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즐겨 읽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눈에 띄는 만화가 있고, 완결이 되지 않았음에도 다음 권을 기다리며 읽어나가게 되는 만화가 있다.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도 그런 만화 중 하나이다. 아니, 요즘에는 이 만화가 거의 유일하게 다음 권을 기다리면서 읽고 있는 만화랄까.

이 만화에 태그를 달자면 #일흔다섯 할머니 #십대 여고생 #우정 #BL만화 #오타쿠 등이다. 할머니와 여고생의 우정이라고 하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데, 난데없이 BL만화가 끼어든다. 그 키워드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데, 바로 이 점이 이 만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일흔다섯의 할머니와 열일곱 여고생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다름 아닌 BL만화, 즉 Boy’s love, 남성 동성애를 소재로 한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3년 전 남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홀로 서예교실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이치노이’ 할머니는 어느 날 요리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 자기도 모르게 예쁜 표지의 만화에 눈길을 주게 되고 그 예쁜 그림에 반해 책을 사와서는 푹 빠져 읽는다. 문제의 책이 바로 BL만화인 <너만 바라보고 싶어>.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사교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열일곱 ‘우라라’는 BL만화 오타쿠(마니아)로 할머니가 들른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고, 웬 할머니가 그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인 <너만 바라보고 싶어>를 사가는 걸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곧 다음 권을 사러 왔다가 재고가 없어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리는 이치노이 할머니에게 우라라가 주문을 받으면서 둘은 서서히 가까워지게 된다. “줄곧 누군가와 만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우.”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와 소심하게 속으로만 ‘나도’라고 답하는 우라라. 많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단지 좋아하는 것이 똑같다는 점에서 시작된 이 우정은 서서히 서로의 일상을 바꾸어 나간다. 할머니보다도 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우라라의 변화는 조금 더 눈에 띈다.




나는 BL만화를 본 적이 없어서 이 장르의 매력을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에 간간이 등장하는 BL만화의 장면, 장면을 보노라면 왜 이치노이 할머니와 우라라가 이 장르에서 매력을 느끼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쁘장한 소년들이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치노이 할머니는 그 어린, 청춘의 주인공들을 보며 자신의 지나간 시절, 다시 오지 못할 그 순간들을 떠올리지는 않을까. 그러면서 그 시절에나 가능했을 그 사랑을 응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할머니의 눈에 친구도 딱히 없어 보이는, 소심한 우라라는 또 다른 응원하고 싶은 청춘이리라.

실제로 할머니는 우라라에게 ‘내가 우라라 학생이라면 말이죠. 그냥 그려봤을지도 몰라요.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라고 말하면서 만화를 직접 그려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권하기도 한다. 물론 전혀 강요하는 투가 아니다. 어느 비 오는 날, 할머니에게 빌린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오던 우라라는 우산 안 쪽의 장미 무늬 그림을 보며, 이치노이 할머니의 말을 떠올리고 그때부터 조금씩 만화를 ‘직접’ 그리기 시작한다. 그런 우라라는 조금씩 달라지고,  활발해지고, 외출도 잘하고, 뭔가 좋은 방향으로 변한 것 같다는 말을 엄마에게 듣기도 한다. 자신의 이런 변화를 인지하는 우라라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그런 거 다 언제든 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여태까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멀리까지 외출하거나 정성 들여 요리를 하거나) 이 나이면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오는 걸까 싶었는데 그냥 아무 때나 지금 해도 괜찮은 거구나 싶어서.” 분명, 이치노이 할머니의 영향이다.

