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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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테니스 선수 가운데 ‘노박 조코비치’가 있다. 워낙 뛰어난 선수라 테니스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의 이름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동네에서 허물어진 담벼락에 공을 튀기며 테니스 연습을 한 기억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한 수많은 인터뷰 중에서 왜 유독 이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 무너진 담벼락에 테니스공을 튕기는 어린 소년의 모습…….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나라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는 있었을까? 세계 랭킹 1위를 밥 먹듯이 하는 선수임에도 그는 이상하게 ‘페더러’나 ‘나달’에 비해서는 스폰서가 많이 붇지 않는다. 그 두 선수에 비해 인기도 떨어지는 편이다. 그 이유를 조코비치가 태어난 나라, ‘출신’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이제는 사라진 나라, 유고슬라비아 ‘출신’이고 현재는 ‘세르비아 ’ 선수로 분류된다.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코소보 전쟁 당시 세르비아의 독재자이자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로 말미암아 일어난 각종 전쟁범죄로 국제사회, 특히 유럽에서 치명적으로 이미지에 손상을 입었고, 아직도 그 이미지는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1987년에 태어난 조코비치가 성장기 내내 내전을  감당해야만 했던 일도, 세르비아 ‘출신’이라는 사실도 결코 그의 뜻은 아닐 것이다. 그저 ‘우연’일 뿐이다.



우리 모두의 고향은 우연에 의해 탄생한다. 이런 우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운이 좋다. 자기 집을 떠날 수 없어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운이 없다. 그러나 떠나고 싶지 않아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운이 좋다. 본인이 살고 싶은 곳에 살 수 있는 소원을 이루는 사람은 운이 좋다. (<출신>, 165쪽)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사샤 스타니시치’ 그 또한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현재 그가 태어난 나라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 나라가 존재할 때만 해도 스스로 유고슬라비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르비아 출신이 아버지와 보스니아-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어머니처럼. 하지만 그는 지금도 자신을 소개할 때 유고슬라비아 사람이라고 이야기할까? 사라진 조국,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 어디쯤……. 태어나 나고 자란 자신의 나라가 사라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로서는 좀처럼 가늠하기 어렵다. 분명 그 땅은 그대로 있는데, 그 땅을, 공간을 포함한 ‘국가’라는 실체는 사라진 현실. 해마다 11월 29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수립된 그날이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유고슬라비아풍 분위기가 가득한 여러 상징적인 장소에 모여든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이제는 모두 먼 전설 속 이야기, 전설 속의 용과 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질 뿐이다.

<출신>이라는 어찌 보면 조금 촌스러운 제목의 이 책은 이제 사라진 나라 유고슬라비아 출신인 ‘사샤 스타니시치’ 그가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 한때 성장하고 꿈을 꾸었을 그 나라를 이야기한다. 그는 그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떠나온 지 오래이며,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치매를 앓으며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 죽음을 앞둔 할머니를 마주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기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혈통과 출생지가 분류 기준의 특징으로 이용’되고 ‘국경선이 새로 정해지고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립된 나라의 메마른 늪에서 국익이 등장하는 시대’, 그리고 ‘타민족 배척이 정책 프로그램으로 다시 채택될 가능성이 높은 시대’에 그 자신과 그의 가족의 ‘출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진부하고 참으로 파괴적인 것처럼 생각’ 되더라도 그는 그 이야기를 지금 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의 흐려지는 기억과 마주한 지금이 바로 그 적기이다. 그가 출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질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장소를 결정하는 데에도, 가족이 있는 곳에 결코 함께 살지 못하는 데에도 이 ‘이질성’이 오랜 세월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는 전쟁도 하나의 출신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세르비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를 넘어 독일로 도망쳐서 1992년에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다. 아버지는 세르비아 국경 너머로 그들을 데려다주고 비셰그라드로 돌아가 할머니 곁을 지킨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아버지도 독일로 뒤따라왔다. 발칸에서 도망쳐 온 그의 아버지는 독일어를 하지 못한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정치학자였던 어머니는 큰 세탁 공장에 떨어져 5년 반 동안 뜨거운 수건에 파묻혀 살았고, 경영학자였던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일한다. 그렇지만 이 삶마저도 불안정해서 1998년, 어머니와 아버지는 인종 청소를 자행하는 비셰그라드로 추방되기 전에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한다. 그리고 현재 부모님은 미국 연금생활자 신분으로 연금을 받으며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선 늘 1년씩밖에 체류할 수 없다. 조국은 사라지고 가족은 흩어지고 계속해서 어딘가를 떠돌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삶. 이것이 모두 그들이 바란 삶일까? 아니다, 그저 ‘우연’일 뿐이다.

서른다섯 살 때 그의 어머니는 비셰그라드에서의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름다운 추억, 성공, 개인적인 행운으로 넘쳐났던 장소를 떠나 그곳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의 어머니는 사샤 스타니시치, 그처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꾸며낸 이야기’로 채우지는 않는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어머니에게 출신은 ‘고향 땅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움찔하는 몸짓’과 같다(162쪽). 그런데 정말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일까? 추억과 성공, 행운으로 넘쳐났던 장소를 떠나,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일이 그저 지나간 일일뿐일까. 아마도 머리로 기억하고 몸에 각인된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될 때면 늘 움찔하게 되지 않을까.

조국에서는 엘리트였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낯선 나라를 떠돌며 노동 계층 사다리에서 가장 아래 단계에 놓인 삶을 살아갔던 것만큼 ‘나’의 삶 또한 쉽지만은 않다. 작가로서 독일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하고 발칸반도 출신임에도 사회에 잘 적응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갈 일원임을 또 ‘증명’해야 한다. 예의 바른 사람이며 ‘체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세르보크로아트어로 이야기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독일어로 얘기하라는 강요를 받는 등 사람들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모든 규칙’을 상기시킨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그들에게 늘 ‘이곳에서 너희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화약고 같은 발칸반도 출신이기에, 사라진 나라 유고슬라비아 출신이기에 그의 가족들은 편견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공격적이고 야만스럽고 불법적이지 않은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배운다. ‘알뿌리와 싹. 다른 식물에 붙어사는 식물’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유고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유고 사람이 아닌 친구들에게 그가 유고에서 어떤 종족에 속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유고 사람들 대부분은 ‘출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감당할 수 없는 차별들…….

