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하여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본 광경이다. 한 공원에서 수십 명의 남자들이 한 여자를 세워두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찍고 또 찍고. 보아하니 출사를 나온 사진 동호회 사람들 같다. 인물 사진 연습을 하는 것인지, 여자(피사체)를 세워놓고 계속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모델로 서 있는 여자의 기분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 사람은 사진 찍기에 응당한 금전적 대우(모델료)를 받고 그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지만 수많은 카메라 렌즈가 끔찍하게 여겨지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3자가 바라보기에 그 행위는 성적 행위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이 자세 저 자세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는 피사체와 그 피사체를 구석구석 훑는 카메라의 시선들- ‘카메라’라는 하나의 물질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사실 카메라는 바로 사진을 찍고 있던 남자들의 눈이다. 그녀는 카메라가 자신의 온몸을 훑는 것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을까?


아주 예전에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유행하던 시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가장 큰 ‘이상한 점’은 사람들이 사람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보통 ‘측근들’이라거나 ‘친구’라는 폴더 안에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지인의 사진을 ‘수집’(스크랩)해서 ‘공개(전시)’하고 있었다. 그 폴더 안에 담긴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듯이 자신과 조금이라도 상관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긁어다가 또 다른 타인들에게 보여주고(전시)있는 것이었다. 고인맥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이런 행위는 쉽게 이해가 간다. 자신의 인맥을 자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고, 한눈에 보기에도 유니크한 타인의 인물 사진을 스크랩하고 전시함으로써 나 또한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을-


사람 수집뿐만 아니라 우리는 ‘장소’도 수집한다. 여행을 가면 그 장소를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기 보다 ‘사진’으로 찍어서 카메라 안에 가둬두기 바쁘다. 내가 그곳에 다녀왔음을 누군가에게 ‘증명’하고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 훗날의 ‘추억’을 위해서도 열심히 찍어두어야 한다. 먼 훗날 그 사진을 열어보면 더욱 추억은 아름답게 기억이 된다. 빛바래지는 사진과 함께 기억조차 사진과 함께 조작되는 것이다.


거리 곳곳에서는 스마트폰 카메라는 물론 디지털 카메라로 이리저리 찍어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거리뿐만이 아니다,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심지어 극장에서도(!) 카메라 셔터 불빛은 멈추지 않는다. 이런 반면 카메라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많다. 거리에서 건물을 담고자 하는 낯선 타인의 사진에 내가 찬조 출연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시선들을 일일이 피하기엔, 카메라가 ‘너무’ 많다.


이런 카메라들은 좀 더 낯선 것 이국적인 것, 사람들이 잘 찍지 않는 풍경을 담아냄으로써 타인과 나의 남다른 시선을 뽐내보고자 좀 더 다른 풍경 속으로 잠입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이 서양인들이 담아내는 동양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카메라를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중간계급 이상의 사람들이 담아내는 도시 빈민가 사람들의 모습 등등-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 서울에서도 곧잘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출사를 간다고 하고, 서울의 뒷골목, 달동네, 빈민가를 향한다. 카메라로 그들의 삶을 담는다(아니 훔쳐낸다). 그리고 만족해한다. ‘잘 찍은 사진 한 장’ ‘예술처럼 보이는 멋진 사진 한 장’에 도시 뒷골목, 달동네 사람들의 삶은 쉽게 전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이미 찍힌 사진으로 빈민가 사람들의 삶을 봄으로써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삶의 고통이 희석되는 것이다.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다룬 사진들도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다가온다. 현실이지만, 카메라 렌즈를 통해 한번은 희석된 가짜 현실- 때문에 그 고통을 같이 나누기보다는 한번 봄으로써 소비해 버리고 마는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만다.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사진’이, ‘카메라’가 갖는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사진은 역사를 생략해버린다'거나 '사진 때문에 이 세계는 벽 없는 미술관 또는 백화점이 되었다'는 등의 주장을 통해 손택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현실을 구매하거나 구경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비판한다. '사진의 미학적 경향(피사체를 미화하는 경향) 탓에, 세상의 고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은 그 고통을 중화시켜 버린다. 카메라는 경험을 축소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킨다. 사진은 연민을 자아내는 것만큼 연민을 없애고 감정을 떼어낸다.'라는 손택의 지적은 우리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혹은 그렇게 멀리서 찾아 볼 필요도 없이 서울 뒷골목의) 빈민가 꼬마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나의 카메라에 담는 것이 과연 온당한 태도인가 생각해보게끔 한다.


사진은 실제를 기록한다는, 그래서 조작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심어준다. 하지만 '의도되지' 않은 사진이 과연 존재할까? 프레임 안에 어떤 모습을 담고자 할 때 이미 카메라를 든 사람의 의도는 ‘렌즈’를 통해 투영된다. 이런 모습은 담고 싶고, 저런 모습은 삭제해 버리고 싶고. 이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싶고, 혹은 그 반대로 존경할만한 인물처럼 보이게 찍고 싶고 등등. 사진은 그래서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를 확보한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반전 의식을 고취시켰던 베트남 전쟁의 참사 사진은 훌륭한 기록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지만 한국 전쟁의 기록 사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 전쟁은 ‘공산주의’와 ‘정의’의 싸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진은 있는 그대로 찍힌 것이기 때문에 진실할 것이라고 믿는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이미 사진은 렌즈를 통해 한번 희석된 ‘가짜’ 진실이다.


1994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케빈 카터(Kevin Carter)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1993)’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아프리카의 참상을 알린 보도 사진으로 전 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을 불러오기도 했다. 실제로 카터는 퓰리처상 수상 후 3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Kevin Carter, '수단의 굶주린 소녀'. 1993


카터의 이 사진이 과연 윤리적으로 온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994년에는 이 사진 한 장이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러한 사진이 넘치고 넘치는 요즘에도 과연 그러할까?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굶주린 아이들 사진은 하나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찍혀서 전 세계에서 소비된다. 우리는 이런 사진을 보면서 그들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저 먼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 아닌 현실, 이국적이면서도 아련한 하나의 ‘이미지’로 무심하게 소비하고 마는 것은 아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