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갔어야 했다 쏜살 문고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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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독자를 사로잡는지, 또 그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영리한 작가, 다니엘 켈만. 그의 다른 작품도 모두 읽어 보고 싶어진다. 짧지만 정말 강렬하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을 집어든 순간 단숨에 끝까지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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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와 애드거 앨런 포. 두 이름을 나란히 놓고 보니 참으로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도가와 란포라는 필명은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포의 이름에서 자신의 필명을 따온 것에서 알 수 있듯, 란포는 탐정물이나 판타지, 괴담, 범죄, 호러 등 장르를 넘나들며 일본 추리소설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파노라마섬 기담> 또한 확실히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안에서 직접 포의 ‘아른하임의 영토’가 등장한다.

가난한 삼류작가 히로스케는 신이 만든 대자연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신이 되어 아름다움의 극치인 지상낙원을 만들고자 늘 몽상에 잠겨 있는 인물이다. 히로스케는 자신의 몽상의 기원을 언급하는데, 그중에서도 ‘에드거 앨런 포의 <아른하임의 영토>가 더욱 그를 매혹’했다고 말한다. 포의 ‘아른하임의 영토’는 온갖 조원술을 동원해 만든 지상낙원 ‘아른하임’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이다. 히로스케가 포의 아른하임을 언급하는 이 장면은 그가 아른하임 같은 이상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에도가와 란포가 포의 작품에서 착안해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되, 그보다 더 강렬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남기고 싶다는 바람으로도 읽힌다.
 
히로스케는 마치 음악가가 악기로, 화가가 물감으로, 시인이 문자로 예술을 창조하듯이 생동하는 자연을 재료 삼아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몽상에 빠져 있다. 그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평생 써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돈을 손에 넣는다면……. 우선 광대한 대지를 사들일 텐데, 어디가 좋을까,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부려 내가 늘 꿈꿔온 지상낙원이자, 미의 나라, 꿈의 나라를 만들어 보이겠어.’ 이건 이렇게 하겠다는 둥 저건 저렇게 하겠다는 둥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신의 머릿속에 완전한 이상향을 구축해 낸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몽상일 뿐이다. 현실의 히로스케는 처량하기 그지없어서 하루하루의 생활도 여의치 않은 일개 가난한 학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수완으로는 평생을 바쳐 죽도록 일해 봐야 겨우 몇 만 엔도 모으기 힘들 지경이다. 게다가 ‘보통 몽상가 기질의 사내라 하면 예술에 심취하여 거기서 작게나마 안식처를 발견하기 마련인데, 불행히도 히로스케는 예술적 성향을 가지기는 했지만 지독한 현실주의자여서 몽상 말고는 어떤 예술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할뿐더러 재능조차 없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하루 무기력 속에 실현 불가능한 상상만 하던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때부터 외골수처럼, 미친 듯이 계획을 향해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꿈은 마침내 이루어진다. 무인도인 ‘먼바다섬’을 통째로 사들여 막대한 공사비를 들여서 파노라마섬을 완공하는 것이다. 그저 골방에 처박혀 헛된 꿈만 꾸는 이 무명 작가가 어떻게 그런 이상향의 극치인 파라다이스를 만들 수 있을까? 의아한데, 가장 큰 비밀은 그와 쌍둥이처럼 닮은 대학동창생 고모다 겐자부로의 죽음에 있다. 겐자부로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그는 기가 막힌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파노라마섬 기담’은 히로스케의 몽상, 겐자부로의 죽음 뒤 그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으로 옮기는 장면, 마침내 파노라마섬이 완공된 부분, 그리고 그 섬을 히로스케가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묘사하는 장면,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히로스케의 몰락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과정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기에 정신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더군다나 히로스케가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라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는다. 이 작품에서 그나마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부분은 히로스케가 완성된 파노라마섬을 돌아보면서 그 섬의 온갖 진귀하고도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마치 하나의 파노라마 필름을 보듯이 끊임없이 기괴한 이미지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장면은 조금 장황하기도 해서 이 작품이 처음 선을 보였을 때는 지루하리만치 세세한 묘사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묘사로 란포의 장기인 그로테스크하고도 에로틱한 분위기를 마음껏 엿볼 수 있다. 또한 눈앞에 재현된 환상을 통해 히로스케의 탐욕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장면들을 읽노라니, 애드거 앨런 포의 ‘아른하임의 영토’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집에 있던 <우울과 몽상>을 펼쳐 읽어보았다.
















