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여왕 아니 에르노, 그녀의 고백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사건> 출간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이번에는 자신의 임신 중절 경험을 글로 쓴 것이다. 대단하다, 용감하다, 놀랍기 짝이 없다. 많은 에르노의 책이 그렇듯이 이 책 또한 매우 짧다. 집중해서 읽는다면 한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분량. 그러나 이 책은 장담하건대 낙태, 여성의 자발적 임신 중단에 관한 그 어떤 책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시작부터 강력하다. 그녀는 병원을 향하고 있다. 병원 가는 길을 묘사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묻는다. ‘병원을 나설 때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일까.’ 병원 대기실에 도착해 접수를 하고 주위를 돌아본다. 병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머리가 벗어진 삼십 대 남자, 젊은 흑인 남자, 주름진 얼굴의 오십 대 남자. 금발 여자, 임신해서 배가 나온 여자와 정장 차림의 남자…. 응? 이상하다. 산부인과에 이렇게 남자가 많아? 의아할 즈음, 그녀가 찾은 병원은 산부인과가 아니라 에이즈 검사를 위해 찾아간 곳임을 알게 된다. 아,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할 즈음 그녀는 에이즈 음성 판정을 받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선다. 그러다 문득, 그때의 그 일을 떠올린다. ‘1963년 지금과 똑같은 공포와 불신 속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의사의 판정을 기다렸던 순간’을…….


7월의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 섹스하는 몸의 움직임과 사정, 여러 달 동안 잊고 있었던 이 장면 때문에 나는 여기 있었다. 벗은 두 몸이 얼싸안고 움직이는 자세가 죽음의 춤처럼 여겨졌다. 보채는 바람에 다시 만나기로 했던 그 남자는 오로지 내게 에이즈 바이러스를 주고자 이탈리아에서 온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를 하는 몸짓과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정자, 이 모든 것을 내가 병원 대기실에 있다는 사실과 결부시킬 수는 없었다. 무엇도 섹스와 연결시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11쪽)


벗은 두 몸이 얼싸안고 움직이는 자세가 죽음의 춤처럼 여겨졌다는 그녀. 병원 대기실과 섹스를 도무지 연결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아니 에르노이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섹스는 곧 병원 대기실과 연관된다. 1963년 10월 내내 그녀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생리가 시작되기를 일주일 넘도록 기다리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다. 팬티에 비친 피를 볼 수 있기를 내내 바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러 가도 온통 생리 생각뿐이다.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사르트르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 <닫힌 방>을 보러 간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생리 생각뿐이다. 그날 그녀는 연극을 본 뒤 수첩에 이렇게 쓴다. ‘멋지다. 내 안의 이런 현실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정치학과 학생인 P와 여러 차례 섹스했다. 위험한 시기임을 알 때도 자신의 배 속에 ‘그것이 생길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과 쾌락을 누리며 내 육체가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 게 잘못일까?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게 그녀의 오산인가? 두 사람이 사랑과 쾌락은 똑같이 즐겁게 누리는데, 왜 그 결과는 아니 에르노, 그녀, 여성 혼자만 이토록 고통 속에서 전전긍긍해야 하는가? 극장에서도, 연극을 보면서도 공부를 하다가도 팬티에 피가 맺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심정을 함께 섹스를 하며 즐기던 그 남자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와 진료 약속을 잡는다. 그 와중에도 여느 때처럼 부모님 댁에 가서도 혹시 부모에게 임신 사실을 들킬까봐 두려움 속에 떤다. 마침내 산부인과에 가고, 진료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의사는 임신이 틀림없다면서 명랑하게 웃음 지으며 그녀에게게 말한다. “사생아는 늘 예쁘더군요.” 오마이갓! 이게 과연 할 소리인가? 그녀는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온다. 그날 수첩에 이렇게 적는다. ‘임신 끔찍하다.’ 출산예정일은 1964년 7월 8일. 그녀는 임신 진단서를 찢어 버린다.

절반의 책임이 있는 P에게도 사실을 알린다. 아기를 갖고 싶지 않다고, 임신 중절을 결정했노라고. 이 소식에 그는 크나큰 안도감을 느끼고 무사태평한 생활로 돌아간다. 그 뒤로 모든 문제 해결은 그녀만의 몫이다. 1963년, 임신 중절이 불법인 시절이다. 그녀는 이 시절을 떠올리면 그 몇 달은 흐릿한 불빛에 잠겨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끊임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시절. 이때를 떠올리면 ‘출항’이나 ‘선악의 저편’ ‘밤 끝으로의 여행’ 같은 문학 작품 제목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노라고 말한다. 지금도 여전히 소설에서 중절 일화를 읽으면 마치 말들이 순식간에 폭력적인 감각으로 변화해 버린 듯, 이미지도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충격 속으로 빠져든다고. 그 시절 듣곤 했던 노래를 우연이라도 듣게 되면 당혹감에 사로잡힌다고.

