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론리하트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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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소개된 너새네이얼 웨스트 소설 전집은 단 3권으로 끝난다. <미스 론리하트>, <거금 100만 달러>, <메뚜기의 하루>가 전부이다. <거금 100만 달러>안에는 그의 첫 작품인 ‘발소 스넬의 몽상’이라는 짧은 단편이 하나 더 들어있다. 그가 살아 남긴 소설은 이렇게 얼마 되지 않는다.

그가 작품을 쓴 기간은 고작 몇 년 되지 않기 때문이다. 1903년에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1931년에 첫 작품을 쓰고 그 이듬해 <미스 론리하트>를 출간했는데 출판사의 도산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 <거금 100만 달러>, <메뚜기의 하루>를 차례로 발표했지만 거의 무명이었던 그는 결국 서른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부인과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러던 그는 죽은 뒤에 프랑스에서 작품이 번역되면서 성공을 거두고 1957년, 미국에서 전집이 출간되면서 비로소 영미문학사에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피츠제럴드, 헤밍웨이와 더불어 20세기 미국 문학의 3대 봉우리로 평가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20세기 미국 산문 문학에서 그와 비견될 작가는 포크너 단 한 사람뿐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의 전집 중 <미스 론리하트 Miss Lonelyhearts>를 첫 번째로 읽었는데 그냥 무명으로 파묻혔으면 왠지 억울했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굉장히 짧다. 그런데 술술 쉽게 읽기는 힘들다. 상징이나 숨어있는 의미 등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여러 번 더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숨은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니 골치 아픈 책은 아닐까, 편견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흥미진진하다.

'미스 론리하트'는 독자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신문 칼럼을 쓰는 사람이다. 미스 론리하트 앞으로 일주일에 30통이 넘는 편지가 배달된다. 고민상담녀, 절망녀, 절름발이 등등 갖가지 익명으로 날아오는 편지에는 그들 나름의 고통스러운 사연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미스 론리하트에게 묻는다. ‘저는 어떡하면 좋죠?’- 미스 론리하트는 나름대로 칼럼을 통해 그들에게 위안을 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 쉽지는 않아 보인다.

‘미스 론리하트’라는 이름을 쓰고 있기에 칼럼 쓰는 사람이 여자이려니 하겠지만 그는 남자다! 그의 생활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정신과 상담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 <In Treatment>에서 남들의 상담을 들어주는 의사도 결국 다른 곳에서 상담을 받는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미스 론리하트 역시 아프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나오지 않지만 독자는 그에게도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마음의 병이 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왜 그렇지 않겠나. 고통으로 범벅 된, 사람들의 온갖 쓰레기 같은 사연을 매일 같이 접하다 보면 제정신으로 온전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러기는 쉽지 않으리라. 미스 론리하트는 점점 자신의 일에 환멸을 느끼고 다른 직업을 찾아볼까 생각해보지만 그 조차도 쉽지 않다. 그는 병든 마음을 위악적인 방식으로 해소한다. 점점 더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고 술에 취하고, 자신의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간통을 일삼는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다. <미스 론리하트>를 보면 이 세상에는 구원도 존재하지 않고 희망이란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

피츠제럴드 작품과 비교해보면 피츠제럴드의 작품 속 인물들은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꿈이 부서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묘하게 낭만이 있었다. 그러나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작품에는 그런 낭만이 낄 틈이 없다. 잔혹하리만큼 삶은 고통스럽다고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1930년대 황폐한 미국 사회의 피폐한 인간상을 다루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현재 우리의 삶과 그 모습이 너무나도 닮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당신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자, 처음부터 다시 한번 짚어보자구. 어떤 남자가 어떤 신문의 독자들에게 상담과 조언을 해주는 일을 맡게 되었어. 그 일은 발행 부수를 늘리기 위한 판촉 행사의 하나였지만 신문사의 모든 직원들은 그 일을 그저 하나의 농담으로 취급했어. 하지만 그는 그 일을 환영했어. 그걸 맡다 보면 가십 칼럼으로 옮겨갈 수도 있고, 아무튼 그는 외판원 일이 지겨웠던 차야. 그도 처음에는 그 일을 농담으로 생각했지. 하지만 그 일을 몇 달 하다 보니 농담이라는 생각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어. 그는 인생 상담 편지들 대부분이 도덕적, 정신적 조언을 구하는 애절한 호소이면서, 정말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진실한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그는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들이 그의 조언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추구해온 가치를 반성해보게 되었지. 그 결과 그는 자신이 농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농담의 희생자임을 알게 되었어.” (79쪽)