야심을 경멸하는 것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본질적인 원칙 중 하나라는 자신의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음악가도 시인도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높은 단계의 천재는 반드시 야심적이지만, 그보다 더욱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은 야심이라고 불리는 것을 초월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밀턴보다 훨씬 더 위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문 무명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들로 하여금 취향에 맞지 않는 노력을 하도록 유혹하는 몇 가지 우연한 사건이 없었다면, 한껏 예술의 영역에서 인간이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찬란한 성취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울과 몽상>, ‘아른하임의 영토’, 98~99쪽)


위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이 ‘아른하임의 영토’는 ‘파노라마섬 기담’과는 사뭇 다르다. 대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인공적으로 가꾼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그들이 저마다 빚어낸 이상향의 모습은 완벽하게 다르다. ‘아른하임의 영토’의 주인공인 앨리슨은 애초부터 부자인데다가 엄청난 유산까지 상속받는다. 보통 사람들의 재산을 훨씬 초과하는 부를 소유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즉 당대의 갖가지 방종 행각에 흥청망청 빠져들거나, 정치적 음모를 꾸미거나 혹은 귀족 작위를 돈으로 사거나, 미술품을 수집하거나, 혹은 문학이나 과학이나 예술의 아낌없는 후원자 노릇을 하거나, 자신의 이름으로 온갖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등등. 그런데 앨리슨은 음악가도 시인도 되지 않는다.  그는 풍경과 정원을 가꾸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뮤즈 신에게 가장 숭고한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지고한 아름다움의 형태가 결합된 끝없는 상상력이 펼쳐지는 영역이었다. 또한 그가 생각하기에 이 결합에 들어가는 요소들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꽃과 나무의 다양한 색깔과 형태 속에서, 그는 물질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한 자연의 역동적인 섭리를 본다. “지상에서 식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즐겁게 하기.”(<우울과 몽상>, ‘아른하임의 영토’. 99쪽) 이것이 앨리슨의 목표였다.

그래서 앨리슨은 평범한 인생에서 벗어나,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이러한 환상을 실현하는 데 바치면서 행복을 찾는다. 자신의 계획을 혼자 감독함으로써 트인 공기 속에서의 자유로운 움직임 속에서,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목표에서, 그의 영혼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정열과 아름다움에의 갈망을 만족시킨 영원한 동기에서 그는 행복을 찾았다. 때문에 ‘아른하임의 영토’의 앨리슨이 만들어낸 지상낙원은 ‘보는 사람에게는 그저 풍요로움, 따뜻함, 고요함, 한결같음, 부드러움, 섬세함, 우아함, 풍성함과 같은 느낌’과 함께 ‘부지런하고, 취향이 세련되고, 멋지고, 까다로운 새 요정의 꿈에서 나타날 듯한, 놀랍도록 발달한 문화에서 볼 수 있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히로스케의 파노라마섬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예술 세계를 구현하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는 서로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 히로스케의 파노라마 세계는 끔찍함 그 자체이다. 자연을 깡그리 무시하고 비정상적인 취향을 가미해 온갖 인공적 기교를 부려놓은 공간이다. 맹수와 독사로 가득한 동산, 숨 막히는 향기와 인간 세계의 수치를 잊어버린 나체 남녀, 그리고 섬 중앙에서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거대한 파노라마 풍경 등등. 이 기묘한 세계는 인간 세계의 상식에서 벗어나 어느덧 끝없는 몽환의 경계를 헤매게 만든다. 히로스케와 함께 이 섬을 둘러본 지요코가 느끼듯이 ‘현실 세계는 모두 먼 옛날의 꿈만 같고 부모와 자식, 부부, 주종 같은 인간 세계의 관계 따위는 안개처럼 의식 밖으로 희미해지고 만다.’



