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라토 칸타빌레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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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과 여백을 읽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권태로 가득찬 삶이 마치 죽음으로 완성되듯이....’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읽을 것. 거기에 와인 한 병을 천천히 비우면서 읽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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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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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에덴의 동쪽>을 읽고 홀딱 반했던 존 스타인벡. 정말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읽었다. 이런 작품도 있었나? 일단 놀란다. 작품 배경은 ‘통조림‘골목이다. 그 자체로 많은 걸 뜻한다. 통조림처럼 싸구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이들의 웃프면서 따뜻한 이야기. 닥을 비롯한 캐릭터들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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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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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때때로는 진짜보다 더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Science Fiction은 소설이라는 거짓말의 세계에서도 한층 더한 거짓말로 이루어진다. 거짓말쟁이 중에 으뜸 거짓말쟁이랄까. 그렇지만 SF는 ‘어차피 이건 다 거짓말이야, 다들 알지?’ 말하면서 현실보다 더한, 현실에서는 차마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할 진실한 세계를 담아낸다. ‘이건 거짓말이니까 믿지 마’라고 상대의 마음을 허물어놓고 현실에서 그 누구도 쉽사리 꺼내지 못할 이야기들을 건넨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이 담고 있는 세계가 그렇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읽어보라. 그 누가 이 이야기를 거짓말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제목부터가 그렇다. 제목만 본다면 누구라도 ‘아니, 이런 제목의 작품이 어쩌다가 이 SF 단편모음집에 실린 거지? 잘못 실린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틀림없이 ‘Science Fiction’이다. 그런데 몇 장만 넘겨보아도 그 안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진짜보다 더한 진실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참혹하리만치. 이 책의 첫 번째 작품인 종이 동물원」에 마음을 빼앗긴 채, 거의 모든 작품마다 감탄하며 읽어가다가 이 마지막 작품에서는 켄 리우라는 작가, 그의 시선과 열정에 사뭇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시간여행은 이제 이런 SF장르에서는 너무나도 흔한 소재이다. 새롭지 않은, 매우 익숙한 거짓말이라 ‘에, 또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좀 새로운 거짓말을 해봐!’ 하는 생각까지 든다.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겠는가? 이 질문을 받고 당신은 지금 어느 아름다운 과거의 한때를 떠올렸는가? 그런데 시간여행을 제안한 사람이, 그저 한 개인의 일상적인 삶,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이 아니라,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참혹한 순간으로 가보자고 말한 것이라면? 예를 들어 히틀러에 의해 수많은 유대인이 희생당한 아우슈비츠 현장이거나, ‘아시아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731부대가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생체실험을 자행한 현장이라면? 당신은 과거로 돌아가 그 현장을 목격할 의향이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그 현장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다. 이 작품에 묘사된 장면만 보고도 솔직히 나는 힘들어서 책을 읽다가 전철에서 내려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그런데 누가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굳이 그 부대의 잔학 행위를 직접 두 눈으로 보려고 하겠는가.

켄 리우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통해 그 끔찍한 역사를 다시 불러온다. 이 작품에서 그런 시간여행이 가능하게 만든 ‘에번’과 ‘기리노’처럼 기계를 통해 그 과거를 직접 볼 수 있게 하지는 않지만 ‘글’로써 우리 눈앞에 그 과거를 재현한다. 이 작품은 일본 고대사 전문가인 에번과 그의 아내이지 저명한 물리학자인 기리노가 발명한 기술을 통해 과거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미래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의 ‘역사 갈등’을 다룬다. 다큐멘터리 영화 형식으로 각국 정부 관계자 및 학자, 731부대 희생자 유족 등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진행된다. 731부대의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한편, 관련자의 증언과 일본의 로비, 미국 정치계의 대립 등을 거의 현실과 똑같이 구성해서 작품을 읽는 내내 ‘이건 픽션’이 아니라는 생각이 여러 차례 들게 한다.