‘인생이란. 불평 불만을 받아주지 않는 클럽 같은 곳입니다. 카드 패는 딱 한 번만 돌아가고 당신은 싫든 좋든 그 게임에 참가해야 합니다. 그 카드 패가 별 볼일 없고 운명의 손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신사처럼 씩씩하게 카드 게임을 해야 하는 겁니다. 자, 마음껏 취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마음껏 드시고 이층에 있는 여자애들과 즐겁게 사귀십시오. 하지만 당신이 최고의 패를 잡은 바로 그 순간에 게임을 끝내는 검은 휘장이 내려온다 해도, 절대 불평 불만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84쪽)

인간은 늘 꿈을 가지고 자신의 비참함과 싸워왔다. 과거에 꿈은 아주 막강한 것이었지만 그 꿈은 이제 영화, 라디오, 신문 때문에 유치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꿈을 배신한 사례가 무수하게 많았지만 최근의 이런 매체들은 정말 최악이었다. (95쪽)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빌어먹을 다리를 이끌고 지저분한 거리와 냄새 나는 지하실을 들락거려봐야 결국은 그게 뭐냐는 겁니다. 힘든 다리를 끌고 억지로 다니다 보면 다리가 너무 아파 퇴근 무렵에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됩니다. 그런데도 집에 가면 듣는 얘기라고는 그저 돈, 돈, 돈 얘기뿐입니다. 그런 집은 나 같은 사람에게 집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말입니다. 이를 악물고 이런 다리를 끌면서 세 구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빨이 너무 아파오는데, 과연 이런 아픔과 고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병원에 가보니 의사는 나보고 앞으로 6개월 정도는 쉬어야 한대요. 하지만 내가 놀고 있으면 누가 돈을 줍니까. 하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물어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보고 직장을 바꾸라고 조언할 테니까요. 하지만 직장을 바꾸기가 어디 쉽습니까. 이런 직장이나마 잡고 있는 게 여간 다행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불평하는 것은 직장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이런 지랄 같은 인생이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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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지비원 옮김 / 현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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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에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다 읽어버렸다. 그간 읽지 않고 아껴두었던 <우미인초>를 끝으로 이제 국내에 소개된 나쓰메 소세키 작품은 다 읽은 셈이다. 좋아하는, 죽은 작가의 작품을 다 읽자니 온갖 생각이 든다. 맛난 음식을 몽땅 먹어치우고 빈 접시를 바라볼 때 드는 감정. 그런 허탈감이 크다. 물론 맛난 음식은 또 사먹거나 새로 만들어 먹으면 되듯이 나쓰메 소세키 작품도 또다시 읽어보면서 음미하면 된다. 하지만 뭐랄까, 이제 내가 읽을 그의 새로운 작품이 없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 이런 책의 등장은 무척 반갑다.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라니! 오오, 그래 이건 바로 읽어야해! 비록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아니지만 그와, 그의 작품을 다룬 새로운 책이니까,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몰라! 기대하게 된다. 그 기대는 책을 받아들기 전까지 최고조에 이른다. 게다가 올해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전집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는 현암사에서 이 책이 나왔다. 그러니 기대는 더 크다. 분명 전집 완간 전에 이런 책을 내놓아서 분위기를 띄우고자 하는구나! 더 읽을 만하겠는데!

나보다 더한 나쓰메 소세키 팬인 친구에게 이 책 출간 소식을 알렸다. 친구는 이미 이 책을 주문해서 읽으려던 참이었다. 나도 사서 볼까? 하다가 나쓰메 소세키가 저자가 아니니, 일단 100% 믿을 수가 없어서 친구에게 읽고 난 뒤 빌려달라고 한다. ‘천천히 읽을 건데 괜찮겠’냐는 답이 돌아온다. 물론이다. 얼마나 이 새 책을 음미하고 싶겠는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나는 요즘 읽으려고 산 책이 산더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빌려주겠다는 답이 왔다. 벌써 다 읽은 것이다. 게다가 친구는 ‘시간 낭비가 될 것 같아서 읽어보라고 하기 뭐하다’고까지 한다. 내가 이 책을 다 읽으면 중고서점에 그냥 팔아버릴 생각이라고. 아하, 책이 별로구나 싶었다. 그래도 궁금해서 받아 읽었는데, 웬걸. 친구의 심정을 104% 이해하고도 남았다. 이 책은 내가 만약 서점에서 들쳐봤다면 절대로 사지 않을 책이다. 게다가 주변에 나쓰메 소세키 광팬,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고, 다 읽은 뒤에 다시 똑같은 작품을 몇 번이나 읽는 그런 사람이라면, 절대로 읽지 말라고, 아니 사지 말라고 뜯어말릴 책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보통 이런 책은 소세키 작품을 좋아하고 그의 새로운 작품에 목마른 사람들이 사 읽을 일이 많다. 그래서 왠지 더 안타깝다.

