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소와 오종의 <인 더 하우스>는 개봉 당시부터 봐야지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여태까지 보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주말, 드디어 봤는데, 후안 마요르가의 <맨 끝줄 소년>을 읽었기 때문이다. 오종의 <인 더 하우스>는 <맨 끝줄 소년>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희곡인 <맨 끝줄 소년>은 여러 차례 무대 위에 올려 졌고,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 상연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희곡은 좋아해도 연극은 좋아하지 않아서 연극을 볼 생각은 전혀 없는데, 오종은 과연 이 작품을 어떻게 영화화했는지 꽤 궁금했다. 오종의 작품은 대부분 연극적이거나 희곡을 성공적으로 영화화했기 때문에(<8명의 여인들>,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과 같은 작품들) <맨 끝줄 소년> 또한 기대되었다. 그리고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맨 끝줄 소년>보다 도발적이다. 물론 원작인 <맨 끝줄 소년>이 빼어난 작품이기에 영화로도 흥미로운 작품이 탄생했겠지만, 오종은 그 좋은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자신만의 매력을 덧붙여 또 다른 개성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후안 마요르가의 <맨 끝줄 소년>은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한때 작가를 꿈꾸던, 그러나 이제는 고등학교에서 형편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인 헤르만(영화에서는 ‘제르망’)은 학생들이 제출한 작문 과제를 채점하느라 고통스럽다. 글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형편없는 문장의 나열을 보며 아내인 후아나(영화에서는 ‘쟝’)에게 투덜투덜 학생들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아마 작가를 포기한 채 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자기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기도 하리라. 그런데 문득, 한 학생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주말 친구인 ‘라파’(영화에서도 ‘라파’)네 집을 방문해서 그들 가족을 관찰하고 쓴 글인데, 그것을 아내에게 읽어주던 헤르만의 눈이 빛나기 시작하고 잠자코 듣던 후아나도 귀를 기울인다. 재능이 있는데? 이야기가 뭔 줄 아는 것 같은데? 그 글을 쓴 학생의 이름은 ‘클라우디오’(영화에서는 ‘클로드’). 별로 말도 없고 언제나 맨 끝줄에 앉는 학생이다.
헤르만: 맨 끝줄에 앉아. 말이 없지. 수업에 적극적이지도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아. 다른 과목들은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아. 수학 빼고.
헤르만: 좀 특이한 애지, 그러니까 제대로 된 아이랄까.
후아나: 당신도 맨 끝줄에 앉아 봤어?
헤르만: 가장 좋은 자리야. 아무도 거기는 못 보는데 거기서는 모두를 보지.
후아나: 이 작문들이 세상에 알려진다고 생각해봐. 어떤 면에서는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어.
헤르만: 무슨 책임?
후아나: 어떤 면에서는 당신이 공범자가 되는 거야. (<맨 끝줄 소년>, 21쪽)
‘맨 끝줄’이란 ‘아무도 거기는 보지 못하는데, 거기서는 모두를 볼 수 있는’ 장소이다. 클라우디오와 헤르만은 둘 다 그 자리에서 앉아본 경험이 있고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작가가 되기를 꿈꿔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영화에서는 좀 더 대사가 직설적이어서, 제르망은 ‘모든 걸 훔쳐볼 수 있는 자리’라고 말한다. 나 또한 학창 시절에 맨 끝줄에 앉기를 좋아했는데, 그 자리는 실제로 딴 짓을 하기에도 좋고, 누군가를, 어떤 행동이나 사건을 남몰래 지켜보기에 딱 좋은 그런 자리이다.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기 좋은 그런 자리라고나 할까. 실제로 영화에서 ‘클로드’ 즉 ‘클라우디오’는 타인을 관찰하고 은밀히 엿보는 걸 좋아하는 소년으로 등장한다. ‘라파’에게도 의도를 갖고 접근한 것으로 나오는데, 라파는 자기와는 전혀 다른 가정(화목해보이고, 부유하고 아무런 구김살 없는)에서 자란 말 그대로 ‘밝고 순수한’ 소년이기에 클라우디오가 호기심을 갖게 되고, 어떤 계기를 찾다가 수학을 못하는 라파에게 수학을 가르쳐 준다는 구실로 그의 집에 드나드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라파의 가족, 특히 라파의 엄마인 ‘에스테르’를 엿보면서 글을 써나가고, 헤르만과 그의 아내 후아나는 점점 이 이야기에 빠져들어 간다. 그런데 후아나는 헤르만과 달리 타인의 가족을 엿보면서 글을 쓰는 행위를 탐탁지 않아 한다. 열여섯 살 소년이 쓰기에는 은근히 도발적인 내용도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클라우디오의 글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한다.