물론 그 소재는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전히 ‘그 일’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구는 각국의 여러 관계자가 존재하고, 또 그들이 만들어낸 ‘진짜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떠벌리는 사람들은 그냥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 왜, 2차 대전 때 일본군한테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매춘부들처럼.”(「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 )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켄 리우 스스로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이야기’라고 말했음에도 그의 단편집이 일본에서 출간될 때 이 작품은 수록되지 않았으며, 중국 또한 공산당에 비판적인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삭제한 채 불완전하게 출간됐다고 한다. 동북아시아 4개국 가운데 이 작품을 완전한 형태로 출판한 나라는 대만과 한국뿐이라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Fiction’임에도 일본과 중국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이 거짓말의 형태를 빌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도 남으리라.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하니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의 모든 작품이 그런 게 아닐까 지레 겁먹거나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는 싫다고 고개 돌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담하건데 <종이 동물원>에 실린 모든 작품은 환상적일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나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다.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한편으로도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준 종이동물들이 그때는 생생히 살아 움직이다가, 엄마와 소원해지면서 동물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설정은 자칫 지나치게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곧 ‘아빠는 엄마는 카탈로그에서 골랐다’라는 문장을 마주하는 순간, 이 마법 같은 이야기 속에 ‘무언가’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단순히 마법으로 이루어진 ‘환상’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중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의 정체성의 혼돈, 어머니의 굴곡진 역사와 삶, 그리고 ‘사랑’때문에 마지막에 가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법’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진실’ 그 자체이다.

이 책 내내 이런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편 전쟁 직후 서양 열강에 침탈당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여우 요괴가 등장하고 그 요괴를 사냥하는 사냥꾼도 나온다. 미국인 소녀와 중국인 점술가의 우정을 그린 「파자점술사」에서는 2·28 사건처럼 굵직한 대만 현대사를 동시에 담고 있다. 일본이 미국과 손을 잡고 태평양 횡단 해저 터널을 만들어 대공황을 타개, 식민 지배를 이어간다는 가상의 역사를 소재로 한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를 비롯해, 소행성 충돌로 멸망한 지구를 뒤로 하고 살아남은 인류가 우주선 한 척에 올라 외계로 나아가는 미래를 그린 「모노노와레」 등 가상현실과 실제 역사의 기억을 절묘하게 배치한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다가 어느 순간 ‘툭’하고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하드보일드 느와르를 보는 듯한 느낌인「레귤러」도 기억에 남는다.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을 여성 사립탐정이 해결해 간다는 설정도 예사롭지 않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보조 장치로, 법집행 기관에서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가상의 장치 ‘레귤레이터(regulator)’라는 아이디어도 흥미롭다. 다른 작품에서도 간간이 엿보였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는 켄 리우의 여성관이 잘 드러나는데,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낸다는 점, 넓은 포용력으로 상처를 지닌 다른 이들을 끌어안는다는 점 등등 주로 긍정적인 면이 많아서 켄 리우를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 ‘좋은 작가군’에 넣게 된다. 비단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뿐만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 엄청나게 공부하고 성실한 자세로 꼼꼼하게 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러면서도 쉽게 읽히고 아름답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점점 켄 리우, 그가 궁금해지고, 그 감정은 호감에 가깝다.

중국에서 태어나 열한 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계 미국인 켄 리우. 그런 정체성 때문인지 「종이 동물원」처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도 있으며 중국과 홍콩 대만 등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의 한 조각을 다룬 이야기도 많다. 인류의 역사, 즉 거시적인 기억은 물론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 한 인간의 역사를 다룬 이야기도 많다. 이렇듯 켄 리우는 기억을 재현하고 보존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작품에서 ‘기억 같은 거 어차피 먹지도, 마시지도, 입지도 못하잖아요’(「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중)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는 왜 이토록 인류의 기억 또는 한 개인의 기억에 집착할까? 아마도 이 또한 작품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만약 사람들이 과거를 보고 들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을 거라’(「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중)는 말처럼……. 켄 리우는 SF라는 ‘거짓말’의 세계, 이야기의 힘을 빌려,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진실’을 전하는 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별 다섯 개가 아닌 여섯 개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당신이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바로 <종이 동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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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17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제목이 자주 눈에 밟히던 책이라 궁금했는데 별 여섯 개를 주고 싶다는 잠자냥님 글 보니 읽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았습니다! ^^ 장르 소설 별로 좋아라 하지 않는데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읽고 장르소설도 이렇게 아름답고 문학적일 수 있구나 감탄했었거든요. 왠지 <종이 동물원>도 그런 느낌을 받을 것 같네요. ^^