알라딘에서는 이 책에 대한 과한 칭찬이 넘쳐나는데(주로 읽지도 않고 쓴 기대평으로), 나는 왠지 반대의견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100자 평을 쓰고도 또 리뷰를 쓴다. 나나 친구처럼 이 책을 읽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싶어서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쓰메 소세키 팬이라고 자처할만한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을 전기/후기 대표작 6권 이상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냥 넘겨라. 아니, 그래도 궁금하다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던가, 또는 서점에서 1시간 정도 투자해서 읽어라. 굳이 사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럴 바엔 나쓰메 소세키 책 다른 작품을 한 권 더 사길 바란다. 그게 당신에게 이롭다.

일단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한 것이 독자 수준을 너무 낮게 잡은 건 아닌가 싶었다. 읽으면서 내내 이거 딱 중학생을 위한 나쓰메 소세키 입문서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사서 읽는 독자 수준과 책 내용 사이의 괴리감이 크다. 더욱이 나쓰메 소세키나 그의 작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샀는데, 저자가 하는 이야기라고는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독서법' 이야기가 많다.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는 둥,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읽어보라는 둥, 줄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둥, 다른 관점으로 읽어보라는 둥.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는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을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포장했다.

아아, 그렇구나. 이럴 수가. 그랬던 것이다. 이 책을 사보고 열 받은 친구가 검색을 통해 알아내니, 이 책은 일본에서 딱 중학생!! 그들을 위해 쓰인 책이었다. 원제가 <夏目漱石、読んじゃえば? (14歳の世渡り術)>. 책 읽기 싫어하는 중딩들, 그런데 국민작가라고 강제로 나쓰메 소세키를 읽어야만 하는 일본 중학생들에게 ‘책을 읽어봐, 나쓰메 소세키는 너희가 읽기에 그렇게 부담스럽거나 재미없는 작가가 아니야.’ 달래는 그런 책인 것이다. 좋은 약을 애한테 먹이려고 달콤한 사탕발림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책을 중학생이 아닌 성인들이 읽는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괴리감이 클지. 만일 현암사에서 이 책이 그런 원제였다고 알려줬다면 친구도 그럴 테고, 나 또한 읽어보지는 않았으리라.

독자 대상이 그렇다 보니 내용도 으응?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많다. 이야기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끝까지 다 읽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니, <마음>이 사실 그렇게까지 명작은 아니라면서 그 근거로 이야기 전개가 갑자기 힘이 빠졌기 때문이란다.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지 궁금하게 미스터리식으로 풀어가다가 갑자기 맥이 끊겼다나. 그러면서 또 <명암>은 미완성이지만 소설의 본질은 기승전결에 있지 않다고, 그런 것은 상관없다고 한다. 이건 무슨 자기모순?

나쓰메 소세키 작품에서 스토리, 즉 줄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음>도 나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너무 궁금해서 <마음>을 읽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좋아하고 여러 번 읽는 사람들은 분명, 그의 작품이 스토리가 재미나서 읽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독하게 홀로 산책하듯이 인간 마음속을 거닐면서 자기와 타인, 그리고 삶을 이리저리 생각해 볼 수 있기에 그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다. 마치 산시로가 도쿄 이곳저곳을 거닐 듯이 독자는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통해 인간 마음속을 거닌다.

<도련님>의 ‘도련님’은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많고 친구도 없으며 ‘중2병’에 걸렸으니까 그를 부디 미워하지 말고 친구가 되어주기를 독자에게 부탁할 때는 실소가 터진다. 나쓰메 소세키 작품에서 친구가 없는 게 문제가 되는가? <마음>을 BL, 즉 ‘보이스러브’로 봐도 괜찮다는 관점 또한 전혀 새롭지 않다. 선생님의 남겨진 아내와 ‘나’가 맺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할 때는 설마, 아니, 그렇지 않은데, 반발심까지 든다. 아, 그래요, 당신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당신 관점이니까. 그럼 그 근거는? 하고 근거를 찾는데, 근거가 턱없이 부족하다.

