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 또한 그렇다. 읽고 나서 크게 감명을 받았다거나 오래 기억한 적도 드물다. 그럼에도 이상하다. 그의 에세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회상록이라고 해야 할까 <서밍업>이 출간 되었을 때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글을 아주 잘 쓴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도 이 책은 궁금했다. ‘문장과 소설과 인생에 대하여’라는 부제에 마음이 끌렸다. 그중에서도 ‘문장과 소설’에 더 꽂힌 것이 맞겠지만.

이 책을 펼쳐들고 읽는다. 이윽고 나는 무뚝뚝하고 냉소적이며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은, 그렇다고 딱히 자기 자신에게도 너그럽지 않은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서머싯 몸이다. 이 책 표지를 장식한 그의 얼굴처럼 무언가 매사, 삶 자체가 못마땅한 불만투성이 늙은 남자, 살짝 심술궂기까지 한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난다. 그는 곧 딱딱하고도 건조한 말투로 잔소리를 시작한다. 문장은 이런 거야, 소설은 이렇지, 연극은 또 이렇다고. 그래서 인생은 이렇다네. 나는 이 냉소적인 남자의 말에 조금씩 넘어간다. 그의 말에 조금씩 귀 기울이다가 잠깐만요, 잠깐만요, 메모 좀 할게요! 하면서 허겁지겁 수첩을 꺼낸다. 그가 말하는 속도를 늦추면 좋겠다. 좀 더 깊이 있게 경청하기 위해. <서밍업>은 그런 책이다. 몸을 딱히 좋아하지 않아도, 때로는 그의 꼰대 같은 소리에 반문이 들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새겨들을 말이 많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머싯 몸 그의 인생을 곁에서 살짝 들여다 볼 수 있는 일종의 회상록 같은.

몸은 이 책은 ‘자서전도 회고록도 아니’라고 밝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문장과 소설, 연극, 인생에 대해 77장의 에세이로 담아낸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서머싯 몸, 한 작가의 일생이 고스란히 눈앞에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몸이 그렇게 밝혔음에도 <서밍업>은 그의 자서전 ‘요약본’ 같은 역할을 한다. 어떤 인물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읽는 일은 그에 대한 호감이 있지 않는 한 좀처럼 불가능하다. 분명 나는 서머싯 몸에 대한 호감 때문에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몸이라는 한 인간에 예전보다는 관심이 생기고 그의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을 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자신을 미화했는가? 그렇지도 않다. 호감 받을 만한 인물로 그렸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도 왜 이런 마음이 들까? 그것은 이 냉소적이고 삐딱한 인물이 자신의 글과 작품, 그리고 삶 전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썼으며, 거리를 두고 되돌아볼 줄 아는 자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에 얼마쯤의 존경심이 들기 때문이다.

<서밍업>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간의 굴레>가 떠오른다. <서밍업>에도 ‘인간의 굴레’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인간의 굴레>의 필립은 몸의 페르소나와도 같다. 몸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작품들 속에 자기 인생에서 벌어진 일들을 활용해왔으며, 때때로 그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하나의 주제로 삼기도 하고, 그 주제를 더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일련의 사건들을 지어내기도 했다고 <서밍업>에서 밝혔는데, <인간의 굴레>가 바로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절름발이로 태어나 일찌감치 부모를 잃고 삼촌 밑에서 자란 몸. 그는 곧 <인간의 굴레>의 필립이다. 필립은 절름발이로 태어났기에 그 신체적 결함으로 말미암아 조금 남과 다른 시선을 갖게 된다. 육체적으로 연약했기에 정신적인 일에 몰두하고, 사색하고 책을 읽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예민한 감수성, 남다른 지각을 지닌 필립은 타인을 관찰하기 시작하고, 누군가의 삶을 섣불리 재단하기도 한다. 예술을 논하는 사람에게 열광적으로 매혹되기도 하지만, 어느 사이 그런 모습이 순전히 허영으로 보여 그를 멀리하기도 한다. 어릴 때는 종교에 탐닉하다, 모순을 깨닫고 그림이나 문학 등 예술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런 삶에서도 쉽사리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의사에 도전을 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이런 필립의 삶은 <서밍업> 속 몸의 삶과 거의 일치한다.

