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 서울엔 많은 비가 내렸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면 첫눈으로 함박눈이 가득 쌓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비 내리는 늦가을 일요일이니 평소 같았다면, 아니 몇 달 전만 했더라면 나는 집에서 뒹굴뒹굴 누워서 책을 읽다가 자다가 먹다가를 반복하는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물론 그 일요일도 비슷했다. 다만 늦은 오후 4시쯤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 빼고는.
작년에 비해 올해 참 많이 걷고 있다. 하루에 몇 만보를 걷는다는 ‘걷는 사람, 하정우’ 같은 이에 비하면 많이 걷는다고 말하기도 뭣하지만, 작년에 비하면 나는 정말 많이 걷고 있다. 지난 봄, 건강검진 이후로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걷기 시작했지만 날씨가 더워지면서 걷는 일은 확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올 여름이 끝날 즈음에 알라딘에서 ‘독보적’ 서비스를 새로 시작했다. 독보적이란 말 그대로 ‘독서와 보행’을 의미하는데, 책 읽기와 걷기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면 스탬프를 주는 서비스이다. 이 스탬프는 10개를 모으면 알라딘 적립금 500원으로 교환할 수 있다. 10개에 500원이라……. 그리 큰돈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실 이 적립금이 책 읽는 인간을 걷게 만드는 동기는 되지 못한다.
책을 좋아하고, 책 읽기에 빠져 사는 이들이라면 공감할 텐데, 대부분은 걷는 일을 소홀히 하기 쉽다. 책 읽기는 움직임이 가장 적은 정적인 활동인데 비해, 걷는 일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몸을 쓰는 동적 활동이다. 게다가 걸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밖에서 걸으면서 책을 읽기는 쉽지 않으므로(물론 애나 번스 <밀크맨>의 주인공 소녀는 걸으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소싯적의 나 또한 걸으면서 책을 읽기도 했지만 말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밖에서 걷느니, 그 시간에 독서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정신을 살찌우며 몸까지 살찌우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면 안 될 게 있다. 건강을 망치면 책 읽기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건강검진 이후로 몸에서 이런저런 이상 신호를 보내고, 이런저런 병원을 다니게 되니까(허리 디스크 초기 포함), 그러는 동안에는 책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로 국토종주를 떠나거나, 테니스처럼 격한 운동을 즐기는 편이었는데도 건강에는 문제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일상처럼 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전거나 테니스는 시간이나 장소 및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그래서 날마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은 아니다. 그에 비하면 ‘걷기’는 특별한 장비도 필요하지 않고, 시간, 공간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날씨도 그렇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나가면 된다.
‘독보적 서비스’는 베타서비스를 할 때부터 신청해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게 8월말쯤이니 9월, 10월, 11월 석 달 가까이 잘 쓰고 있다. 하루 미션을 완료하기 위해서는 읽고 걸어야 한다. 책 읽기야 매일 하는 것이라서 그리 어려울 게 없는데, 문제는 역시 ‘걷기’- 하루 최소 5천보 이상을 걸어야 한다. 목표 설정은 그 이상부터 가능하다. 나는 일단 5천 걸음으로 설정했다. 마음속으로는 만보 이상 걷자는 게 목표이지만, 스탬프 욕심 때문에 아무래도 설정은 5천보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5천 걸음 걷기도 그리 쉽지는 않다. 회사에 가는 날은 아침저녁 집에서 지하철 이동하는 걸음이 2천 걸음 조금 넘는다. 그래서 나는 점심때도 걷는다. 그러고 나면 저녁에 집에 도착해서 확인하면 5천 걸음을 조금 넘는다. 그런데 욕심이 조금 나서 저녁 먹고 또 걷는다. 4킬로미터 정도 더 걸으면 하루에 만보를 조금 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밤늦게, 북플 독보적 서비스에 접속하면 미션 성공했다고 불꽃을 터뜨리면서 축하해준다. 이 순간은 참 뿌듯하다.