나쓰메 소세키가 어렵다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어보세요. 이런 관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는데 그 주장을 뒷받침할 내용은 부실하다. 딱, 책 읽기 싫어하는 중학생을 요리조리 쉬운 말로 꼬드겨서 나쓰메 소세키를 읽게끔 하려는 그 수준이다. 말을 물가에 끌고 가는 데 목적이 있지, 이미 물을 다 마신 말이, 수돗물 강물 바닷물 냇물 맛의 차이를 알고자 할 때, 마부는 나 몰라라 하는 격이랄까.

그러니 나쓰메 소세키를 즐겨 읽고, 그를 더 알고픈 독자들에게 이 책의 수준은 지나치게 ‘가뿐할’ 수밖에...... 한 시간 반 만에 다 읽고 그날 바로 알라딘 중고서점에 친구를 대신해서 이 책을 미련 없이 팔아버렸다. 출판사에서 만일, 책 소개란에 ‘14歳の世渡り術’만 알려줬더라면, 이 책을 선택하는 독자들의 생각은 조금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적어도 사고 난 뒤 뭔가 속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리라.

요즘 우리나라는 독서인구도 무척 줄어들었고, 읽는다하더라도 쉽고 가벼운 책을 좋아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독서의 연성화랄까, 서점에 나가보면 그런 현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쉽고 읽기 편한 책만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좋아하고 여러 권 읽은 사람들이라면 더 그러하리라.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독자들을 너무 ‘가뿐하게’ 봤다. 아니, 책과 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 책에서 ‘14세’를 지워버린 출판사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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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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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학적인 성적취향을 일컫는 말인 마조히즘(masochism). 마조히즘은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 사디즘(sadism)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L.R.von 자허마조흐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네이버 백과사전).’고 나와 있다.

마조히스트, 마조히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쩐지 채찍을 뜬 여자와 그 채찍을 맞으며 기뻐하는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는 그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작품을 통해 ‘마조히즘’의 기원이 된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 Venus in Furs>에는 가학적인 여성 반다와 그녀의 채찍에 맞아 괴로워하면서 동시에 기뻐하는 한 남자 제베린이 등장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제베린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반다와 제베린의 사랑이 처음부터 그러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제베린은 반다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에게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애원한다. 반다는 이미 한 번 결혼을 해서 남편을 잃은 젊은 미망인이다. 남편과 사별한 자유분방한 성격의 그녀는 이제는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려 한다. 게다가 자신이 다시 남편으로 맞이할 사람은 자기보다 강한 사람, 자신이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어야 한단다. 그런 의미에서 몽상가적 기질에 섬세하고 여리기만 한 제베린은 반다의 눈에 결혼할 만한 상대자는 되지 못한다. 연애라면 모를까.

“내 생각으로는.” 그녀가 말했다. “한 남자를 영원히 붙잡아 두려면 무엇보다 그 남자에게 충실해서는 안 돼요. 정숙한 여자가 매춘부처럼 그렇게 많은 이의 숭앙을 받은 적이 있던가요?” “사실 사랑하는 여자의 불충은 고통스러운 자극이자 최고의 쾌락이지요.” (95쪽) 반다와 제베린은 이렇게 죽이 잘 맞는다. 

반다 곁에 있고 싶은 열망이 큰 제베린은 그렇다면 그녀에게 자신을 노예로, 하인으로 삼아서라도 곁에 둬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사랑에 있어서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진지하고도 엄숙한 투로 대답했다. “상대를 지배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에게 지배를 받을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 같은 경우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노예가 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사건건 바가지나 긁어대며 괴롭히려 드는 여자가 아닌, 차분하고도 자의식에 찬 엄격함으로 상대를 다스릴 줄 아는 여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42쪽) 이런 이야기를 반다에게 건넨 적이 있던 제베린에게 반다는 바로 그가 찾던 이상적인 여인이었다. 그의 이 기묘한 부탁에 처음엔 난색을 표하던 반다는 점점 호기심이 발동하고 제베린의 부탁을 들어주기 시작한다.