몸은 <서밍업>에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는 술을 즐겨 마시면서 동료 인간들에게 커다란 애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회식의 즐거움은 언제나 나를 따분하게 한다. 나는 찬송가도 불러본 적이 없다. 나는 신체접촉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의 히스테리는 내게 혐오감을 안겨주며 기쁨이나 슬픔을 격렬하게 표시하는 대중 사이에 있을 때 나는 평소보다 더 초연해진다. 나는 여러 번 사랑에 빠졌으나 완벽한 사랑의 축복을 느껴본 적은 없다. 나는 나 자신의 독립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했다.’ (<서밍업>, 103~104쪽)

예술을 논하는 사람에게 매혹되었던 필립이 어느 순간 그런 모습이 모두 허영이라고 깨달으며 그를 멀리하는 장면도 <서밍업>에서 밝힌 몸의 예술관과 일치한다. 몸은 문화, 즉 예술은 인간의 성품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성품을 고상하게 하거나 강화하지 않는다면 문화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몸은 예술의 목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선량함에 있다고 보면서 책 천 권을 읽은 것이 밭 천 이랑을 간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문화는 종종 자기만족을 가져오는데, 자기 지식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식인의 어리석은 편견이라고 꼬집는다. ‘진선미는 값비싼 학교에 다녔거나 도서관에 틀어박혀 살거나, 박물관에 자주 가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면서 예술가가 다른 사람들을 활용하면서 그들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몸의 생각은 <인간의 굴레>속 필립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었으리라.


몸은 극작가로서 일찌감치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그는 가난한 삶에 일종의 공포를 느꼈다. 그런 몸의 생각은 <인간의 굴레>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나는 돈이 육감과 같은 것이고, 돈이 없으면 다른 오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밍업>, 150쪽)

재산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술가가 그런 문제로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는데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가들 자신의 견해가 아니다. 예술가들은 애호가들이 그들의 적소라고 생각하는 다락방에 사는 것이 좋아서 일부러 그렇게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돈을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돈이 없어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또다시 내몰리기 싫었기 때문이다.(<서밍업>, 217~219쪽)

“세상에서 가장 굴욕스러운 일은 말이지. 먹고 사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야. 난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감 밖에 들지 않네. 그런 자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야. 돈이란 제 육감과 같아. 그게 없이는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적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절반은 막혀버리네. 예술가에겐 가난이 제일 좋은 채찍이라는 말들을 하잖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난의 쓰라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하게 만드는지 몰라. 사람을 끝없이 비굴하게 만드네. 사람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암처럼 사람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솔직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는 있어야지.” (<인간의 굴레에서>, 414~415쪽)



이렇듯 일과 돈, 예술, 사랑 등 인생에 대한 몸의 생각이 고스란히 투영된 <인간의 굴레>는 썩 재미있다고 할 수는 없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다 읽고 난 뒤에는 평범하고도 지지부진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굴레’, 그 슬픈 생을 곱씹어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아마도 몸의 진솔한 자기 고백이 작품 곳곳에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필립을 비롯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평범하면서도 다층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깊은 공감이 간다. 서머싯 몸은 평범한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예측 불가함과 기이함, 그 무한한 다양성’에서 끝없는 소재를 찾았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탕진 불가능한 무궁무진의 소재’라고 말했는데, ‘이기심과 이타심, 이상주의와 감각주의, 허영, 수줍음, 공평무사함, 용기, 게으름, 신경질, 고집스러움, 소심함, 이런 것들이 모두 한 사람의 내부에 깃들어 그럴듯한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고 독자에게 이것이 진실임을 설득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때문에 몸은 종종 냉소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인간을 실제보다 훨씬 더 나쁘게 묘사한다는 비난도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많은 작가가 눈감은 인간의 어떤 특징을 좀 더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그가 인간성에 특히 주목한 부분은 일관성이 결여된 점이었다. 실제로 인간은 그렇지 않은가?


