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내 옷장에 걸려 있는 옷가지처럼 바로 곁에서 낡은 감수성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새로운 감수성을 포기하지 않기.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105쪽)
내일 모레는 수전 손택의 생일이다. 손택은 1933년 1월 16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손택의 생일 즈음, 그녀의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기쁨이다. 이 책은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손택의 30~40대, 정확히는 31세부터 47세까지의 일기와 메모를 담고 있다. 보통 서른에서 사십대 후반까지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황금기에 해당한다. 적당히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육체적으로도 활발하며, 한창 일하고 성공으로 나아갈 시기. 실제로 이 시기의 수전 손택은 작가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절정기를 누렸다. 손택은 1963년 첫 소설 「은인」을 출간했고, 이듬해 「캠프 관한 단상」을 발표, 본격적으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해석에 반대한다>, <은유로서의 질병>을 비롯한 평생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는 그 무렵의 기록으로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등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전 손택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을 엮은 손택의 아들 데이비드 리프는 엮은이의 글에서 재미난 표현을 쓴다. 일기의 첫 권에 해당했던 <다시 태어나다>가 빌둥스로만(Bildungsroman), 즉 일종의 성장 소설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는 손택이 정력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성년기의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14세 때부터 30세까지의 일기를 담은 <다시 태어나다>에서 손택은 지적, 성적 갈망으로 들끓는 청춘의 방황과 목마름을 놀라울 만큼 솔직하게 써 내려갔다. 데이비드 리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몹시 의식적으로 자아를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창조, 아니 재창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에서는 작가로서의 위대한 성공 과정을 그리면서, 그 무렵 어울렸던 각계각층의 작가, 예술가, 지식인과의 만남을 담고 있다. 또한 어린 시절 꿈꾼 그대로,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여행할 수 있는 여력, 이 모든 걸 얻었음에도 ‘여전히 열렬히 배우는 학도’로서의 모습을 담담하지만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일기와 두 번째 일기는 어조부터가 크게 다르다. 첫 일기 <다시 태어나다>는 ‘솔직’ ‘진솔’ ‘뜨거움’ 그 자체다. 그 무엇에도 여과되지 않은 청춘의 날것 그대로 생생함이 베어 있다면 두 번째 일기는 날것의 감정보다는 담담한 독서 목록과 인용문, 관조적인 여행기들과 정치적 단상들이 주를 이루며 일종의 응축된 사유의 아포리즘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조는 변했을지언정 10대에서 20대 내내 뜨겁게 고민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모습은 여전하다. 손택은 서른이 넘어서도 치열하리만치 읽고 쓰고 보고 듣고 감상한다. 책, 영화, 회화, 음악, 오페라, 연극 등 온갖 문화예술에 대한 열의와 갈망은 이 두 번째 일기에서도 그칠 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한 것들이 그녀를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리고 그것들을 한 지식인으로서, 또 사상가로서 생각하고 투쟁하고 향유하는 성숙한 어른의 일상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독서와 영화 목록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취향과 사유의 깊이는 수전 손택의 글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흐뭇하게 볼 수 있다.
위대한 예술은 아름다운 단조로움이다-스탕달, 바흐(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다르지) / 팝 아트: 오로지 부유한 사회에서만 가능한 예술. 그래야 아이러니한 소비를 즐길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영국에 팝 아트가 있는 거다- 하지만 스페인에는 없다. 그곳에는 여전히 소비가 너무 진지하니까(스페인에서 회화는 추상이 아니면 사회적 시위의 리얼리즘이다) / 죽음=철저히 사람 머릿속에 있음. 삶=세계 / “나”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 권리는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 내가 겪은 가장 심오한 체험은 질책보다는, 무관심이다. / 모든 행위는 타협이다(사람이 원하는 것+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타협)/ 자신감-인간에 대한 한 가지 요점은 인간이 ‘결코’ 가면을 벗어 던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언제나 믿음직하고, 매력적이고, 친절하고 기타 등등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경험’을 그에 대해 ‘알게’ 되는 사실로 상쇄할 수 없다는 말이다.
