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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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은 좋은 책(혹은 글)이란 그 책이 읽는 이의 몸을 통과해 책을 읽고 난 후 읽은 이에게 생각이든 행동이든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정희진의 책(글)은 언제나 내게 ‘참으로’ 좋은 ‘글’이자 ‘책’이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이 그러했듯 <정희진처럼 읽기> 또한 앎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 알게 되었다는 것의 책임감을 느끼도록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도 그녀의 일관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정희진의 글을 읽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한번쯤은 멈추고 왜? 하는 의문을 품어보아야 할 듯하다.

정희진이 보기에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은 ‘서구/백인/남성/이성애’ 중심 언어이다. 우리는 그러한 언어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그 세계관을 또 당연하게 수용한다. 그러기에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는 일은, 기존의 세계관을 의심하고 반문하는 일이 된다.

나는 대학에서 어문학을 전공했고, 글을 쓰고 싶어 했고, 글과 관련된 일을 해왔으며 지금도 방향은 살짝 바뀌었지만 또 글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먹고사는 일관 상관없이 내 글을 쓰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언어에 예민해야 함은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내가 그렇게까지 언어를 사용하는 일에 예민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공해와도 같은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에 한몫했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예전에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을 때 충격이 상당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일에 그토록 무감각했던 내 자신을 꽤나 반성했다. 그런데도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나면 그런 기억은 또 희미해진다. 인간이란 그토록 간사하다. 그렇게 또 다시 무뎌질 즈음 <정희전처럼 읽기>를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축복과도 같으리라.

책 한쪽 한쪽 소중하게 읽었다. 그녀의 말과 글과 생각이 뼈 마디마디에 올올이 새겨지기를 바라면서. 읽는 내내 감탄하고 존경심이 일면서 한편으로는 부럽고 질투심이 일기도 했다. 이 사람은 정말 책을 제대로 잘 읽는구나, 이렇게 사유를 하는, 이토록 똑똑한 사람이라니!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사용하며 사는 일에 크게 감사하는 적이 그다지 없는데, 그녀의 글을 읽을 때면 그 사실에 무척 감사하게 된다.

책과 글을 읽기를 즐겨하고, 또 책과 글을 쓰며 살기를 원하는 삶에서 내게 이 책은 마치 경전과도 같으리라.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이다. (97)

작가를 꿈꾸지 않더라도 글쓰기와 말하기는 자신을 재현하는 것, 인생의 전부다. (138)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모든 앎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야)하며 따라서 글쓰기나 말하기(인문학)는 저자 개인에 대한 연설이다. 보편적 지식은 인식자가 자신을 인간의 대표라거나 우주, 신, 과학 등과 동격으로 간주할 때만 가능하다. 자신을 지배하는 정열이 사라질 때, 스스로에게 질문이 없을 때, ‘나는 정상’이라고 믿을 때, ‘지당하신 말씀’ ‘쉽게 읽히는’, ‘대중성’ 있는 글이 생산된다. (199)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빼어난 글을 쓰는 방법? 책상에 여덟 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있는 몸이 첫째다. (....) 특히 지식인, 운동선수, 예술가는 부자나 권력자와 달리 혼자만의 노동, 자신과의 결투가 성공에 절대적이다. (209)

여성의 언어는 없으며, 여성주의자는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다. (216)

우리 사회에서 여성학은 여성과 모든 타자를 종속적 범주로 만들려는 사회에 대한 비판 연구(feminist studies)라기 보다는 ‘여자(female)가 하는 공부’로 간주된다. (...) 양성 평등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 만들어지는 역사와 방법이다. (218)

인간의 매력은 말과 글을 따른다. 학력과 계층과 무관하게 10분만 말하는 태도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229)

은유의 대상이 되는 말(‘호수’, 성별, 지역....)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회 운동이다. (230)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31)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과 ‘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기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 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251)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278)

나는 처음부터 아니 인생에서 한 번도 나를 ‘저명한 백인 남성’ 인류학자와 동일시한 적이 없다. 이를 테면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에 이미 그것을 알았다. 밥상에는 깍두기를 먹는 사람과 깍두기 국물을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역할이든 윤리든 취향이든 그냥 버릴 수 없는 아까운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298)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않은 부분을 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곧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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