그러나 <출신〉은 나라 잃은 민족, 나라 잃은 사람에 대한 차별과 그들 삶의 어려움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샤 스타니시치의 할머니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여든일곱 살이지만 때로는 열한 살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일곱 살 소녀이다. 할머니의 서서히 사라져 가는 기억 속에서는 비셰그라드에서의 행복했던 삶,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그래서 행복했다고 기억할 순간순간들이 펼쳐진다. 할머니로 인해 ‘나’ 또한 멀리 떨어져 기억에서 사라져가던 추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 기억 속에는 할아버지도 있다. 할아버지는 용을 퇴치한 전설 속 용사 게오르기우스를 숭배하는 마을 출신이다. 잊고 지낸 용 모양 펜던트나 용 모티브 자수, 용을 닮은 양초 등등을 보며 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할머니와 손을 잡고 유년 시절, 이제 사라진,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파편화되어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 어쩌면 이제는 기억조차 사라져서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할머니는 마음에 품고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 수많은 기억과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이제는 사라진 유고슬라비아, 그 땅 곳곳에서 흩어져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전설에서나 만날 수 있는 한 마리의 용처럼 또 다른 전설이 되어갈 것이다. ‘옛날 옛적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로 시작될 전설. 그 이야기들이 완전히 잊혀 쓸 이야기가 하나도 없어지기 전에, 조금씩 복원해 기록되어 추억할 수 있는 하나의 전설이 되기를,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 고향을 떠나온 난민의 자녀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자녀를 두고 그 아이들이 세계 곳곳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금, 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그래서 조금이나마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기를, 무언가를 잃어버린 그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 아닐지. ‘옛날 옛적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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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5-07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잠자냥님. 제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고 읽기를 포기할까 수차례 생각하는데,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리뷰네요. 역시 리뷰는 잠자냥 님 표가 최고인 것 같아요. 리뷰를 보니 너무 근사한 책인데 제가 못읽고 있어서 답답할 따름입니다. 이 리뷰를 읽고나니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자 생각하게 됩니다. 힘낼게요!!

잠자냥 2020-05-07 15:13   좋아요 0 | URL
우와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을 만들었다니 그것만으로도 뿌듯합니다.
힘내요! ㅎㅎ

단발머리 2020-05-20 1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오늘 리뷰대회 발표 보고 왔어요. 헤헤헤~~ 1등 진심 축하드립니다!! 제가 축하인사 1등 같아요. 그것도 축하해주세요!

잠자냥 2020-05-20 22:10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 완전 감사합니다~~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 창비세계문학 47
후안 마르세 지음, 한은경 옮김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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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상대와 관련해서 자기가 만들어낸 어떤 환상을 좋아하고 그 모습에 반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그 환상이 서서히 부서지고 자신이 생각지 못했던 현실과 맞닥뜨리게 됐을 때, 이른바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사랑의 실체를 마주하고는 당황해하고 그 상대로부터 멀어진다. 그렇게 인간의 사랑은 환상에서 시작되어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서서히 식어가서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다 타버린 뒤의 재만 남는다.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에도 그런 사랑이 있다. ‘마지막 오후’라는 제목에서 우리는 이 사랑이 결국 지나가 버릴 것임을. 찬란한 해가 저물기 시작한 오후 다섯 시쯤의 그 빛바랜 시간의 사랑이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떼레사’와 ‘마놀로’ 또한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애초부터 서로의 ‘실체’가 아닌 그 두 사람 각자가 만들어낸 환상을 사랑하게 된다. 그렇다한들 그 누가 이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물 그즈음,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그 젊은 날에 두 사람은 불꽃처럼 한 여름을 함께 보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저마다 기억 속에 그 여름의 한때를 추억하지 않을까. 오후 다섯 시 석양이 질 무렵이면 언제나.

가진 것이라고는 눈부신 외모와 젊음 그 하나뿐인 ‘마놀로 레예스’는 1956년 6월 성 요한 축제의 전날 밤 새로 마련한 진갈색 여름 정장을 입고 동네 어둠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그날 그의 목표는 정확하다. 어느 부잣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인 냥 거리낌 없이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면서 부잣집 아가씨 하나를 낚아 올리는 것이다. 그의 별명은 ‘삐호아빠르떼’ 우리말로 옮기자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속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목이 마르다. 이 변두리 촌구석 가난뱅이들만 사는 동네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잣집 여자를 낚는 수밖에는 없다. 이렇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으로는 결국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뻔하니까. 친구 베르나르도는 이미 글러먹은 놈이다. 어리석게도 여자친구를 임신시키고 결혼하고 일자리를 구해 정비소나 공장에서 썩는 삶, 대다수의 이 변두리 하층민들이 사는 인생을 그 또한 따르겠다는 게 아닌가. 임금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서로의 등골을 빼먹으며 평생 살아가는 그런 삶은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

부르주아들이 벌이고 있는 파티 장소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마놀로는 한순간에 목표물을 포착한다. 두 여자애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처음부터 눈에 들어왔던 여자애는 자리를 뜬다. 아쉬운 대로 두 번째 여자애에게 다가간다. 일은 그가 바람대로 척척 진행되어 키스까지 성공. 왠지 쉽게 풀린다. 얼마 뒤 이 여자애가 부모님과 함께 와 있는 여름 별장을 알게 되고 어느 으슥한 밤, 여자애의 침실에 몰래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여자애 또한 마놀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일은 일사천리로 풀려간다. 열정이라는 이름 아래 부끄러움을 벗어버린 두 젊은 육체가 부딪치고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여기까지 정말 정신없이 읽었다. 이 책을 손에 집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런데 조마조마하게 마음속에서 뭔가 저항감이 밀려온다. 떼레사! 그러면 안 돼. 그놈은 말이지, 마놀로 그놈은 다 꿍꿍이가 있어서 너에게 접근한 거야. 이 아가씨야 정신 차려! 이 부잣집 아가씨 정말 숙맥이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 이 나쁜 놈, 그러니까 오토바이 도둑질로 근근이 먹고 살아가면서 잘 생긴 외모 하나 믿고서는 여자애들 보기를 아주 뭣같이 여기는 이 나쁜 놈은 떼레사 너를 사랑한다고 꾀어서 목적을 이루고는 뻥 차버릴 거야! 조심해 정신 차려! 이렇게 줄곧 마음속으로 떼레사에게 경고를 보낸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 뜨거운 밤이 지나고 어스름하게 새벽하늘이 밝아올 무렵 깊은 잠에서 깬 마놀로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온다. 아니, 저것은 하녀의 옷이 아닌가? 떼레사가 메이드놀이를 했을 리도 없고........ 그렇다, 마놀로가 부잣집 아가씨라고 생각했던 그 여자애는 부잣집 아가씨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녀 ‘마루하’였던 것이다. 마놀로만큼이나 나도 충격을 받는다.   