“언젠가 이 파노라마를 발명했다는 프랑스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적어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의 의도는 이 방법으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었다지. 마치 소설가가 종이 위에, 배우가 무대 위에, 저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싶어 하듯이 틀림없이 그 사람도 자신의 독특한 과학적 방법으로 그 작은 건물 안에 광막한 별세계를 만들려고 시도한 거야.”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 89쪽)


히로스케는 세상에 없는 이상향을 만들고자 이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운다. 애초부터 세상에서 자기 설 자리를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그는 비뚤어진 방법으로 이상향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고자 더더욱 그릇된 길을 택한다. 억눌리고 비뚤어진 욕망으로 빚어낸 세계는 ‘별세계’이기보다는 악몽과도 같다. 에도가와 란포는 ‘이 세상은 꿈, 밤에 꾸는 꿈이야 말로 진실’이라고 말했다. 밤에 꾸는 꿈, 그 악몽과도 같은, 그러나 어쩌면 그렇기에 날것의 욕망을 고스란히 재현한 ‘파노라마섬 기담’은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 ‘아른하임의 영토’에서 출발했으나 그 작품보다 몇 배는 충격적이고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룩한 란포. 만일 애드거 앨런 포가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내 작품보다 훌륭하오.’하며 박수를 쳐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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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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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단단하고 다정하며 깊은 글들. 큰 목소리로 주장하지 않으며 강요도 권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조곤조곤 삶을 풀어나간 그녀의 글들. 그 글에서 쉽지 않은 이 인생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또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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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1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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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만화. 75세에 처음 우연히 어쩌다 BL만화에 빠진 할머니와 BL만화 덕후이지만 그 밖에 모든 것에는 서툰 17세 여고생의 우정이라는 설정이 흥미로워서 읽기 시작. 완간되지 않은 만화, 1년 뒤에나 나올지 모를 만화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심정에 순간 서늘해졌다. 다음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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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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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때문에 ‘머리말’부분은 일단 넘어가고 본문이라고 생각했던 부분, 그러니까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부터 펼쳐서 읽어갔다. 그런데 시를 조금 읽다 보니(물론 나보코프가 쓴 시라고 생각하면서) 뭔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창백한 불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머리말’을 훑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이 ‘머리말’은 <창백한 불꽃>이라는, 나보코프의 작품 전반에 대한 설명이려니 했다. 그래서 ‘찰스 킨보트’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비평가가 <창백한 불꽃>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려니 생각하면서 읽어 나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는 존 셰이드라는 시인의 작품으로, 그는 이 시를 중간 크기의 색인 카드 80장에 썼단다. 그 구절에서 나는 아쭈? 요것 보게? 하는 심정이 들면서 슬며시 웃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히 나보코프 그 자신의 이야기잖아! 나보코프가 색인 카드에 작품을 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더더군다나 ‘머리말’을 읽어갈수록 ‘찰스 킨보트’ 그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가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평가라면, 머리말을 이렇게 쓸 리가 없다. 이렇게 객관성을 상실한 채, 작품을 비평할 리가 없다. 게다가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말투도 어디선가 많이 본 느낌이다. 그의 말투에서는 <롤리타>의 수다꾼 ‘험버트’가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어둠 속의 웃음소리>의 ‘알비누스’ 같기도 하며 <절망>의 ‘게르만’과도 닮았다. 수다스럽고, 자아도취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미치광이 같기도 한 ‘찰스 킨보트’. 그는 나보코프 작품 속 주인공들과 매우 닮았다. 그래서, 그제야 이 책 <창백한 불꽃>은 ‘머리말’과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 ‘주석’, ‘색인’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작품임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탄성이 나온다.