잠자냥 2019-01-17 12:45   좋아요 1 | URL
저도 장르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는데, 몇몇 장르 소설은 ‘장르 소설‘이라는 말로 한정짓기에는 좀 억울한 작품이 있더라고요. 켄 리우의 <종이 호랑이>는 틀림없이 그런 작품입니다. 그가 앞으로 쓸 작품들도 그럴 거 같고요. 그리고 이 작가는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게 아니라, 습작 시기도 길고 그동안 쓴 작품도 어마어마한 것 같더라고요. 노력형 작가인 것 같아 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케이 2019-01-1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알라딘에서 나에게 추천했던 작품인데 제가 평소 읽던 책과는 거리가 멀어서 망설이고 있었어요. 전쟁 배경인 소설을 읽으면 너무 심각하게 정신에 타격을 입는지라, 고민되긴 하는데 잠자냥님께서 이렇게 대단하다고 하시니 읽어보고 싶네요.
그리고 자기네한테 불리한 소설을 빼고 출판한 이웃국 일본의 치졸함에 다시한번 분노합니다. 정말 웃기는 작자들 아닌가요. 과거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고 때문에 일어난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잖아요. 근데 왜 역사를 계속 부정하는지.
일본 니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역사가 바뀌진 않는다고 생각해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잠자냥 2019-01-17 14:23   좋아요 1 | URL
저도 사실 이 작품은 읽을까말까 하던 중이었는데, 전자책 사면 받을 수 있는 증정품이 탐나서 구매했거든요. 안 샀으면, 안 읽었으면 정말 후회할뻔 했습니다.
일본처럼 그렇게 역사를 부정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이 있으니, 켄 리우가 ‘기억‘을 계속 환기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하루빨리 모든 게 잊히기를 바랄 테니까요.
어쨌든 <종이 동물원>은 꼭 한번 읽어보세요. 케이 님은 왠지 ‘종이 동물원‘, ‘파자점술사‘, ‘시뮬라크럼‘ 같은 작품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실제로 어떤 작품을 인상 깊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ㅎㅎ

레삭매냐 2019-01-1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을 가지고 책인데
멋진 리뷰를 써주셔서 참고가 많이
된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 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19-01-17 14:24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 이라는 이름으로 홀대(?)받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서 열렬히(?) 썼습니다. ㅎㅎ
네~ 틀림없이 흥미롭게 읽으실 거예요~!

카알벨루치 2019-01-1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읽는 기계 같으셈!!!ㅋㅋ그리고 글쓰는 기계 ㅋㅋㅋㅋ🥰

잠자냥 2019-01-17 15:27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소설 리뷰 AI 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9-01-17 16:18   좋아요 1 | URL
4차산업혁명이 눈앞에 이렇게 빨리 알라딘 속에 들어왔군요 햐~ㅋㅋㅋㅋㅋ
 
[eBook]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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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진짜 환상적이다! SF도 이토록 사람 마음을 울릴 수 있구나. 기억과 언어, 정체성, 역사를 모두 아우르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 안에는 모두 ‘인간‘이 있다. ‘켄 리우‘ 그의 이름을 마음에 새겨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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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내 옷장에 걸려 있는 옷가지처럼 바로 곁에서 낡은 감수성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새로운 감수성을 포기하지 않기.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105쪽)