잠든 마루하를 깨워 길길이 날뛰며 왜 자신을 속였느냐고 분노하는 마놀로. 너 같은 하녀가 어떻게 파티에서, 부잣집 귀한 자제들만 노는 파티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었느냐고 다그친다. 여기서 일단 떼레사 아가씨의 성격이 한 번 드러난다. 우리 아가씨는 원래 그래. 떼레사는 계급? 그런 거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보다 낮은 계급에 속한 이들에게 아량을 보일 줄 아는 너그러운 부잣집 아가씨인 것이다. 달뜬 밤이 지나고 무너진 꿈 앞에서 그저 허망한 마놀로. 그는 눈물 맺힌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루하의 눈빛에서 ‘심오하고 추접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이대로 연인으로 지내자는, ‘가난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이다. 그 눈빛은 ‘불행을 눈물로 호소하는 따스한 우애와, 동병상련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위안이 담긴 그런 눈빛’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삐호아빠르떼를 두렵게 만든, 그래서 평생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싸워야 했던 포기와 체념’이라는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여기까지가 이 작품의 1부이다. 2부와 3부는 어떻게 그려질지 독자들도 얼마쯤 예상가능하다. 마루하와 그녀가 모시는 아가씨 떼레사. 마루하가 아닌,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라는 제목을 보면 이 ‘삐호아빠르떼’ 마놀로가 떼레사를 유혹해서 사랑에 빠지고 보기 좋게 이용해먹다가 차버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그런 공식으로 흐르지 않는다. 물론 마놀로와 떼레사가 서로 사랑하게 되기는 한다. 그러나 떼레사 이 아가씨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신분상승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여자들을 유혹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마는 <적과 흑>의 ‘쥘리엥 소렐’이나 <벨아미>의 ‘조르주 뒤루아’ 같은 속물 바람둥이들의 희생양이 되는 그런 마나님들하고는 많이 다르다. 한편 마놀로는 ‘쥘리엥 소렐’이나 ‘조르주 뒤루아’하고는 닮은 듯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아마도 그것은 이 두 사람 사이의 놓인 계급 차이가 과거 ‘쥘리엥 소렐’이나 ‘조르주 뒤루아’와 그들의 연인들 사이의 그것보다도 더 좁힐 수 없을 만큼 공고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부(富)'로 더 건너기 어려운 계급이 생겼다. 1950년대 스페인도 마찬가지이다. 마놀로가 자기 계급을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마놀로 레예스는 가난한 동네에서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로 태어난다. 마놀로의 신분 상승 욕구는 어릴 때부터 대단했는데, 그의 엄마는 어느 후작의 대저택에서 하녀로 일했다. 그녀는 과부 상태에서 임신했고, 청소를 하는 와중에 마놀로를 낳은 바람에 후작집에서 아이를 막 낳은 이 여인을 돌봐줄 수밖에 없었다. 마놀로는 자연스레 그때부터 자신이 후작이 숨겨진 사생아라는 환상을 품고 자란다. 유아기에 마놀로는 자신의 오두막집과 후작의 대저택에 딸린 호화건물을 오가며 자랐다. 후작의 대저택에서 그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 다니며 그녀가 닦는 바닥의 반짝거리는 타일 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자신은 쌀바띠에라 후작의 아들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조금 더 자란 마놀로가 관광 가이드 일을 할 때 그는 외모와 품행에 유달리 신경을 쓰고 다닌 덕에 동료들로부터 ‘후작’이라는 별명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 별명을 만든 이가 마놀로 그 자신이며, 또 그 별명을 퍼뜨리기 위해 그가 꼼수를 부린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제아무리 별명이 후작이고, 후작의 아들일 것이라는 망상에 가까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그의 현실은 오토바이 좀도둑이며 그런 도둑질로는 가난한 동네를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런 와중에 잡힐 듯 말 듯 환영과도 같은 아름다운 여대생을 향한 그의 커져가는 관심은 막을 수가 없다. 떼레사의 동작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무심함은 돈에 대한 여유와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감, 강렬하고 열정적이면서 유망한 내적 삶의 표시이다. 응석받이로 태어난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마루하는 물론 자기 동네의 가난한 여자애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매력이다. 어느덧 원래 목적은 잊고 진심으로 떼레사를 사랑하게 되는 마놀로. 하지만 부잣집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도 그 거리는 좀처럼 좁힐 수가 없다. 흙탕물이 고인 웅덩이가 그 앞에 놓였을 때 떼레사는 살짝 돌아서 갈 ‘여유’가 있지만 그는 그저 발을 첨벙첨벙 담그고 건널 수밖에 없다. 인생 자체가 시궁창인데, 그까짓 흙탕물이 눈에 무슨 대수이랴.