11월에는 미션을 모두 성공하고 있다. 오늘은 날이 꽤 추운데 그래도 걸어야지.
북플 서비스는 ‘읽고, 걷고, 기록하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기록’이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를 말하는데, 나는 이 밑줄 긋기는 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할 것 같지는 않다. 이 서비스가 처음 시작하고 나서 이 밑줄 긋기 서비스 때문에 북플에 접속하면 온통 밑줄 그은 문장들만 죽죽 올라온 적이 있다. 이게 보기 싫어서 나는 한동안 북플에 접속하지 않기도 했다. 심지어 밑줄 그은 문장만 너무 심하게 연달아 올리는 이웃 몇몇은 끊어버리기까지 했다. 책이 스팸 메일처럼 느껴졌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닌지 서재 이웃들이 불만을 터뜨렸고, 알라딘에 이 부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한 사람도 있어서(나도 했다), 알라딘은 곧 이 단점을 보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독보적 랭킹 선정 방식에는 좀 의문이 드는데, 미션 성공여부, 걸음 수, 밑줄 긋기 수 등 독보적 활동을 합산해서 선정하는 이 순위는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밑줄 긋기’에 너무 방점이 찍혀있는 것 같다. 2만 걸음 걷고 책 한 권 읽은 사람과 책 두 권에 밑줄 긋고 5천 걸음 걸은 사람 중 후자가 더 높은 랭킹을 차지한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미친 듯이 밑줄만 그었던 것 같다. 이 부분에서도 좀 더 보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이 독보적 서비스 때문에 확실히 ‘읽는 인간’에서 ‘읽고 걷는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 9월에 비해 10월이, 그리고 11월에 더 꾸준히 잘 걷고 있는 것이다. 비가 내린 일요일에도 우산을 쓰고 걸으려고 나가지 않았는가. 물론 꼭 독보적 미션을 수행하려는 목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걷다 보니 전에는 미처 몰랐던 걷기, 산책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비가 오는 날은 공기가 좋을 것 같고, 거리에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아 집을 나섰는데, 역시 그랬다. 그런 고독한 길을 걷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피어난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걸을 때 우리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을 펼칠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정말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요즘에 걸을 때면 음악도 잘 듣지 않는다. 걸으면서 생각하는 즐거움에 빠졌다고나 할까.

비가 내리는 날 걷는 행위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인적이 드물어서 걷는 일이 더 즐거워진다

걷다 보면 늘 익숙했던 풍경도 새롭게 보인다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 걷는 일은 곧 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보면서 동시에 본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느긋한 관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색하는 사람에게 걷는 일이 특별히 유용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여행의 경이와 해방과 정화를 얻자면, 세계를 한 바퀴 돌아도 좋겠지만 한 블록을 걸어갔다 와도 좋다. 걷는다면 먼 여행도 좋고 가까운 여행도 좋다. (...)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다.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21~22쪽)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32쪽)
걷다 보니 걷기에 관한 책에도 관심이 생겼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도 그래서 읽었다. 그런 까닭에 <걷는 사람, 하정우>도 관심이 생겼는데, 이 책은 도서관에서 늘 대출 중이라 내 순서가 돌아오기까지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냥 사서 볼까 싶어지기도. 아무튼 독보적 랭킹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독서도 산책도 누군가가 알아주기 때문에 하는 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혼자 할 수 있으면서, 또 그 고독을 오롯이 누릴 수 있고, 정신과 마음을 살찌우는 행위인 독서. 거기에 몸과 마음의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걷기라는 행위. 이 두 가지를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자극’과 ‘동기’를 유발해주는 ‘독보적’은 내게는 꽤 이로운 서비스이다. 겨울이면 춥다고 방안에 이불을 친친 감은 채 책만 읽던 나였는데, 아무래도 올 겨울에는 걷고, 또 걸을 것 같다. 한 10년쯤 열심히 읽고 걸으면 알라딘에서 메달이라도 주려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