내일 모레는 수전 손택의 생일이다. 손택은 1933년 1월 16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손택의 생일 즈음, 그녀의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기쁨이다. 이 책은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손택의 30~40대, 정확히는 31세부터 47세까지의 일기와 메모를 담고 있다. 보통 서른에서 사십대 후반까지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황금기에 해당한다. 적당히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육체적으로도 활발하며, 한창 일하고 성공으로 나아갈 시기. 실제로 이 시기의 수전 손택은 작가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절정기를 누렸다. 손택은 1963년 첫 소설 「은인」을 출간했고, 이듬해 「캠프 관한 단상」을 발표, 본격적으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해석에 반대한다>, <은유로서의 질병>을 비롯한 평생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는 그 무렵의 기록으로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등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전 손택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을 엮은 손택의 아들 데이비드 리프는 엮은이의 글에서 재미난 표현을 쓴다. 일기의 첫 권에 해당했던 <다시 태어나다>가 빌둥스로만(Bildungsroman), 즉 일종의 성장 소설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는 손택이 정력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성년기의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14세 때부터 30세까지의 일기를 담은 <다시 태어나다>에서 손택은 지적, 성적 갈망으로 들끓는 청춘의 방황과 목마름을 놀라울 만큼 솔직하게 써 내려갔다. 데이비드 리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몹시 의식적으로 자아를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창조, 아니 재창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에서는 작가로서의 위대한 성공 과정을 그리면서, 그 무렵 어울렸던 각계각층의 작가, 예술가, 지식인과의 만남을 담고 있다. 또한 어린 시절 꿈꾼 그대로,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여행할 수 있는 여력, 이 모든 걸 얻었음에도 ‘여전히 열렬히 배우는 학도’로서의 모습을 담담하지만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일기와 두 번째 일기는 어조부터가 크게 다르다. 첫 일기 <다시 태어나다>는 ‘솔직’ ‘진솔’ ‘뜨거움’ 그 자체다. 그 무엇에도 여과되지 않은 청춘의 날것 그대로 생생함이 베어 있다면 두 번째 일기는 날것의 감정보다는 담담한 독서 목록과 인용문, 관조적인 여행기들과 정치적 단상들이 주를 이루며 일종의 응축된 사유의 아포리즘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조는 변했을지언정 10대에서 20대 내내 뜨겁게 고민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모습은 여전하다. 손택은 서른이 넘어서도 치열하리만치 읽고 쓰고 보고 듣고 감상한다. 책, 영화, 회화, 음악, 오페라, 연극 등 온갖 문화예술에 대한 열의와 갈망은 이 두 번째 일기에서도 그칠 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한 것들이 그녀를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리고 그것들을 한 지식인으로서, 또 사상가로서 생각하고 투쟁하고 향유하는 성숙한 어른의 일상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독서와 영화 목록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취향과 사유의 깊이는 수전 손택의 글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흐뭇하게 볼 수 있다.


위대한 예술은 아름다운 단조로움이다-스탕달, 바흐(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다르지) / 팝 아트: 오로지 부유한 사회에서만 가능한 예술. 그래야 아이러니한 소비를 즐길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영국에 팝 아트가 있는 거다- 하지만 스페인에는 없다. 그곳에는 여전히 소비가 너무 진지하니까(스페인에서 회화는 추상이 아니면 사회적 시위의 리얼리즘이다) / 죽음=철저히 사람 머릿속에 있음. 삶=세계 / “나”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 권리는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 내가 겪은 가장 심오한 체험은 질책보다는, 무관심이다. / 모든 행위는 타협이다(사람이 원하는 것+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타협)/ 자신감-인간에 대한 한 가지 요점은 인간이 ‘결코’ 가면을 벗어 던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언제나 믿음직하고, 매력적이고, 친절하고 기타 등등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경험’을 그에 대해 ‘알게’ 되는 사실로 상쇄할 수 없다는 말이다.