그런데 떼레사는 대체 왜 이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남자에게 반하게 된 것일까? 오직 그 잘생긴 외모 때문일까? 모든 것을 다 가진 남부러울 것 없는 이 아가씨에게도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가난’이다. 그녀는 가난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가난을 동경한다. 책으로만 프롤레타리아 계급,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공부’한 이 부르주아 아가씨는 민중의 삶을 몸소 경험하고 싶어서 가난을 동경한다. 가난마저 경험으로 삼는 부잣집 아들딸들이 지금도 있지 않은가. 떼레사는 우리나라 말로 하면 이른바 ‘캐비어좌파’ 아니, ‘강남좌파’라고 해야 할까. 그 시절 대학생들이 다들 그러듯이 떼레사 또한 학생운동에 투신하고 노동자의 삶을 동경해 공장 노동자들이 자주 모이는 곳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런 그녀에게 마놀로는 “눈빛도 그렇고. 생각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다. “그러니까 자기 계급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난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거”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떼레사가 마놀로와 사랑에 빠진 것은 그를 혁명적 이상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의 리더’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환상은 결국 깨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너희 동네에 사는 민중의 삶은 멋지고 재미있을 거야. 여름밤이면 카페에서 동료들과 논쟁을 벌이고…….”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민중이야. 여름밤이 뭐 어째? 우리 동네에는 따분함과 가난만 있을 뿐이야.”
“그래 너희 동네는 정말 환상적이야.” (248쪽)


사람들이 행사하는 권력의 속성은 바로 우리가 처한 상황의 속성만큼이나 모호하다. 그 속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지 그것이 모순된 생각들에서 비롯된다는 것뿐이다. 초창기 학생운동에는 뭔가 자위행위 같은 면이 있었다. (359쪽)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는 이렇게 신분은 사라졌지만 계급은 더 선명해진 1950년대 스페인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두 계급에 속한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리면서 진보적인 부르주아 대학생들의 위선과 가난한 하층계급의 도덕적 파탄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보면 후자보다는 전자에 대한 비판이 더 크게 느껴지기는 한다. ‘부유한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거나 커스터드를 곁들인 아침식사를 하면서 아주 모순되게도 부유한 부친에 대한 씁쓰레한 악감정과 기업가인 형이나 사촌 또는 헌신적인 숙모에 대한 경멸감을 표출’하는 쁘띠부르주아 좌파 운동권 대학생들. 그들에게 시위는 위험하기에 스릴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놀이는 아니었을까. 그 시위로 말미암아 감옥에 갔다온다한들 그들의 미래는 찬란하기만 하다. 부자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거나 감옥에 다녀온 것을 훈장처럼 달고 정치계에 뛰어들거나 등등. 이 쁘띠부르주아들에게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결국 마놀로와 그가 속한 세계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떼레사, 그들로부터 ‘민중의 춤에서 볼 수 있는 직선적이고 건전한 흥겨움’ 대신 ‘겨드랑이 암내와 남몰래 숨어서 하는 의기소침한 발정’(405쪽)만을 발견한 떼레사. 그래서 떼레사는 어느 날 마놀로의 소식을 듣고 그토록 덧없이 웃고 말았을 것이다. 떼레사는 다시 그 부의 길, 안락함의 길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후작의 아들이기를 꿈꾸던, 삐호아빠르떼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은 그리 녹록치 않아 보인다. ‘부자들은 돈과 지성과 건강한 피부색 영속적인 미소까지 상속받는’ 것에 비해 ‘가난한 이들은 썩은 치아와 납작한 이마와 휘어진 다리를 상속’받고(377쪽) 떼레사와 같은 부잣집 아이들이 지닌 ‘기품 있고 교양 있고 우아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그 세계’를 가지는 것은 쉽지 않을 거란 깨달음을 얻은, 아니 애초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떼레사에게 마루하를 대하듯이 쉽게 육체적으로 다가서지 못했던 마놀로. 그저 스포츠카를 타고 시속15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는 자유, 오직 그것만을 바랐던 삐호아빠르떼의 꿈은 그 옛날의 ‘쥘리엥 소렐’이나 ‘조르주 뒤루아’의 꿈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들이 그토록 쉽게 건넜던 육체의 경계를 마놀로가 결국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은, 사랑과 섹스마저도 ‘계급’의 뒤로 밀리고 마는 씁쓸한 풍경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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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4-29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대학다닐 때 책대여점에서 이 책 빌려 읽었거든요. 지난번 말씀드렸듯이 [여대생과 좀도둑]이란 제목이었어요.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고민없이 빌려 읽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당시에 편의점 알바 같이 하던 친구에게 재미없다고 말한 기억이 나는데, 잠자냥 님 리뷰 읽어보니 아니, 이거 왜 재미없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니 지금 읽으면 확실히 다른 감상을 갖게 되겠죠. 저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님처럼 좋아하게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착각‘과 ‘환상‘ 이야기 하시며 예로든 인용문이요, 특히 248쪽 참 재미있네요. 상대의 말을 안듣잖아요. 내 환상만 고집하잖아요. 따분함과 가난만 있다고 하는데도, ‘정말 환상적이야‘라는 응대라니.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실 대부분의 인간 관계란게 이렇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그러다 환상이 깨지면 상대에게 화를 내죠. 실상 그 환상에 빠져산건 ‘내가‘ 한 일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저도 조만간 꼭 읽어볼게요. 아니, 이렇게 얘기하고 산 책이 몇 권인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냥 집에 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0-04-29 14:16   좋아요 0 | URL
네, 안 그래도 제 서재 이웃분이 이 책 추천해서 저도 읽었는데, 그분이 이 작가 작품은 <떼레사와 함께한 오후> 이 책 제외하고는 <여대생과 좀도둑> 한 권만 번역되어 있는데, 그마저도 절판이라고 하셔서 찾아보니 원제가 같더라고요. 암튼 이 작가의 문체나 이야기 풀어나가는 방식이 아주 흥미로웠어요. 제가 20년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아마 그냥 대중 연애소설이려니 했을 거 같기도 해요. ㅎㅎ

248쪽 인용문은 중간에 좀 생략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계속 저래요. ㅋㅋㅋㅋ 가난한 동네가 멋지다고 하고...(전 저 대화에서는 마놀로의 말이 더 공감이 갔습니다.ㅎㅎㅎ)

2020-05-06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6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7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7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7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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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몇 개의 풍경이 떠올랐다.

