 천천히’ 이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서서히 열려간다.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는 건축가로 1960년대에 나고야 시 교외 아이치현 고조지 뉴타운 설계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 그는 마을에 숲을 남겨 바람이 통하고 숲이 살아있는, 자연 친화적인 마을을 꿈꾸었지만 자신의 건축 도면대로 도시는 조성되지 않고 개발 논리에 밀려 아파트 숲을 이루게 된다. 이에 낙심한 것일까. 그 뒤로 그는 자신이 하던 일과 거리를 둔다. 1970년대에 고조지 뉴타운 집합주택에 입주했던 슈이치 가족은 5년 뒤에 뉴타운 안에 300평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겠다고 마음먹는다. 집마다 한사람씩 숲을 조성한다면 결국 도시 전체가 숲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뉴타운의 민둥산 다카모리 산도 츠바타가 1970년대에 그 지역 초등학교에 제안해서 1만 개의 도토리 묘목을 심게 된다. 그리고 지금 그 산은 잘 자란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 되었다.

이 부부의 반평생을 9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지켜보노라면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는 이 명확한 자연의 이치가 결국 우리 삶의 이치와도 다르지 않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 무엇을 하든 ‘차근차근, 천천히 스스로’ 이 말 또한 그렇다. 처음에는 허허벌판이던 300평의 땅이 이제는 나무와 풀로 우거진 숲을 이루고 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차근차근 천천히 그렇게 자라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두 부부의 손으로 조금씩 일군 공간. 뉴타운 조성 시기에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어차피 세상은 다 그렇지’하고 평범한 건축가로 살아갔다면 아마 츠바타 슈이치의 삶은 제대로 열매 맺은 기분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건축가 ‘츠바타 슈이치’인가 싶기도 하지만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가 없었다면 그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결코 그럴 수 없었으리라. 젊은 시절부터 아내가 뭘 하든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 남편, 그런 남편을 믿고 또 완벽하게 지지하면서 함께 그 길을 간 아내. 이 두 부부의 모습에서 진정한 ‘동반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에서는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들이 천천히 차근차근 빚어낸 집과 삶은 말 그대로 ‘보석상자’처럼 빛난다. ‘오래 살수록 인생은 아름다워진다.’는 말 또한 잊히지 않는다. 아마 이 두 사람처럼 산다면, 오래 살수록 인간이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지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 영화는 앞으로 다가올 노년에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 내 인생의 열매를 어떻게 맺을 것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게 한다. 몇몇 장면에서는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울컥 나기도 하는데, 영화를 볼 이들을 위해 그건 비밀.


<인생 후르츠> 앓이 중인 친구는 이 노부부의 삶을 다룬 책 <밭일 1시간, 낮잠 2시간>도 사서 완전히 푹 빠져있던데, 영화를 보고 나니, 나도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게 되더라. 이제 책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틈틈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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