회화는 오브제다. 음악은 퍼포먼스다. 그러나 책은 암호다. 그건 생각들+이미지들로 옮겨 쓰여야 한다. / 19세기는 퇴행하는 음악으로 가득하다(즉 베토벤 이후면서도 후기 베토벤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 그럼에도 대단한 발전을 이른다. -예. 슈베르트-슈베르트는 생전에 실질적으로 ‘선율’의 가능성을 소진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베르트의 후계자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말러, 슈트라우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는 건 마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또는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비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사진이 예술인가? 아니면 그냥 영화의 사생아, 혹은 사산아인가?


위와 같은 구절들이 매 페이지마다 쏟아지는 이 책은 읽는 내내 곳곳에 밑줄을 치며 그 사유에 감탄하고 잠시 멈춰서 그 문장을 곱씹게 된다. 이런 번득이는 사유의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 때문에 고통받고 실연으로 상심한 손택을 만날 수도 있다. 첫 번째 일기를 통해 본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으나 그럼에도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잘 유지하는 법에 서툴렀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연인과의 관계에서 힘들어 하던 그녀의 모습은 서른을 넘어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불처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잃고 극심하게 고통받는다. 끊임없이 사랑하듯이 글쓰기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멈추지 않는다. ‘문제: 내 글의 ‘얄팍함’. 문장 하나하나가 취약하다. 너무 건축적이고, 너무 만연체고’라는 구절에서는 새로운 글쓰기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위대한 작가도 혼자서는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손택이 자신을 묘사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타인의 일기를 남몰래 엿보는 쾌감(?)까지 느껴진다.

손택은 자신을 이렇게 묘사한다.
키가 크다 / 저혈압 / 잠이 아주 모자란다. / 순수 정제 설탕이 갑자기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 술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다. /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 / 단백질에 극심하게 의존하는 식성 / 아주 튼튼한 위장-역류성 식도염, 변비 따위는 없다. / 높은 곳을 좋아한다. / 기형적인 사람을 보는 걸 좋아한다.(관음증) / 이빨을 잘근잘근 깨물어 씹는다. / 이 갈기 / 프릴뢰즈(Frileuse, 뜨거운 여름을 좋아하고, 추위에 아주 약하다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38쪽)

읽어야 할 책, 읽은 책, 들어야 할 음반, 본 영화, 볼 영화 목록 등이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에는 빼곡하다. 그 리스트를 따로 적어서 갖고 다니면서 손택이 보고 듣고 읽은 영화, 음악, 책들을 모조리 따라서 누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손택이 문학이나 책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는 동공이 커진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들에 나오는 강박적 시선은 (억압된) 에로틱 의식이다. / 가장 위대한 주제: 자아의 초월을 추구하는 자아(<미들마치>, <전쟁과 평화>) / 카프카 “진지한” 문학 최후의 스토리텔러. 거기서부터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들 헤매고 있다(그저 그를 모방할 뿐)’ ‘일 년(13살 때) 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언제나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죽는 게 너무나 두려웠고- 오로지 그 책에서만 어떤 위로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죽는 순간 만질 수 있게 언제나 갖고 다니고 싶었다.’


영어로 쓰인 최후의 훌륭한 소설들
포드 매덕스 포드, <훌륭한 병사>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밤은 부드러워>
E.M. 포스터, <인도로 가는 길>
윌리엄 포크너, <팔월의 빛>

과도기적 소설들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듀나 반즈, <나이트우드>
이탈로 스베보, <제노의 고백>
어니스트 헤밍웨이,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너대니얼 웨스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145~146쪽)