첫 번째 풍경. 대학 신입생 때 몇 번 보지 않았는데도 호감을 느낀 선배가 있었다. 당당하고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성격도 서글서글했던 그 선배. 나보다 몇 학번 위인 선배는 학교에 가면 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과방에서는 잘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가 “나는 주로 저기 있다”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총여학생회’였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생에게 총여학생회는 참 신기한 공간이었다. 배고프거나 술 마시고 싶으면 언제나 그곳으로 오라던 선배, 알고 보니 선배는 우리 학교 총여학생회장이었다. 학교를 싫어했던 나였음에도 학교에 갈 때마다 총여학생회실 문을 열고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매춘의 역사> 같은 책을 읽었고, 그 선배가 권해준 페미니즘 관련 책이나 선배의 생각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곳에는 선배와 비슷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주로 술을 마시면서 함께 지내다 보니 그곳은 내가 학교에서 드물게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고, 또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는 총여학생회 꼬마 선전부장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선전부장을 맡은 선배의 조수 정도랄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수요집회를 나가게 되었고 엄마 몰래 기활(기지촌활동)을 다녀오기도 했다. 기활을 간다는 말을 엄마한테는 끝내 숨긴 이유를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니 그때도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안다. 아마도 <매춘의 역사>를 읽을 때 집에서는 숨겼던 것과 마찬가지 심리였을 것이다. ‘절대 그런 게 아닌데 왠지 그런 것’으로 오해받을까봐 아예 숨기는 그런 마음. 그런 활동을 하다가 이상한 마음이 싹텄다. 총여학생회실에 진을 치고 살던 그 선배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당찼는데, 수요집회에서 만난 할머니나 기활에서 만난 여성의 삶과는 무언가 괴리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이런 활동’을 하는데, 그들의 삶이 정말 좋아지는 걸까? 나아지는 걸까? 우린 혹시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만족감, 그들을 어딘가로 이끈다는 느낌, 그 엘리트 의식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문득 내게 그런 의혹이 찾아왔다.

두 번째 풍경. 지인 중에 CEO 자리에 오른 분이 있다. 평사원으로 시작해 그 회사 회장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음에도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회사 대표 자리에 오른 분이다. 그분은 주변 여직원들의 본보기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그분이 그런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다른 평범한 여직원들도 언젠가는 자기도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또 다른 여성들의 희생이 자리한다. 그분의 자식을 돌보는 일은 다른  여성 가족 구성원(시어머니, 친정엄마, 시누이 같은)의 손에 맡겨졌고, 어느 정도 연봉이 오른 뒤에는 가사도우미 여성의 손에 그 일은 넘겨졌다. 지금도 그분 집안일은 가사도우미 여성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그분은 많은 연봉을 받겠지만, 그분 집안일을 돌보는 또 다른 여성이 얼마나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가끔 그분은 미투사건과 관련해서는 여느 남성과 마찬가지 발언을 한다. 그래서 그분은 성공한 여성 CEO임에도 내게는 명예남성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분을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명예남성이나 마찬가지인 여성들 숫자가 많아지는 것, 유리천장을 깬 명예남성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전체 여성의 삶의 질을 올리는 데 얼마나 기여를 할까?    

세 번째 풍경. 얼마 전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의원이 57명 당선돼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의원 비율은 여전히 10%대를 벗어나지 못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최하위권 수준이다. OECD 회원국의 여성 의원 비율은 2017년 기준 평균 28.8%이다. 한국은 이보다 약 10%포인트 낮은 수준인 것이다. 물론 한 달 만에 창당한 ‘여성의당’ 정당 투표수가 20만을 넘겼고 페미니즘 가치를 내건 후보들이 지역구에 출마하는 등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정치 세력화를 이루고 있는 현상은 눈여겨볼만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저기 국회의원 자리에 앉은 여성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평범한 여성의 삶을 주목하고 그들을 위해 일할까? 이번에 당선한 한 여성 후보는 차별금지법과 관련, “동성애 문제는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는 무지에 가까운 발언을 했으며,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낙선한 어떤 여성 의원은 과거 파업 노동자들을 “미친놈들”이라고 표현하거나 급식 조리종사원들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급식소에서 밥 하는 아줌마들이다. 그냥 동네 아줌마들”이라며 “옛날 같으면 조금만 교육시켜서 시키면 되는 거다. 밥하는 아줌마가 왜 정규직화 돼야 하는 거냐.” 발언하기도 했다. 이런 여성 의원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서 평범한 여성의 삶이 달라질까? 글쎄, 나는 회의적이다.

<99% 페미니즘 선언>은 이런 나의 의구심, 회의감에 답을 준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 아래 그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데 일정 정도 기여해온 ‘자유주의 페미니즘’, 소수의 1퍼센트를 위한 그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반기를 든다.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는 “모든 국가와 기업의 절반을 여성이 운영하고 가정의 절반을 남성이 꾸린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나아질 것”이라며 여성 경영인들에게 (자본주의 시장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라”로 충고하면서 여성들이 재계에서 이를 악물고 거둔 성공이야말로 성평등을 이룰 왕도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많은 연봉을 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1퍼센트의 여성들 숫자가 많아지는 것은 대다수 여성의 삶을 바꾸는 데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유리천장을 깨고 그 1퍼센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자본주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고, 나의 노력 또한 거기에 일조하면서 집안일이나 돌봄 노동 같은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노동은 터무니없이 낮은 급여를 받는 다른 여성에게 미뤄지기 일쑤이다. 전 세계에 걸친 돌봄 노동 사슬로 단단히 얽힌 이 억압은 특권층 여성들이 일부 가사 노동을 피하고 전문직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그 1퍼센트에 속하지 않는 여성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성차별적인 억압과 착취,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요구하며 ‘여성들이 고분고분 복종하며 침묵을 지키기 원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동맹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해야 한다고.