모피는 권위의 상징이자 근엄함, 차가움의 상징이다. 반다는 모피를 입고 채찍을 들고 제베린을 가학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그런 행동에 머뭇거리던 반다는 조금씩 남을 학대하는 재미, 학대를 받으면서도 자기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쾌락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녀와 그는 노예 계약서까지 쓰고 심지어 노예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계약서에 제베린은 서명하게 된다. 반다는 제베린 앞에서 다른 남자와 어울리며 제베린을 하인처럼 부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제베린은 질투에 눈이 멀어 몸부림친다. 그녀가 그를 심하게 다룰수록 그의 고통도 커진다. 그리하여 그녀 곁을 떠나려고 시도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 곁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이 기묘한 사랑을 이해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 사람은 채찍을 들고 때리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채찍에 맞아 괴로워하면서 즐거워하는 다분히 변태적인(?) 이러한 행위를 흔히 SM이라 부르며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로 치부한다. 사전적 정의에서도 ‘변태’ ‘병적인 증상’이라고 단정적으로 나온다. 게다가 종종 ‘결혼 전까지 한 번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던 연인이 있었는데, 신혼 첫날밤 난리가 나서 헤어졌다. 알고 보니 남편이 가방에서 채찍을 꺼냈다하더라’ 등등 이런 음담패설 속 주인공으로 SM이 등장한다. 채찍으로 상징되는 SM은 변태적 성행위의 대명사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베린과 반다의 관계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인간의 관계를 살펴보자. 그들의 손에 채찍이 쥐어져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도 권력 관계는 다분히 존재한다.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약자라고. 반다와 제베린의 관계에서 더 많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제베린이다. 그는 남편이 되지 못한다면 하인으로, 노예로라도 그녀 곁에 머물고 싶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손엔 진짜 채찍이 들려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사랑은 평등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는 제베린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공감했다. 남을 학대하고 괴롭히면서 자기도 모르게 쾌감을 느끼는 반다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상처를 주면서 은근히 쾌감을 느꼈던 적은 누구나 한 번쯤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이들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채찍이 휘둘러졌던 것은 아닐까. 제베린 앞에서는 한없이 강자로 군림하지만 반다 또한 그녀가 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무참히 짓밟힌다.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이토록 잔인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채찍을 휘두르는 여자와 그 채찍에 맞아 희열을 느끼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자극적인 소재 때문에, 그 소재만으로 주목받는다면 조금 억울할 듯하다. 그런 자극적인 소재, 마조히즘의 유래가 된 작품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이 책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권력 관계에 대한 통찰이 뛰어난 작품으로 한 번쯤은 꼭 읽어볼 만하다.   

사랑은 미덕이나 이익 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 그것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이 우리를 이끄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발견한 상대의 장점이나 결점이 우리로 하여금 몸을 바치게 하거나 아니면 뒤로 선뜻 물러서게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이끄는 것은 달콤하고 멜랑콜리하고 신비로운 힘이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를 그친다. 우리는 그저 그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떠돌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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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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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은 좋은 책(혹은 글)이란 그 책이 읽는 이의 몸을 통과해 책을 읽고 난 후 읽은 이에게 생각이든 행동이든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정희진의 책(글)은 언제나 내게 ‘참으로’ 좋은 ‘글’이자 ‘책’이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이 그러했듯 <정희진처럼 읽기> 또한 앎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 알게 되었다는 것의 책임감을 느끼도록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도 그녀의 일관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정희진의 글을 읽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한번쯤은 멈추고 왜? 하는 의문을 품어보아야 할 듯하다.

정희진이 보기에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은 ‘서구/백인/남성/이성애’ 중심 언어이다. 우리는 그러한 언어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그 세계관을 또 당연하게 수용한다. 그러기에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는 일은, 기존의 세계관을 의심하고 반문하는 일이 된다.

나는 대학에서 어문학을 전공했고, 글을 쓰고 싶어 했고, 글과 관련된 일을 해왔으며 지금도 방향은 살짝 바뀌었지만 또 글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먹고사는 일관 상관없이 내 글을 쓰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언어에 예민해야 함은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내가 그렇게까지 언어를 사용하는 일에 예민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공해와도 같은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에 한몫했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예전에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을 때 충격이 상당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일에 그토록 무감각했던 내 자신을 꽤나 반성했다. 그런데도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나면 그런 기억은 또 희미해진다. 인간이란 그토록 간사하다. 그렇게 또 다시 무뎌질 즈음 <정희전처럼 읽기>를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축복과도 같으리라.