몸이 인간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램버스의 빈민가에서 의사로 지내면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그 날것 그대로의 삶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몸은 그 무렵의 수첩에 분노하는 어조로 이렇게 썼다. ‘고통이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타락시킨다.’ 그가 보기에 ‘고통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야비하고, 좀스럽고, 의심이 많아지도록 했다. 고통은 인간을 인간 이상이 아니라 인간 이하로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체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의 고통을 통하여 체념을 배운다.’(<서밍업>, 86쪽) 이런 통찰력이라니, 그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머싯 몸은 자신이 작가가 된 데에는 물리칠 수 없는 충동 말고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글쓰기를 오리가 물속에 들어가는 일처럼 여겼다.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평범하고, 어휘는 제한되어 있고, 문법은 불안정하며, 문구(文句)는 낡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그에게 숨쉬기처럼 자연스러운 본능이었고, 자신이 글을 잘 쓰는지, 못 쓰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그저 ‘썼다’. 사람들 대부분이 ‘타고난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다가 그 삶의 시계가 다하면 촛불처럼 스르르 꺼지’(<서밍업>, 352쪽)는 삶을 살 때에도 그 자신이 ‘소유한 모든 능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삶에서 얻어낼 수 있는 ‘쾌락, 아름다움, 정서, 흥미를 모두 획득하는 자기실현’(<서밍업>, 353쪽)을 이룬 것이다.

몸은 이 책 끝 부분에 ‘인생의 아름다움은 각자가 자신의 본성과 본업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썼다. 몸 자신은 글쓰기로, 문학으로 그렇게 살다가지 않았을까? 그가 보기에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인간이 예술을 통해 때때로 몸을 피신할 수 있는 암자를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예술은 그 악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과 맞설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한 암자가 되어야 했다. 몸이 생각하기에 거기에 예술의 의무가 있었다. ‘예술은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을 때만 위대하고 유의미’하다고 생각한 서머싯 몸. 그의 작품이 오늘날 바로 그런 예술이 되었으니, 그는 지금 저 먼 곳에서 아마도 만족의 미소를 짓고 있지는 않을까. 이 깊어지는 가을에 그의 작품들을 더 찾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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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경기문학 3
배수아 지음 / 테오리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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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에 이어서 읽는다. 여기 실린 작품들 또한 <뱀과 물>과 이어져 있다. 카프카에 대한 오마쥬이자 찬가로 읽히는 작품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모호한 세계가 매력적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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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밍 업 - 문장과 소설과 인생에 대하여
서머싯 몸 지음,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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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연극, 소설, 인생론으로 살펴본 몸 자신의 회고록. 이 책을 읽다보면 무뚝뚝하고 완고하며 삐딱한 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그의 진솔한 고백으로 이루어진 77편의 에세이는 꽤 아름답다. 글 쓰고자 하는 이에게는 일종의 지침이 될 책. 그렇지 않더라도 에세이로서 충분히 아름다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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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다이어리 북 - 인생이 명랑해지는 야옹이 라이프!
이용한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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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쓰다가 힐링될 듯. 선물용으로도 아주 좋은 책&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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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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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워’라는 말이 있다.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의 시간대를 의미하는 말로 이때는 하늘이 완전히 어둡지도 않고 그렇다고 밝지도 않아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때문에 이때를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그 어딘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어렴풋한 시간. 배수아의 <뱀과 물>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블루 아워’를 떠올린다.


배수아의 작품은 오랜만에 읽는다. 오래 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와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를 읽던 시절, 그 무렵 배수아의 작품에는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어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인물 중 한 사람은 스무 살을 전후로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결국 언제까지나 ‘아이’로 머물게 된다. 또한 이 무렵 배수아의 작품에서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개인만 존재한다.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조차도 굴절되어 있거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랜만에 읽은 <뱀과 물>에서도 이런 경향은 여전하다.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은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없다. 있더라도 부재중이라서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서 여행길에 오른다(「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노인 울라에서」, 「1979」). 간혹 아이 곁에 있더라도 미쳐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없다(「얼이에 대해서」) 그러나 예전 배수아의 작품과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뱀과 물>이 그리는 세계는 ‘꿈’의 세계이다. 시공간도 불명확하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그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불분명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아이의 성별도 뚜렷하지 않다(「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얼이에 대해서」, 「1979」, 「노인 울라에서」).