소수의 특권 계층 여성이 기업에서 경력의 사다리를 오르고 특정 직업에서 더 높은 지위로 진급하게 하는 데 헌신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평등에 대한 시장 중심적인 관점을 제기한다. 겉으로는 차별을 규탄하고 ‘선택’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대다수 여성이 자유와 자율권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사회 경제적 제약을 고민하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진짜 목적은 평등이 아니라 ‘실력주의’다. 사회 위계를 없애기보다는 위계를 다양화해 재능 있는 여성들이 정상에 오르도록 권한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옹호자들은 몇몇 특권 계층 여성이 높은 자리에 앉고 같은 계층 남성과 똑같은 보수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에만 매진한다. 때문에 첫 번째 수혜자는 이미 사회 문화 경제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한 여성이고, 나머지는 모두 지하에 갇힌 채 버려진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억압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체로 젠더 억압의 원천이다.  성차별주의는 자본주의 구조 안에 내장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전에 없던, 두드러지게 현대적인 형태의 성차별주의를 확립했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여성의 억압을 재발명하고 전체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지위가 불안해지고 경력이 불안전하고, 정치 불확실성이 심한 사회일수록 젠더 질서도 흔들린다. 실업과 해고 위험이 높아질수록 가부장의 폭력도 심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99% 페미니즘은 소수의 자유를 보호하려고 다수의 안녕을 제물로 내놓기를 거부하며, 가난한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 인종 차별 당하는 이주 여성, 퀴어, 트랜스 장애 여성, 자본에 착취당하면서도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도록 부추겨지는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이 페미니즘은 전통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쟁점에 한정 짓지 않는다. 혹사당하고 지배당하며 억압받는 ‘모두’를 위해 서 있는 인류 전체의 희망이 되기를 목표로 삼는다. 그런 까닭에 99퍼센트의 페미니즘은 깊이 있고 광범위한 사회 변혁을 추구한다. 환경정의, 수준 높은 무상 교육, 아낌없는 공공서비스, 저렴한 서민 주택, 노동권, 보편적인 무상 의료, 인종주의와 전쟁 없는 세계를 위한 분투로써 99퍼센트의 모든 공동행동에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99퍼센트의 페미니즘은 반신자유주의일 뿐만 아니라 반자본주의이기도 한 것이다.

단순히 선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파업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여타 반자본주의, 반체제 운동과 연합해 반인종주의자, 환경주의자, 노동자와 이주민 기본권 활동가들과 연대해 오직 1퍼센트를 위한 페미니즘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이 페미니즘은 다른 모두를 위한 희망의 불빛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여성 파업 행동주의는 노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관념을 넓힘으로써 범위를 확장한다. 노동의 범주를 임금 노동에만 두는 것을 거부하고 집안일, 섹스, 미소 또한 철회한다. 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 역할로 고정된 무상 노동의 필수적인 역할을 드러내며 그동안 자본이 유용하게 이용했으면서도 정당하게 보상하지 않은 활동들에 대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또한 무엇이 노동이며, 누가 노동자로 간주되는지를 다시 정의함으로써 임금 노동과 무보수 노동을 통틀어 여성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과소평가를 깨뜨리고자 한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권력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을 여성 해방의 돌파구인 양 축하해 달라고 요구하는 여성 정치가에게 투표하자고 설득한다. 하지만 이 책의 지적처럼 ‘다른 나라에 폭탄을 투하하고 인종 분리 정책을 유지하는, 자국 정부에 의해 자행되는 집단 학살에  침묵한 채 휴머니즘이란 이름으로 신식민주의적인 개입을 지지하는, 구조 조정, 채무 부과, 강제적인 긴축 정책을 통해 여력 없는 사람들을 갈취하는 비열한 짓을 하는 지배 계급 여성에게는 페미니즘이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151쪽) 이 말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모든 억압은 같은 사회 체제에 뿌리내리며 그로써 강화된다. 그 체제를 자본주의라 명명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함께 싸움으로써 자본이 갈라놓은 문화, 인종, 민족, 능력, 섹슈얼리티, 젠더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 결국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고작 1퍼센트만이 차지할 수 있는 정상에 올라가려고 애를 쓰는 게 아니라, 여성을 비롯해 인간 모두에게 가혹한 이 시스템을 뜯어고쳐서 99퍼센트가 아닌, 100퍼센트의 ‘모두’가 조금 나아진 세상에서 살자는 것을 이 뜨거운 책은 제안하고 있다. 이 외침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이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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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4-2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출간 당시에는 제게 흥미롭지 않은 책이어서 패쓰했는데 잠자냥 님의 열정적인 리뷰에 땡투하고 구매합니다.

잠자냥 2020-04-27 13:07   좋아요 0 | URL
이 책 읽다 보면 다락방 님은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ㅎㅎ
얼른 읽으시고 리뷰대회 챌린지 하세요! ㅎㅎㅎ

다락방 2020-04-27 13:0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책 소개 보다가 흐음 별 다섯은 아닐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리뷰 챌린지라니 도전하고 싶지만, 제가 4월 여성성의 신화를 못읽고있어가지고 ㅠㅠ

잠자냥 2020-04-27 13:16   좋아요 0 | URL
이 책 짧아요! 글씨도 엄청 크고 ㅋㅋㅋㅋㅋㅋㅋ
 
현혹 창비세계문학 75
헤르만 브로흐 지음, 이노은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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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차례 선거가 끝났다. 자신의 이념에 근거한 정당이 승리했거나 패배했거나 그에 따라서 자기 나름의 분석을 하기에 바쁘다. 이런 선거가 끝나고 나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아닌, 자기 이념과 어긋나는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어쩌면 그렇게나 많은지 의아해하며 그들, 그러니까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궁금해 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인터넷을 통해서 퍼지는 가짜 뉴스에 ‘현혹’되었다던가, 신문이나 언론에서 줄기차게 해온 주장에 ‘세뇌’되었다던가 등등.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믿었기에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비난한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종교와 관련한 신념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런 논쟁은 더 첨예해진다. 만일 그 종교가 사회에서 용인받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는, 그래서 이단이라고 취급받는 종교라면 사람들의 비난은 더 심해진다. 어떻게 ‘그런’ 종교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지, 의심하지 않는 믿음, 광신도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놀라워하면서 개탄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허무맹랑한 주의주장에 쉽게 ‘현혹’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혀를 내두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돌아봐도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동가들의 말과 행동에 ‘현혹’되어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고, 시간이 흐르면 그 선동에서 깨어나 지나간 시간의 만행들을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형태를 달리해 또다시 나타나는 온간 선전선동에 인간은 현혹되어 인류를 저버리는 일들까지 기어코 저지르고 만다. 저 먼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러했고,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그러했으며, 종교 원리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 수많은 자살폭탄테러도 그러했다. 이성과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새로 등장한 바이러스와 관련한 온갖 괴소문들이 번져가고 거기에 인간은 ‘현혹’당해 도저히 이성을 갖춘 인간이라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저지르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와이파이를 통해 번진다는 이야기에 인터넷 망을 끊고 다니는 저 유럽인의 광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바이러스를 빌미로 일상처럼 번져가는 인종혐오와 차별은 또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간은 다양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한번 어떤 노선에 접어들어 그곳에 고정되고 나면 자신의 다양성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안에 머물러 있게 되고 더 이상은 어떤 것으로도 그를 빠져나오게 할 수 없다. (<현혹>, 9쪽)