책 한쪽 한쪽 소중하게 읽었다. 그녀의 말과 글과 생각이 뼈 마디마디에 올올이 새겨지기를 바라면서. 읽는 내내 감탄하고 존경심이 일면서 한편으로는 부럽고 질투심이 일기도 했다. 이 사람은 정말 책을 제대로 잘 읽는구나, 이렇게 사유를 하는, 이토록 똑똑한 사람이라니!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사용하며 사는 일에 크게 감사하는 적이 그다지 없는데, 그녀의 글을 읽을 때면 그 사실에 무척 감사하게 된다.

책과 글을 읽기를 즐겨하고, 또 책과 글을 쓰며 살기를 원하는 삶에서 내게 이 책은 마치 경전과도 같으리라.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이다. (97)

작가를 꿈꾸지 않더라도 글쓰기와 말하기는 자신을 재현하는 것, 인생의 전부다. (138)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모든 앎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야)하며 따라서 글쓰기나 말하기(인문학)는 저자 개인에 대한 연설이다. 보편적 지식은 인식자가 자신을 인간의 대표라거나 우주, 신, 과학 등과 동격으로 간주할 때만 가능하다. 자신을 지배하는 정열이 사라질 때, 스스로에게 질문이 없을 때, ‘나는 정상’이라고 믿을 때, ‘지당하신 말씀’ ‘쉽게 읽히는’, ‘대중성’ 있는 글이 생산된다. (199)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빼어난 글을 쓰는 방법? 책상에 여덟 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있는 몸이 첫째다. (....) 특히 지식인, 운동선수, 예술가는 부자나 권력자와 달리 혼자만의 노동, 자신과의 결투가 성공에 절대적이다. (209)

여성의 언어는 없으며, 여성주의자는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다. (216)

우리 사회에서 여성학은 여성과 모든 타자를 종속적 범주로 만들려는 사회에 대한 비판 연구(feminist studies)라기 보다는 ‘여자(female)가 하는 공부’로 간주된다. (...) 양성 평등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 만들어지는 역사와 방법이다. (218)

인간의 매력은 말과 글을 따른다. 학력과 계층과 무관하게 10분만 말하는 태도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229)

은유의 대상이 되는 말(‘호수’, 성별, 지역....)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회 운동이다. (230)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31)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과 ‘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기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 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251)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278)

나는 처음부터 아니 인생에서 한 번도 나를 ‘저명한 백인 남성’ 인류학자와 동일시한 적이 없다. 이를 테면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에 이미 그것을 알았다. 밥상에는 깍두기를 먹는 사람과 깍두기 국물을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역할이든 윤리든 취향이든 그냥 버릴 수 없는 아까운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298)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않은 부분을 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곧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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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관하여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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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본 광경이다. 한 공원에서 수십 명의 남자들이 한 여자를 세워두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찍고 또 찍고. 보아하니 출사를 나온 사진 동호회 사람들 같다. 인물 사진 연습을 하는 것인지, 여자(피사체)를 세워놓고 계속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모델로 서 있는 여자의 기분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 사람은 사진 찍기에 응당한 금전적 대우(모델료)를 받고 그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지만 수많은 카메라 렌즈가 끔찍하게 여겨지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3자가 바라보기에 그 행위는 성적 행위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이 자세 저 자세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는 피사체와 그 피사체를 구석구석 훑는 카메라의 시선들- ‘카메라’라는 하나의 물질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사실 카메라는 바로 사진을 찍고 있던 남자들의 눈이다. 그녀는 카메라가 자신의 온몸을 훑는 것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을까?


아주 예전에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유행하던 시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가장 큰 ‘이상한 점’은 사람들이 사람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보통 ‘측근들’이라거나 ‘친구’라는 폴더 안에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지인의 사진을 ‘수집’(스크랩)해서 ‘공개(전시)’하고 있었다. 그 폴더 안에 담긴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듯이 자신과 조금이라도 상관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긁어다가 또 다른 타인들에게 보여주고(전시)있는 것이었다. 고인맥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이런 행위는 쉽게 이해가 간다. 자신의 인맥을 자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고, 한눈에 보기에도 유니크한 타인의 인물 사진을 스크랩하고 전시함으로써 나 또한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을-


사람 수집뿐만 아니라 우리는 ‘장소’도 수집한다. 여행을 가면 그 장소를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기 보다 ‘사진’으로 찍어서 카메라 안에 가둬두기 바쁘다. 내가 그곳에 다녀왔음을 누군가에게 ‘증명’하고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 훗날의 ‘추억’을 위해서도 열심히 찍어두어야 한다. 먼 훗날 그 사진을 열어보면 더욱 추억은 아름답게 기억이 된다. 빛바래지는 사진과 함께 기억조차 사진과 함께 조작되는 것이다.