‘머리말’에서 킨보트는 제안한다, 존 셰이드의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를 읽으면서 자신이 쓴 방대한 주석을 보라고, 아니 자신이 쓴 주석을 먼저 읽고 나서 셰이드의 시를 읽으라고 권한다. 물론 시를 읽어 가면서 그때그때 주석을 읽을 수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 읽을까 하다가 내가 평소에 책 읽는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보통 어떤 책을 읽을 때 흐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주석을 읽지 않는다. 그래서 <창백한 불꽃>도 셰이드의 시를 읽고 난 다음에, 킨보트의 주석과 색인을 읽는 방식을 택했다. <창백한 불꽃>은 주석도 작품을 이루는 하나의 큰 구성요소이기에, 아니 이 기나긴 주석 자체가 이 작품의 핵심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것을 읽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색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무엇을 먼저 읽느냐에 따라 <창백한 불꽃>의 해석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셰이드의(그러나 실은 나보코프가 쓴)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는 굉장히 난해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시가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시간과 자연에 대한 명상과 뒤섞어서 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셰이드 자신의 삶을 일대기적 형식으로 엮었으며, 작품을 통해서 시인의 딸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기나긴 시, ‘창백한 불꽃’은 존 셰이드라는 시인의 삶을 일종의 영웅서사시처럼 써내려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창백한 불꽃’에 주석을 달고 편집한 킨보트는 이 시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내 해석과 얼마나 비슷할지 비교하려는 생각과 함께 주석을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사람 좀 보게? ‘이런 주석이 대체 어디 있어!’ 소리치고 싶을 정도다. 제 아무리 난해한 시를 풀이한다고 해도, 주석에는 일종의 룰이 있기 마련이다. 원 텍스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킨보트의 주석은 지나치리만큼 텍스트에서 벗어난 이야기들로 이루어진다. 그의 해석을 읽어갈수록 ‘정말?’하고 반문하게 된다. 킨보트의 주석은 크게 3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나처럼 존 셰이드 시인 그 자신의 삶과 관련해서 풀이하는 방식이 첫 번째이다. 킨보트는 셰이드와 관련한 전기적 정황과 아내 시빌과 그의 죽은 딸 헤이즐 등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시를 파악하고자 한다. 물론 이 첫째 방법에서 셰이드와 킨보트 둘 사이의 관계도 그려진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킨보트는 과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둘째는 ‘젬블라’라는 어느 옛 왕국의 마지막 왕 ‘카를 크사베리에’ 얽힌 이야기이며, 마지막으로 이 국왕을 죽이려고 하는 ‘그라두스’라는 사내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킨보트는 이 세 가지 관점으로 주석을 달아 셰이드의 시를 설명해 나간다. 셰이드와 킨보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다쳐도 난데없이 젬블라와 그라두스는 누구이며, 대체 이 사내는 무슨 근거로 이런 과대망상 같은 해석을 하는 걸까 싶은데, 알고 보면 이 모두는 킨보트에게 매우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였음을 ‘주석’을 읽어나가는 동안 알게 된다.

‘머리말’에서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던 이 남자, 킨보트에 대해서는 ‘주석’을 읽어나갈수록 의혹이 더욱 커진다. 과연 그가 하는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혹시 그는 문학에 미친, 존 셰이드라는 시인에 미친 스토커이자 미치광이, 관음증 환자는 아닐까? 이 모든 것은 그의 망상에서 비롯된 허구 중의 허구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고매한 우정을 나눴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셰이드는 킨보트를 그다지 반가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따돌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시인의 이 골치 아픈 이웃은 줄곧 셰이드를 따라다니면서 그에게 어떤 문학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고(실제로 자신이 그러고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혔으며), 시인은 그런 그가 안쓰러운 나머지 마지못해 이따금 만나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애초에 ‘머릿말’에서도 그런 기미는 조금 엿보였다. 킨보트는 ‘우리의 친밀한 우정은 더욱 고상한, 오로지 지적인 차원에 기반했기에 감정적인 번민을 나누는 일 없이 자유로웠다’ 말하며 셰이드에 대한 존경은 킨보트에게 일종의 고산 치료였으며 이 늙은 시인을 볼 때마다 킨보트는 웅대한 산을 바라보듯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셰이드를 숭배하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여기 그가 있다. 저것은 그의 머리다. 주변의 합성 젤리 같은 두뇌와는 질적으로 다른 두뇌가 그 속에 차 있다.’(<창백한 불꽃>, 34쪽) 그런데 셰이드를 향한 킨보트의 이런 광적인 숭배를 지켜보노라면 어느 작가와 그의 작품에 미친 독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영화 <미저리>에서 소설가 '폴'과 그의 작품에 완전히 꽂혀 광기어린 행동을 서슴지 않는 ‘애니 윌크스’의 그 무시무시한 얼굴이 킨보트의 얼굴에 중첩되는 것이다.