예전 작품이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면 <뱀과 물>의 작품들은 꿈을 꾸는 듯, 아니면 혼곤한 잠에서 깨어난 듯 몽환적인 세계를 그린다. 그런데 그 세계는 무척 매력적이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이가 소년인지 소녀인지, 아이인지 어른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꿈속에 나타난 물체가 살이 찐 뱀인지 어린아이 몸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흐릿하다. 그 모두는 ‘육체성을 상실했으며 모서리와 윤곽만’(「1979」) 보이는 희미한 세계이다. 그 안에서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1979」)과도 같다.


때때로 나는 기억해두고 싶은 꿈은 잠에서 깨어나 메모를 한다. 그 메모 속 단어들을 뒤늦게 살펴보면 퍼즐 조각처럼 단편적이다. 그런데 그 퍼즐들을 조각조각 맞춰나가다 보면 하나의 큰 그림이 보이기도 한다. 배수아의 <뱀과 물> 속 단편들은 그 퍼즐 조각 하나하나와도 같다. 그 조각들을 맞추다 보면 여전히 아리송한 빈틈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큰 그림이 흐릿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그 그림은 다음과 같다. 눈이 내리는 사막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아이이기도 하면서 어른이기도 한, 때로는 엄마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할머니이기도 한 어떤 여성의 이미지.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서 ‘눈 아이’는 일곱 살 생일을 전후로 성별이 달라진다. 아이의 엄마는 마술사이며 아버지는 서커스단의 눈표범 조련사이다.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스키타이족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다. 이 이야기의 후속작이 틀림없는 「노인 울라에서」퍼즐 조각은 좀 더 또렷해진다. 아이의 아버지는 거인이다. 아버지는 언덕 위에 선 느릅나무처럼,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마치 아버지가 읽어주는 그림책 속의 이야기처럼,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사령관일까? 눈표범 조련사일까? 


아이는 그곳에서 붉은 리본을 묶은 눈먼 소녀를 만난다. 그 소녀 또한 아버지를 찾고 있다. 소녀의 어머니는 여행을 떠난 뒤로 영영 돌아올 줄을 모른다. 자신을 ‘눈 아이’라고 말하던 눈먼 소녀가 사라진 뒤 ‘나’는 자신이 ‘눈 아이’라고 말한다. 이 아이 또한 일곱 살 생일까지는 사내아이로 살지만, 일곱 살 생일이 지나면 여자아이가 된단다. 나쁜 여왕이 어린 여자아이들을 잡아가기 때문이다. 


「눈 속에서 불타기…」와 「노인 울라에서」가 꿈결 같은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의 현실 버전은 「얼이에 대해서」가 아닐까. 얼이의 어머니는 마술사 대신 ‘미친년’이다. 얼이의 아버지는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마술사인데, ‘우리’는 그의 마술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얼이는 북쪽에 위치하는 ‘반두’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곳이 얼이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이는 반두에 가지 못한 채 시체로 발견된다. 한편, 이 이야기의 화자는 줄곧 소년처럼 묘사되는데, 뜻밖에도 ‘나’의 누나는 ‘나’를 사내아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눈 아이’와 ‘눈먼 소녀’가 ‘얼이’와 ‘나’로 대체된 것이다.


“언제까지 사내아이처럼 개구쟁이 짓만 하고 다닐래? 넌 여자애잖아. 너 때문에 창피해서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겠어.” (「얼이에 대해서」,72쪽)

“어린 여자아이를 잡아간다는 악령 이야기는 마술사가 꾸며낸 미신일 뿐이니까. 겁낼 필요 없어. 더 이상 사내아이 흉내를 낼 필요도 없어.”  (「얼이에 대해서」,76쪽)


반두로 간다면서 사라진 얼이는 어디로 갔을까? 정말 죽은 것일까? 「도둑 자매」에는 줄곧 살아있는 줄 알았지만 실은 죽은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자신이 죽은 것이냐고 묻는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다른 소녀가 답한다. ‘어머니가 도랑에 집어던진 너를 내가 건져 올렸지만, 그건 어쩌면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고(「도둑 자매」). 소녀를 죽인 사람은 소녀에게 달콤한 도넛을 건넨 돼지 장수였을까? 아니면 함지박을 이고 가는 식모아이나 책가방을 든 여학생들이 나타나면 흙먼지 자욱한 길가에 지프를 세우고 “태워줄까?”하고 묻던  멋쟁이 젊은 남자일까? 이 작품에서 소녀는 ‘어린 시절이라고 불리는 거무스름한 낡은 주물 거울에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도둑 자매」).