거리 곳곳에서는 스마트폰 카메라는 물론 디지털 카메라로 이리저리 찍어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거리뿐만이 아니다,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심지어 극장에서도(!) 카메라 셔터 불빛은 멈추지 않는다. 이런 반면 카메라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많다. 거리에서 건물을 담고자 하는 낯선 타인의 사진에 내가 찬조 출연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시선들을 일일이 피하기엔, 카메라가 ‘너무’ 많다.


이런 카메라들은 좀 더 낯선 것 이국적인 것, 사람들이 잘 찍지 않는 풍경을 담아냄으로써 타인과 나의 남다른 시선을 뽐내보고자 좀 더 다른 풍경 속으로 잠입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이 서양인들이 담아내는 동양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카메라를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중간계급 이상의 사람들이 담아내는 도시 빈민가 사람들의 모습 등등-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 서울에서도 곧잘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출사를 간다고 하고, 서울의 뒷골목, 달동네, 빈민가를 향한다. 카메라로 그들의 삶을 담는다(아니 훔쳐낸다). 그리고 만족해한다. ‘잘 찍은 사진 한 장’ ‘예술처럼 보이는 멋진 사진 한 장’에 도시 뒷골목, 달동네 사람들의 삶은 쉽게 전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이미 찍힌 사진으로 빈민가 사람들의 삶을 봄으로써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삶의 고통이 희석되는 것이다.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다룬 사진들도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다가온다. 현실이지만, 카메라 렌즈를 통해 한번은 희석된 가짜 현실- 때문에 그 고통을 같이 나누기보다는 한번 봄으로써 소비해 버리고 마는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만다.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사진’이, ‘카메라’가 갖는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사진은 역사를 생략해버린다'거나 '사진 때문에 이 세계는 벽 없는 미술관 또는 백화점이 되었다'는 등의 주장을 통해 손택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현실을 구매하거나 구경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비판한다. '사진의 미학적 경향(피사체를 미화하는 경향) 탓에, 세상의 고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은 그 고통을 중화시켜 버린다. 카메라는 경험을 축소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킨다. 사진은 연민을 자아내는 것만큼 연민을 없애고 감정을 떼어낸다.'라는 손택의 지적은 우리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혹은 그렇게 멀리서 찾아 볼 필요도 없이 서울 뒷골목의) 빈민가 꼬마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나의 카메라에 담는 것이 과연 온당한 태도인가 생각해보게끔 한다.


사진은 실제를 기록한다는, 그래서 조작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심어준다. 하지만 '의도되지' 않은 사진이 과연 존재할까? 프레임 안에 어떤 모습을 담고자 할 때 이미 카메라를 든 사람의 의도는 ‘렌즈’를 통해 투영된다. 이런 모습은 담고 싶고, 저런 모습은 삭제해 버리고 싶고. 이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싶고, 혹은 그 반대로 존경할만한 인물처럼 보이게 찍고 싶고 등등. 사진은 그래서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를 확보한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반전 의식을 고취시켰던 베트남 전쟁의 참사 사진은 훌륭한 기록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지만 한국 전쟁의 기록 사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 전쟁은 ‘공산주의’와 ‘정의’의 싸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진은 있는 그대로 찍힌 것이기 때문에 진실할 것이라고 믿는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이미 사진은 렌즈를 통해 한번 희석된 ‘가짜’ 진실이다.


1994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케빈 카터(Kevin Carter)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1993)’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아프리카의 참상을 알린 보도 사진으로 전 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을 불러오기도 했다. 실제로 카터는 퓰리처상 수상 후 3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Kevin Carter, '수단의 굶주린 소녀'. 1993


카터의 이 사진이 과연 윤리적으로 온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994년에는 이 사진 한 장이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러한 사진이 넘치고 넘치는 요즘에도 과연 그러할까?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굶주린 아이들 사진은 하나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찍혀서 전 세계에서 소비된다. 우리는 이런 사진을 보면서 그들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저 먼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 아닌 현실, 이국적이면서도 아련한 하나의 ‘이미지’로 무심하게 소비하고 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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