회화는 오브제다. 음악은 퍼포먼스다. 그러나 책은 암호다. 그건 생각들+이미지들로 옮겨 쓰여야 한다. / 19세기는 퇴행하는 음악으로 가득하다(즉 베토벤 이후면서도 후기 베토벤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 그럼에도 대단한 발전을 이른다. -예. 슈베르트-슈베르트는 생전에 실질적으로 ‘선율’의 가능성을 소진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베르트의 후계자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말러, 슈트라우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는 건 마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또는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비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사진이 예술인가? 아니면 그냥 영화의 사생아, 혹은 사산아인가?
위와 같은 구절들이 매 페이지마다 쏟아지는 이 책은 읽는 내내 곳곳에 밑줄을 치며 그 사유에 감탄하고 잠시 멈춰서 그 문장을 곱씹게 된다. 이런 번득이는 사유의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 때문에 고통받고 실연으로 상심한 손택을 만날 수도 있다. 첫 번째 일기를 통해 본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으나 그럼에도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잘 유지하는 법에 서툴렀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연인과의 관계에서 힘들어 하던 그녀의 모습은 서른을 넘어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불처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잃고 극심하게 고통받는다. 끊임없이 사랑하듯이 글쓰기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멈추지 않는다. ‘문제: 내 글의 ‘얄팍함’. 문장 하나하나가 취약하다. 너무 건축적이고, 너무 만연체고’라는 구절에서는 새로운 글쓰기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위대한 작가도 혼자서는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손택이 자신을 묘사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타인의 일기를 남몰래 엿보는 쾌감(?)까지 느껴진다.
손택은 자신을 이렇게 묘사한다.
키가 크다 / 저혈압 / 잠이 아주 모자란다. / 순수 정제 설탕이 갑자기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 술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다. /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 / 단백질에 극심하게 의존하는 식성 / 아주 튼튼한 위장-역류성 식도염, 변비 따위는 없다. / 높은 곳을 좋아한다. / 기형적인 사람을 보는 걸 좋아한다.(관음증) / 이빨을 잘근잘근 깨물어 씹는다. / 이 갈기 / 프릴뢰즈(Frileuse, 뜨거운 여름을 좋아하고, 추위에 아주 약하다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38쪽)
읽어야 할 책, 읽은 책, 들어야 할 음반, 본 영화, 볼 영화 목록 등이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에는 빼곡하다. 그 리스트를 따로 적어서 갖고 다니면서 손택이 보고 듣고 읽은 영화, 음악, 책들을 모조리 따라서 누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손택이 문학이나 책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는 동공이 커진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들에 나오는 강박적 시선은 (억압된) 에로틱 의식이다. / 가장 위대한 주제: 자아의 초월을 추구하는 자아(<미들마치>, <전쟁과 평화>) / 카프카 “진지한” 문학 최후의 스토리텔러. 거기서부터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들 헤매고 있다(그저 그를 모방할 뿐)’ ‘일 년(13살 때) 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언제나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죽는 게 너무나 두려웠고- 오로지 그 책에서만 어떤 위로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죽는 순간 만질 수 있게 언제나 갖고 다니고 싶었다.’
영어로 쓰인 최후의 훌륭한 소설들
포드 매덕스 포드, <훌륭한 병사>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밤은 부드러워>
E.M. 포스터, <인도로 가는 길>
윌리엄 포크너, <팔월의 빛>
과도기적 소설들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듀나 반즈, <나이트우드>
이탈로 스베보, <제노의 고백>
어니스트 헤밍웨이,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너대니얼 웨스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145~146쪽)
이런 구절들을 보면 아주 오래 전에 읽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명상록>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영어로 쓰인 최후의 훌륭한 소설들’ 목록에서 이미 내가 읽은 책 제목을 발견하면 왠지 모를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져 슬며시 웃게 된다. 아, 올해는 포크너를 본격적으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의 두 번째 일기는 이제 서른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앞으로도 어떤 목록들과 사유의 흔적이 나타날지 기대가 된다. 아마도 정치적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며 투쟁하는 손택의 모습이 그려지리라. 손택은 말한다. ‘내 흥미를 끄는 유일한 변신은 철저한 변신이다.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난 ‘모든 걸’ 바꿔 놓을 사람이나 예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원한다.’고. 그토록 뜨겁게 매 순간 읽고 보고 쓰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기에 오늘날의 그녀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손택의 글과 날카로운 지성,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에는 아낌없이 몸을 던져 행동하며 살고자 노력했던 모습을 사랑한 이들이라면 이 일기는 여전히 축복으로 다가올 것이다. 앞으로 출간될 마지막 일기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