그렇게 어린 시절과 작별한 아이는 교사가 되는데, 여교사이기도 하고(「뱀과 물」), 남교사이기도 하다(「1979」). 어쩌면 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 둘은 하나이니까. 일곱 살 전에는 소년이었다가 일곱 살 이후로 소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교사는 키 큰 소녀를 자기도 모르게 욕망하기도 하고, 리우진이라는 학생의 성별을 오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리우진의 존재를 인식한 다음, 그 아이의 자리를 유심히 살피니, 마치 단 한 번도 사람이 앉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잊고 간 연필이나 지우개, 책상 위의 낙서, 칼로 그은 자국, 납작하게 말라붙은 껌 등 아이들 책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흔적이 전혀 없다. 심지어 냄새조차 없다. 아이는 존재했던 것일까? 아니, 어린 시절은 존재했던 것일까? 남교사에게 그의 동생이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94쪽)

「1979」에서 교사는 죽은 아기의 몸뚱이를 본다. 「뱀과 물」의 여교사 또한 그렇다. 아니, 정확히 그녀는 꿈에서 태아를 씹어 먹는다. 이 아이는 얼이가 아닐까? 아니면 「도둑 자매」 속 죽은 소녀일까. 그 둘 다일 수도 있다. 남교사가 뱀인지 아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꿈을 꾼다면 여교사는 매일 밤 꿈속에서 뱀과 물을 본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뜨면 늙은 길라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어린 길라, 여교사 길라, 늙은 길라는 평생 동안 생명 있는 것들과 불화해왔다. 그중 최초는 자신의 아버지였고 가장 마지막은 여교사 자신이다.


‘모든 것이 시작과 동시에 늙었고, 살기도 전에 너무도 오래되었던’ 어느 날 떠돌기 시작한 길라. 그녀 또한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다. 그녀 앞에 문득 나타난 여승은 말한다.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라고. ‘어쩌면 너는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네 안에는 아주 늙은 네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늙은 그녀가 너무 이른 시기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라. 만약 그녀가 미친 닭처럼 순식간에 훨훨 날아가 버리면 너는 평생 그녀를 쫓아다녀야 하는 거야. 아니면 그녀가 너를 쫓아다니겠지.”(「뱀과 물」, 206쪽)


여교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기억한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말한다. 여교사의 이런 생각은 어린 시절은 망상과도 같으며,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라는 「1979」 속 동생의 말과도 통한다. 


이렇듯 배수아의 <뱀과 물>은 모서리와 윤곽만 보이는 희미한 세계에서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과도 같은 어린 시절을 그린다. 그런데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이기도 하며 어쩌면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기도 하다. 소설의 공간이 모호하듯이 시간 또한 뒤섞여 흐른다. 순서대로 흐르지 않는다. 나는 아이였다가 어른이었다가 소년이었다가 소녀이기도 하며, 엄마였다가 할머니이기도 하다. 반두의 여왕이었을지도 모를 할머니(「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는 어쩌면 아버지를 찾아 나섰던 ‘눈 아이’가 아니었을까?「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잭’의 말처럼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삶은 그냥 거울 속에서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저절로 있다가, 언젠가 그레이하운드를 타러 가게 될 것’이라고(「도둑 자매」, 184쪽) 이 꿈결 같은 이야기는 매혹적으로 속삭인다. 당신 또한 이 흥미진진한 퍼즐을 직접 맞춰보고 싶지 않은가? 미로와도 같은 <뱀과 물>을 헤매다보면 틀림없이 당신은, 이 작품과 당신과의 ‘비밀스러운 결속’에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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