인간관계에 서툰 우라라는 만화 속 인물들처럼 제대로 된 관계를 이끌어나가 본 적이 없다. 친구의 여자친구가 하는 말도 무슨 의미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만화를 보며 ‘언젠가 나도 이런 표정으로 누군가를 향해 웃을 일이 생길까.’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고백하고, 만나고, 사랑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이별하기까지. 우라라의 일상에서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 인간관계가 BL만화 속에는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우라라는 그런 만화를 보며 대리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론 언젠가 나도 이런 얼굴로 누군가를 보며 활짝 웃고 싶다 생각하면서……. 이 만화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라라에게도 그런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을 것이다. ‘이치노이 유키’ 할머니가 눈(雪)처럼 서서히 우라라에게 내려서, 화창하다는 의미의 ‘우라라’를 그 이름처럼 밝게 만들어줄 것을 알기에.



열일곱의 우라라가 이렇게 제 나이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서서히 변화해 간다면, 할머니의 노년의 인생은 또 어떻게 전개될까. 나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를 다음 달, 아니, 몇 달 뒤에 나와도 조급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다. 아직은 그런 나이이다. 그러나 75세의 이치노이 할머니에게 1년 반에 겨우 한권 발매되는 신간 속도는 한없이 느리기만 하다. 대충 85세쯤 죽는다 치고, 신간 1년 반에 한 권이면 앞으로 고작 6권 정도만 읽을 수 있을까, 한숨짓다가도 남편 사진을 보며 ‘아흔까지 힘내 볼게요’하는 장면은 노년의 삶이란 하루하루 소중하게 여겨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우라라의 시기는 지나왔고, 할머니처럼 늙어가는 인생이라 그런지, 노년의 눈으로 바라본 삶에 더 동감하게 된다. 동인지 판매 이벤트가 열리는 ‘선샤인’을 무려 40년 전, 개장 때 전망대에 올라가려고 와봤다는 할머니. 할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전망대에 올라가려면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다음’번이 있을 줄 알고, 다음을 기약하고 그 자리를 떴으나, ‘다음은 없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말들도 인생에서 ‘다음’이란 사실 쉽게 이루어질 수도 없음을 알려주며 삶을 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켜켜이 쌓아둔 그릇 중 몇 개를 우라라에게 선물하고, 그걸 받아든 우라라가 ‘나는 겁이 났다. 한 사람의 역사가 고요하게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이. 그 조각 중 하나를 쉽사리 받아버린 것이.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할머니의 마음도 우라라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기에.

이렇게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는 소심한 10대 소녀의 성장담이자, 노년을 정리하는 할머니의 깊이 있는 시선으로 인생의 여러 모습을 성찰하기도 하면서 내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3권에서는 드디어, 할머니와 우라라가 단순한 만화 소비자에서 생산자이자 판매자가 되려는 엄청난 변화를 보여준다. 판매할 책을 직접 준비하겠다고 말하는 우라라. 우라라의 만화는 어떤 만화일지 벌써부터 4권이 기다려진다. 이 만화가 몇 권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화창한 사람 ‘우라라’와 내리는 사람 ‘이치노이 유키’, 두 사람의 담백한 우정을 계속 이렇게 흐믓한 마음으로 응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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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0-02-16 0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재밌게 보고 있어요.. 라고 말씀드리기엔 원서로 3권까지 사서 아직 1권을 읽고 있으니 쫌 뻔뻔한 발언이지만. ^^;; 저는 예전에 어른들이 왜 젊은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싶어하나 싶었는데 제가 마흔이 되고 보니 20대 조카들이랑 같이 대화하고 한번씩 만나 시간을 보내는게 어찌나 재미난지 요즘 유행하는 것도 배우고 뭔가 마음이 젊어지는 느낌이 들고 나까지 왠지 생기가 넘친달까. 세대차를 넘어선 교제가 좀 더 필요한거 같아요. 자나깨나 꼰대질 주의중입니다만.. 😅

잠자냥 2020-02-16 10:20   좋아요 1 | URL
하하하 1권 읽고 계시다면 이 글이 스포일러가 됐을 수도 있겠네요. ^^;; 예상보다 훈훈하고 소소하면서도 따뜻한 그런 만화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세대를 넘어선 교제에서 배우는 것도 많은 것 같고요. 꼰대질 주의!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