오종의 영화는 좀 더 직접적이다. 제르망은 글쓰기에 재능 있는 제자를 발견해내고 그 아이의 재능을 꽃피워준다는 명목으로 날마다 클로드에게 글쓰기 관련 개인 교수까지 해주며 그를 북돋는다. 그런데 이 호기심은 조금 기이하다. ‘쟝’(원작의 ‘후아나’)이 지적하듯이 클로드의 글에 집착하면서 둘은 섹스리스 부부가 되어가고 제르망은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다가 아내가 지적하자 그제야 깨닫는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제르망과 쟝 사이에는 전에 없던 활기가 감돈다. 그들에게는 클로드의 작문 안에서나 존재하는 라파 가족의 사생활, 특히 라파의 엄마인 ‘에스테르’와 라파 아버지의 관계 및 에스테르를 향해 연정을 품은 클로드의 관계가 궁금하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들은 묘한 쾌감을 느끼며 다음, 다음, 다음 편을 궁금해한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샤리아르’ 왕과 ‘셰에라자드’의 관계와도 같다. ‘제르망’이 ‘샤리아르’라고 한다면 왕에게 다음 이야기를 가져다줘야 하는 클로드는 ‘셰에라자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에 미친 왕이 셰에라자드를 죽이지 못한 것과 달리 <인 더 하우스> 즉, <맨 끝줄 소년>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자, ‘클로드’가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영화에서는 클로드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아니 제르망,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교사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하게 된다. 이 사건은 원작인 희곡에서는 모호한 암시로 흐릿하게 처리되는데(이 또한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인 더 하우스>에서는 아예 그 사건을 ‘있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리고 제르망의 행동은 나중에 큰 화를 불러온다. 제르망과 클로드의 관계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구분을 넘어,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편집자는 계속 자신의 영향 아래 작가를 두고 싶어 하고 그의 글이 나아갈 방향을 유도하면서도 그 글이 지닌 독특한 매력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처음에는 편집자나 마찬가지인 제르망의 말을 유순하게 듣는 것 같던 클로드는 어느 순간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깨닫고는 제르망과 그의 아내 쟝까지 ‘갖고 노는’ 경지에 이른다. 작품 속 인물인 ‘에스테르’와 ‘라파 아버지’의 모습은 때로 ‘제르망’과 ‘쟝’의 투영 같기도 하다. 도발적이고 대담한 이 어린 작가 클로드는 라파 가족을 통해 결국 제르망이라는 한 속물 교양인의 이중성을 폭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또는 문학이라는 외피를 쓴 채 ‘관음증’의 욕망을 마음껏 채우고 있는 그를 조롱했던 것은 아닐까?
<인 더 하우스> 와 <맨 끝줄 소년>이 둘 다 매력적인 까닭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관객 또는 독자가 보는 대로 언제든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로드, 즉 클라우디오가 쓴 ‘라파 가족 이야기’는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떤 부분은 허구일까? 애초에 라파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러 간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설명된 클로드의 집안 환경도 모두 거짓은 아닐까? 아니면 이 모든 이야기 자체가 ‘맨 끝줄 소년’ 클라우디오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까? 이야기의 현실과 상상, 그 경계의 구분을 어떻게 독자가(또는 관객이) 설정하는가에 따라 <인 더 하우스>도 <맨 끝줄 소년>도 전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씩 달라진다. 클로드가 욕망한 사람은 ‘에스테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제르망’이기도 하며, ‘쟝’ 또는 ‘후아나’가 될 수도 있다. 또 어쩌면 그저 해맑은 소년 ‘라파’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그저 글쓰기에 도취된 한 나르시시스트 소년의 조롱과 풍자는 아니었을까. <맨 끝줄 소년>과 <인 더 하우스>는 그렇게 활짝 열린 ‘상상’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클로드와 라파네 가족

글쓰기 지도 중인 제르망, 그리고 클로드

제르망과 그의 아내 쟝은 점점 클로드의 글에 빠져든다.

이 모든 이야기는 혹시 '맨 끝줄 소년' 클라우디오, 즉 클로드의 상상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