실제로 킨보트는 자신이 셰이드에게 직접적으로 영감을 불러일으켜줬고, 시를 쓸 주제를 그에게 줬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그에게 영웅시격을 제안함”, “그 탈주 사건을 다시 이야기해줌”, “내 집의 조용한 방을 쓰라고 권함”, “내 육성을 녹음해두었다가 활용하는 것을 의논함”, ‘내 이야기의 석양빛이 셰이드가 3주 만에 천 행의 시를 쓸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창조적 활력을 발휘하는 과정에 촉매제 역할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등등 난리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킨보트가 셰이드에게 영감을 준 주제이자 소재가 ‘젬블라 왕국의 마지막 왕’에 대한 이야기라고 믿기에 셰이드의 시를 ‘젬블라 왕국’과 관련해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시인에게 아낌없이 제공한 ‘생동감 넘치고 매혹적인 가슴 두근거리고 일렁이듯 반짝이는 모든 소재’로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은 충동과 작업 중인 그가 보고 싶어 달뜬 욕망’에 시달리고 심지어 그런 상태를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어서 시인의 집을 몰래 엿보는 데 온 정신을 쏟기도 한다. 이틀 밤사이에 그를, 셰이드의 집을 훔쳐보기를 ‘삼천구백구십번’씩이나 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 셰이드나 그의 아내 시빌이 킨보트를 반길 리가 없다. 실제로 킨보트는 셰이드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으며, 그가 열두 번도 넘게 초대했으나 셰이드 부부는 오직 세 번만 응할 뿐이다(이 마저도 의심스럽지만). 어디 그뿐이랴, 시빌은 노골적으로 킨보트를 싫어하고 불신한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킨보트를 가리켜 “코끼리만한 진드기, 킹사이즈 말파리, 남미종 말파리 유충, 천재에 붙어먹는 괴물 같은 기생충”이라 부르곤 했다는 것을 나중에 킨보트는 알게 된다. 셰이드조차 킨보트가 자신이 쓰고 있는 시에 대해 궁금해 하고 질문을 던지면 교묘하게 샛길로 빠져나간다. ‘지난 너댓새 동안 그가 젬블라 왕의 모험을 정확히 어느 부분까지 집필했는지 신경질적으로 집요하게 통제 불능으로 궁금해 하는’ 킨보트를 피하기 바쁘다. 심지어 셰이드에게 시의 주제를 줬다고 말하는 킨보트에게 셰이드는 “무슨 주제?”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렇듯, 킨보트가 시인에게 영감을 줬고, 셰이드의 시가 자신이 사랑해마지 않는 젬블라 왕국에 대한 이야기라는 그의 주장 모두가 한 늙은 시인을 사랑하고 문학에 미친 어느 불쌍한 망명자의 망상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창백한 불꽃>을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이 독자에게 던지는 하나의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일 뿐이다. 이토록 복잡한 장치와 킨보트라는 믿을 수 없는, 시인과 문학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망상증 환자와도 같은 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그리고 셰이드라는 시인과 그의 시를 통해 나보코프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앞서 이야기했듯, 이 책은 읽는 방식과 순서 따라, 수많은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내가 읽은 방식으로는 텍스트 생산자와 그것을 비평하는 자 사이의 불협화음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킨보트라는 편집자이자 주석자- 셰이드의 시를 비평한 독자이자 비평가인 그의 태도와 그가 풀이한 해석을 읽노라면, 과하다 못해 과연 대체 무엇을 위한 비평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오래전에 잊힌 신화 또는 전설과도 같은 젬블라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먹이며, 시인의 삶을 그다지 많이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그의 생, 그의 고통 모두를 다 안다는 듯한 태도로 그의 시 ‘창백한 불꽃’을 난도질하듯 풀이하고 자아도취적인 주석을 달고 있는 독자이자 비평가인 ‘킨보트’. 그는 셰이드로 상징되는 나보코프 같은 시인이자 소설가 또는 모든 예술가들이 가장 경계하고 멀리하고 싶은 인물은 아닐까? 그래서 나보코프는 어떤 예술 작품을 느끼기보다는 난도질하면서 기이하리만치 과하게 풀이하는 비평가들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자 일침을 날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셰이드와 킨보트의 대화에서 이런 추측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학생들의 과제물에 대해 셰이드는 자신은 “대개 아주 너그러운 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런 그조차 용서할 수 없는 몇 가지 사소한 것들이 있는데, “읽으라는 책을 읽지 않는 것. 