이런 구절들을 보면 아주 오래 전에 읽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명상록>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영어로 쓰인 최후의 훌륭한 소설들’ 목록에서 이미 내가 읽은 책 제목을 발견하면 왠지 모를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져 슬며시 웃게 된다. 아, 올해는 포크너를 본격적으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의 두 번째 일기는 이제 서른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앞으로도 어떤 목록들과 사유의 흔적이 나타날지 기대가 된다. 아마도 정치적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며 투쟁하는 손택의 모습이 그려지리라. 손택은 말한다. ‘내 흥미를 끄는 유일한 변신은 철저한 변신이다.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난 ‘모든 걸’ 바꿔 놓을 사람이나 예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원한다.’고. 그토록 뜨겁게 매 순간 읽고 보고 쓰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기에 오늘날의 그녀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손택의 글과 날카로운 지성,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에는 아낌없이 몸을 던져 행동하며 살고자 노력했던 모습을 사랑한 이들이라면 이 일기는 여전히 축복으로 다가올 것이다. 앞으로 출간될 마지막 일기 또한.



















그나저나 판형이 조금 달라졌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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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케이 2019-01-14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혈압인거랑 뜨거운 여름을 좋아하고, 추위에 아주 약하다는 건 저랑 비슷하네요. (그러나 여름을 좋아하는 저도 한국의 작년 여름은 죽을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 여름 중 택하라면 주저없이 여름이긴 해요.)
프릴뢰즈라는 단어 신기해서 찾아봤어요. 이런 여자를 칭하는 단어도 있다니 신기하네요!
판형 달라지는거 전에 있던 판형 가지고 있으면 책꽂이 꽂을때 좀 짜증나던데.
딴 얘기지만 저는 가끔 그런 생각해요. A4 용지마냥 책도 정한 사이즈가 있어서 모든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이 어느 정도는 분류가 됐으면 좋겠단 생각...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ㅋㅋ (왠지 독일 같은 나라는 그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 들기도 하네요. )

수전손택 이라는 인물 저는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는데 잠자냥님 덕분에 알게 됐어요.
월요일에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1-14 14:25   좋아요 1 | URL
저혈압, 여름... 등등 하하하. 손택의 일기가 케이 님도 돌아보게 했군요! ㅎㅎ
저도 이번에 이 책 사고 나서 첫 번째 일기집 꺼내보고 당황했어요. 디자인만 보고는 판형 똑같을 줄 알았는데 ㅠ_ㅠ 나란히 꽂아두면 이상한 모양이 되는;;; 에휴. 심지어 본문 글자 크기도 좀 달라졌더라고요. ㅠ_ㅠ 그래도 이후 출판사가 열악한(왠지 열악한느낌이에요) 환경 속에서도 수전 손택 책 계속 꾸준히 내주니까 참기로 했어요.;; 이러다 마지막 일기 판형은 또 다르게 나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ㅋㅋㅋㅋ

수전 손택 읽어보시면 아마 그 매력적인 글쓰기와 지적 사유에 푹 빠지게 되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처음 읽기에는 <타인의 고통> 이나 <사진에 관하여>, <은유로서의 질병> 등이 상대적으로 다른 책보다는 수월하실 거라고 생각되네요. <해석에 반대한다>,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강조해야 할 것>등은 주로 책, 영화, 회화, 오페라, 연극 비평에세이라 그녀가 다루고 있는 원 텍스트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좀 재미없을 수 있거든요.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이나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처럼 소설/희곡 작품도 있는데요. 손택 자신은 소설가로 불리기를 가장 원했지만, 제가 보기에 손택은 소설(문학작품)보다는 에세이 쓰는 재주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9-01-14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나서 중고서점에서 손택을
책을 검색 중입니다 :>

그런데 다들 사가셨는지 당최 보이질
않네요... 아까비 -

집에 쟁여둔 책을 읽어야 하나 봅니다.

잠자냥 2019-01-14 18:13   좋아요 0 | URL
손택 책은 중고 서점에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아마 책을 사서 읽은 분들이 팬심 가득한 이들이라 잘 내놓지 않는 게 아닐까 싶네요. 책값도 비싼 편이라 중고로 나와도 크게 싼 느낌도 들지 않더라고요. ㅎㅎ 암튼 조만간 발견하게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