임신을 확진 받은 이후의 삶은, 생리를 기다리던 때보다 더 지옥이다. 예전처럼 문학과 사회학 수업을 듣고, 학생 식당에 가고, 학생들만 다니는 바에서 커피를 마시지만 이제 그들과 자신은 다른 처지이다. 그들과 자신은 더는 같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들, 그리고 내’가 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속했던 계급을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원치 않는 임신을 함으로써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듯하다. ‘그때 내 안에서 자라나던 무언가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상황을 가리켜 ‘임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저 수첩에는 ‘이것’, ‘이런 것’이라고 쓸 뿐이다.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 없는 그녀. 고민 끝에 장 T.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는 유부남인데다가 ‘피임의 자유, 가족계획과 관련한 비합법적인 협회’의 일원이기에 그녀에게 어쩌면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이다. 그는 누구와, 그리고 언제 임신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아내가 있음에도 그녀에게 섹스를 제안한다. 오마이갓! 그에게 그녀는 임신함으로써 ‘섹스 제안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알 수 없는 여자의 범주에서 이제 의심할 여지없이 이미 섹스를 경험한 여자의 범주로 이동한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임신한 상태라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위험마저 없기’ 때문이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일을 당하고도 그녀는 말한다. ‘불쾌한 일화였지만 내 상황에 비춰 보면 어쨌든 하찮은 일’이었노라고.

시간은 흐르고 배 속의 태아는 자라고 그녀는 속수무책이다. 의사를 찾아가 보지만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뒤흔든다. 불법에 누구도 엮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삶은 서서히 부서져간다. 공부를 좋아하고 밝은 미래를 꿈꾸던 총명한 대학생은, 이제 ‘이념의 천국’에는 다가갈 수조차 없다. 다만 ‘그 아래로 구토하며 진창에 빠진 자신의 육신을 질질 끌고 다닐’ 뿐이다. 지식이란 습득해 봐야 결국 무너져 내릴 뿐인 허울 같은 구조물처럼 보일 뿐이고 도저히 논문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한다. ‘논문을 쓸 수 없음은, 보이지 않는 내 타락의 명백한 징표’가 된다. 그녀의 수첩에는 이런 단어들이 적혀 나간다. ‘아무것도 쓸 수 없다. 공부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정상적인 세계에서 배재되었다는 끔찍한 의미, 수치심과 타인들의 비난어린 시선 속에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다.


법은 도처에 있었다. 감정을 꾹 눌러 적은 내 수첩 속에, 장 T.의 튀어나온 두 눈 속에, 이른바 강요된 결혼들에, 영화 속에, 임신 중절을 한 여자들의 수치심과 타인들의 비난 속에도. 언젠가 여자들이 자유롭게 중절을 결정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생각 속에도 법은 있었다. 그리고 늘 그래 왔듯 임신 중절이 나쁘기 때문에 금지되었는지, 아니면 금지되었기에 나쁜지를 규정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31~32쪽)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을 홀로 강구한다. 부모님 댁에서 뜨개질바늘 한 짝을 갖고 기숙사로 돌아와 홀로 낙태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오마이갓! 이런 순간에도 자기 자신에게 가하게 될 고통은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용기를 북돋으며 단단히 마음을 먹기도 한다. 이런 처절한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가엾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는 그놈의 P. 그놈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녀가 홀로 ‘삶과 죽음, 시간, 도덕과 금기, 법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경험, 육체를 통해 극과 극을 오간 경험으로 여겼던 사건’을 겪는 내내 그 절반의 책임이 있는 그놈은 아무 상관없는 타인처럼 무사태평하게 지낼 뿐이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이제는 자기 임신 중절 경험까지 글로 쓰느냐고. 그녀 말대로 ‘모욕과 두려움 그리고 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이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대학교 기숙사 화장실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잉태했던 그 경험을. 그녀가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렇게 글로 써서 밝히는 이유는 하나다. “정의로운 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매번 ‘모든 게 끝났다.’라는 명목으로 이전 희생자들에게 입 다물 것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녀마저 이런 일에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그녀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토록 처절한 ‘사건’을 고백한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38쪽)

이 글을 쓰던 시기에, 코소보 난민들이 칼레를 거쳐 영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한다. 밀항업자들은 엄청난 돈을 요구하고, 때로는 밀항 전에 잠적해 버린다. 그럼에도 코소보 난민을 비롯하여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밀항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다른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밀항업자들을 쫓는다. 삼십 년 전에 임신 중절 시술가에게 그랬듯이 밀항업자들이 존재를 몹시 못마땅해 한다. 누구도 그 존재를 부추기는 법률이나 국제 사회의 명령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치 오래전 임신 중절 시술을 해주었던 이들처럼, 이민자들의 밀항을 돕는 이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더 올바른 이들도 분명 있으리라. (59쪽)


아니 에르노는 살아남아 이 글을 썼지만 불법으로 임신 중절 시술을 받거나 온갖 기이한 민간요법으로 낙태를 시도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린 여성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녀 또한 의사가 아닌 이에게 기이한 시술을 받는 바람에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였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이 글조차 세상에 나올 수 없을 뻔했다. 흔히 태아의 생명과 살 권리를 말하며 낙태를 반대한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권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위해 산 사람의 삶과 목숨을 송두리째 걸어야만 하는 이런 일이 계속되어야 할까? 게다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온갖 낙인은 누가 찍는 것인가? 임신이 여성 혼자 할 수 있는 일인가? 왜 임신의 책임은  여성에게만 짐 지우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에르노의 이 고통스러운, 그러나 진실 가득한 문장은 여성보다 태아의 권리를 앞세워 임신 중절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덧붙여, 이 책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낙태금지법이 발효되던 시절의 미국에서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진 여성과 버려진 아기들을 구제하는 한 의사의 삶을 그린 존 어빙의 <사이더 하우스>도 이 책과 함께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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