읽긴 읽되 바보천치 같이 읽는 것. 그 책에서 상징, 예를 들어 ‘작가는 녹색이 행복과 좌절의 상징이기 때문에 녹색 잎이라는 뚜렷한 이미지를 사용했다.’ 따위나 찾는 것”이 그중 하나이며 그는 “학생이 ‘단순하다’ ‘진실하다’라는 표현을 칭찬의 의미로 사용하면 점수를 파국적으로 깎아버리”곤 한다. “예를 들면 ‘셸리의 문체는 매우 단순하고 훌륭하다’라든지 ‘예이츠는 항상 진실하다’ 같은 해석”도 셰이드가 진저리치는 일로 그가 보기에 “이런 해석은 아주 만연해 있어서, 어떤 비평가가 어떤 작자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 비평가나 작가 모두 바보란 걸 알 수 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러므로 나의 이런 해석 또한 한 사람의 독자로서 킨보트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 또한 ‘읽긴 읽되 바보천치 같이 읽’어서 나의 이런 풀이 또한 <창백한 불꽃>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의미를 거의 모두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창백한 불꽃>은 다 읽고 나면 이 작품의 진짜 화자는 누구일까 하는 새로운 의문까지 치솟지 않는가. 킨보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창백한 불꽃’을 쓴 셰이드가 창조해낸 인물은 아닐까? 아니, 이와 정 반대로 셰이드라는 시인 자체가 킨보트가 창조해낸 인물은 아닐까? 만일 킨보트가 실제로 존재하되, 그의 정체가 러시아 망명자 보트킨이라면 이야기는 또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기에 킨보트는 작품 말미에 “다른 변장과 다른 외관으로 꾸밀지도 모르지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캠퍼스에서 그 어떤 명성도, 미래도, 청중도, 그의 예술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늙고 행복하고 건강한 이성애자 러시아 망명 작가로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말하며 이 작품이 “세 명의 주역, 즉 상상 속의 왕을 죽이려는 미치광이와 자신이 왕이라고 상상하는 또 다른 미치광이 그리고 우연히 사선으로 굴러 들어와 두 허상 간의 충돌로 죽는 저명한 노시인이 등장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신파극”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와 주석으로 이루어진 소설, 색인과 머리말까지 갖춘 소설, 주석에 담긴 몇 가지나 되는 이야기들…….<창백한 불꽃>은 여러 번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고, 그때마다 새롭게 읽힐 것 같다. 셰이드의 경고처럼 바보 같은 해석을 할지라도 말이다. 셰이드 숭배자 킨보트는 “시인에 의해 정화된 진실은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으며 진정한 예술은 거짓된 명예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그리고 ‘참된 예술은 일반인의 눈으로 지각되는 보통의 사실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것만의 특별한 사실성을 창조하는 법’이라고도. 이 두 구절은 나보코프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얻고자 했던 바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이룩한 <창백한 불꽃>의 진실이 아닐까. <창백한 불꽃>은 소설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온갖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며, 허구의 불꽃으로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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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03-15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리뷰는 잠자냥님이예요!

잠자냥 2019-03-15 22: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_ _)

케이 2019-03-2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소설을 이런 방식으로 쓸 수도 있군요. 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지 나보코프 참 대단하네요!!

잠자냥 2019-03-22 14:13   좋아요 0 | URL
직접 읽으면 더 감탄하실 거예요! 나보코프는 천재임에 틀림없어요. ㅎㅎ

로아나 2019-03-23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구를 가장한 진실의 불꽃도 있고 진실을 가장한 허구의 불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