<현혹>의 이 한 구절은 광기와도 같은 집단 최면 상태에 종종 빠지는 인간 이성(理性)의 그 참을 수 없는 나약함, 그런 인간의 나약함을 노려 대중의 광기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선동가와 그 추종자들의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양성’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한번 어떤 노선에 접어들어 그곳에 고정되고 나면 자신의 다양성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인간이라는 허점 많은 존재. 그런 존재들은 쉽사리 선동가에게 현혹되기 쉽고 그 안에 머물러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은 히틀러라는  희대의 선동가에게 현혹당해 집단 광기의 상태에 빠졌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10여년이 흐른 뒤, 도시를 등지고 알프스 산간마을에서 은둔하다시피 의사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마리우스 라티’라는 방랑자와 마주친다. 왜소한 체격에 갈리아풍 콧수염, 서른 혹은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 꿈꾸는 듯 멍하면서도 대담해 보이는 눈길. 갈리아 지방 출신 소시민으로 보이는 마리우스는 첫인상부터 왠지 불쾌하다. 이 마리우스는 아랫마을 농부 ‘밀란트’의 집에 임시 일꾼으로 기거하며, 독특한 말과 행동으로 주민들을 점차 현혹시킨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기계 타작 금지를 역설하는 한편, 거대한 증기 제분소 때문에 인간이 병들게 되었다며 기계문물과 대량생산을 거부하라고 부추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라디오를 비롯해 기성복 구입도 해서는 안 된다. “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은 절대로 몸에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질병은 방탕함에서 오는 것”이라면서 정결한 삶을 주장하며 미혼모를 마녀라고 낙인찍어 따돌리고,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도시인의 생활을 비난하면서 서비스 직종을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고 경멸하기도 한다. 때문에 마을에 라디오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해가는 서비스업 종사자 ‘베취’는 마리우스가 괴롭히기 아주 좋은 대상이다.

한술 더 떠 마리우스는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전설처럼 전해오던 ‘황금 채굴’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마을 사람들을 강력하게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마리우스 가까이에는 그의 손발 같은 역할을 하는 ‘벤첼’이라는 자도 있다. 마리우스는 뒤에서 말을 할뿐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는데, 벤첼은 선동꾼 역할을 자처한다. 마리우스와 벤첼, 두 이방인이 벌이는  선동으로 말미암아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의 반목은 심해지고, 마리우스를 믿는 자들과 그를 의심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도 깊어지면서 이 조용하던 산간마을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만다. ‘나’는 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서술하는 기록자 역할을 하지만 그 선동가를 막는 일에는 앞장서지 못한다. 마리우스에 반감을 가지는 한편으로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집단 광기와도 같은 축제에 참여해 그 공기에 취해버리는, 이 마을에서 가장 이성을 갖춘 존재이면서도 그 자신마저 때로는 이성의 끈을 놓고 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오면 의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네.” 말하면서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런 상황 아래 이 마을은 마리우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콧수염을 기른 이 선동꾼 마리우스는 당연하게도 히틀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산간마을 사람들, 그들의 암흑 같은 삶은 종교도 구원해주지 못한다. 마을의 무기력한 가톨릭 신부는 어떤 영적 도움을 주지 못한지 오래이다. 그런 상태에서 외부에서 들어온 이 신비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는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을 반대하고 엄격한 규율을 내세우면서 의지할 것 없이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마을 사람들의 내면에 차츰 스며들어 그들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는 심지어 황금까지 약속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마리우스의 행동대장이 벤첼의 모습에서는 괴벨스가 떠오른다. 그 두 사람은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해 누군가를 배제해야한다. 볼품없는 외모에 마을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던 사나이, 그런데다가 서비스업 종사자인 ‘베취’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벤첼은 베취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 계속 번식을 하려고 하다니.......” “그런 것이 세상에 아예 나탄지 않는다면 더 좋겠죠.” 등등. 마을사람들은 그의 말에 현혹되어 베취를 따돌리고 괴롭힌다. 여기에 죄의식은 없다. 심지어는 한 여성을 제물로 바치는 일에까지 동조하게 된다. 히틀러와 괴벨스, 그 추종자들이 자행했던 유대인 탄압과 학살이 떠오르는 섬뜩한 장면이다.

마리우스는 벤첼을 단지 익살꾼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익살꾼.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의사에게 마리우스는 벤첼이 하는 일은 곧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베취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공격하는 일들이 결국 사실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원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베취를 괴롭히도록 선동하는 일도 정의에 속하는 것”이며 “그저 민중의 목소리일 뿐”이다. 마리우스가 보기에 “모두가 고통당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이 낫다(206쪽). 홀로코스트가 정당화되고 그것에 동조했던 수많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들이 떠오른다.


“현혹되지 말도록 해. 그러면 자네가 도울 수 있을 거야.”
“우리를 현혹시키는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나 있을까요? 우리는 그걸 막아낼 수 없을 텐데요.”
“그렇게 되면 자네도 그 일을 겪어내야 하는 거지.” (<현혹>, 374쪽)


의사인 나는 끊임없이 마리우스와 벤첼을 의심하고 불쾌해하며, 그들에게 반감을 갖고 그들의 영향력을 마을에서 거두고 싶어 하지만 딱히 행동은 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어머니 기손’의 존재는 이 마을에 드리운 암흑과도 같은 집단 광기를 거둬낼 수 있는 유일한 빛과도 같다. 그녀는 애초부터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마리우스의 약점과 그 약점에서 비롯된 일그러진 생각과 욕망,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꿰뚫어보고 그에 대한 경고를 하는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리우스의 ‘현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증오가 두려움과 함께 와야만 해. 그다음에 사랑이 오는 거야..... 중요한 건 잘 죽는 거라네....”라고 말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인간과 달리 산, 그러니까 자연은 절대 마리우스 같은 자의 현혹에 속지 않는다. 어머니 기손의 이런 주장은 기술 발전과 문명 진보에만 치중해온 서구 문명에 대한 일침이 아닐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다가 이렇게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다니! 대단한 현혹이다! 이제 자연은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복수하게 될까! 자연은 폭력에 희생된 정신에 대해 복수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자연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연과 그 무한으로 가는 길은 딱 하나뿐이다. 그것은 정신, 인간의 자비, 그리고 인간의 신적 탁월함이다. (<현혹>, 556쪽)


자연으로 돌아가려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는 깨달음은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마을은 씻을 수 없는 상흔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자연은 계속 흘러간다.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생명을 잉태하고 아이가 태어난다. 그럼에도 마리우스라는 그림자는 쉽사리 걷히지 않는다. 아니, 마리우스와 벤첼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더라도 언젠가 또 다른 마리우스가 등장할지 모른다. 인간의 마음속에 누군가를 따돌리고 괴롭히고자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면 누구나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인간들이 어떤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서로 갈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 결국엔 무능과 절망에 빠져, 잠에 취한 상태에서 서로에게 해를 가하게 될 거라는 사실’(346쪽). 이런 사실을 늘 상기하지 않는다면 틈을 노리는 자가, 그리하여 자기 이득을 꾀하는 자가 언제고 나타날 것이다. 이 어둠의 속삭임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기마저도 현혹당해 그 일을 겪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 기손의 이 경고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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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맥베스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강승현 옮김 / 모모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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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은 남편을 설득해 던컨 왕을 살해하도록 종용하고,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은 왕비가 된다. 그 후로 ‘레이디 맥베스’는 흔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권력욕 넘치는 여성을 일컫게 되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레이디 맥베스>에는 바로 그런 여성이 등장한다. ‘카테리나 리보브나 이즈마일로프’가 바로 그녀이다. 그러나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부인’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하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를 뒤에서 은밀히 조종하거나 살인을 종용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직접 나선다. 그것도 여러 차례.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이 강렬한 여인의 일생을 거침없는 입담으로 폭풍처럼 몰아 써내려 간다.

작품은 ‘우리 지방에선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떠올릴 때마다 영혼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인물들이 간혹 나온다. 상인의 부인이었던 카테리나 리보브나 이즈마일로프도 바로 그런 인물에 속하는데, 언젠가 그녀가 일으켰던 끔찍한 사건 이후 우리 귀족들 사이에서 그녀는 간단히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라고 시작함으로써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그리고 그가 일으킨 일이 ‘끔찍한 사건’임을 예상하게 하고, 이 모든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레스코프가 형사재판소의 말단 기록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경험한 엽기적인 살인 사건에서 소재를 따왔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 레스코프의 상상력이 더해졌으리라.

타고난 미녀는 아니지만 매우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카테리나 리보브나’ 그녀의 나이는 이제 스물넷. 그런데 매력적인 외모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녀의 인생은 권태로 가득하다. 부유한 상인이지만 쉰 살이 넘은 남편 ‘지노비 보리스이치’와 오래전에 홀아비가 된 아흔 살에 가까운 시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이니 지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카테리나 부부에게는 아이도 없다. 지노비 보리스이치는 카테리나와 결혼하기 전 20년을 함께 살았던 전 부인에게서도 아이를 얻지 못했다. 아이도 없이, 늙은 두 남자와 사는 권태에 사로잡힌 젊은 아내. 게다가 그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난에도 질린 상태이다.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 주제에 대체 뭐 하러 결혼을 했느냐는 비난. 사실,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얻지 못했다면 문제는 남편에게 있을 가능성이 큰 데도  마치 그녀가 기품이 넘치는 그들 집안에 무슨 큰 죄라도 저지른 듯하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침묵과 권태 속에 나날을 보낸다.

큰 변화 없이 소소하게 흘러가는 조용한 삶이 꼭 권태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삶이 알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카테리나에게는 그렇지 못했으니, 그녀의 성격이 원래부터 불같았기 때문이다. 부잣집 남자와 결혼해 조신하게 살아가기 이전, 가난한 처녀 시절 그녀는 꾸밈없이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일례로 ‘양동이를 들고 강에 나가 나룻가에서 셔츠만 입고 목욕하는 것’을 좋아했고, ‘쪽문 밖으로 지나가는 청년에게 해바라기씨 껍질을 뿌리며 농을’ 걸기를 즐겼다. 그런데 이곳에선 모든 것이 달랐다. 강가에서 셔츠만 입고 목욕은커녕 해바라기씨 껍질을 뿌릴만한 청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카테리나의 권태를 감지한 집안의 하인 세르게이는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젊음과 빛나는 외모를 무기삼아 주인마님인 카테리나에게 폭풍처럼 밀어붙이고 카테리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에 불을 붙인 자를 기꺼이 맞이하는 것이다.

부유하지만 나이 많은 남편과 사랑이나 애정 없이 사는 지루한 삶, 거기에 나타난 젊고 잘생긴 남자. 그와의 애정행각…….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여럿 있다.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 레이디 채털리 등등. 그러나 이들과 카테리나는 완전히 다르다. 욕망에 눈뜨고 남편이 아닌 남자와 벌이는 애정행각에 죄의식을 느끼기보다는 그것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린다. 아니, 욕망에 눈뜬다는 표현조차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권태에 짓눌려있던 욕망이 폭발한 것이다. 그 욕망은 고삐가 풀린 채 질주한다. 시아버지를 비롯해 남편이 알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부인의 외도를 알게 되고 “당신의 모든 행위를 낱낱이 밝혀낼 거야.” 말하는 남편에게 카테리나는 그를 비웃으며 오히려 조롱한다. “당신의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겁쟁이가 아니랍니다. 나는 그런 거 두려워하지 않아요.”(56쪽). 이렇게 거침없는 여성이 있었던가? 한편으로는 통쾌한 생각에 왠지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카테리나는 한술 더 뜬다. 외도 현장을 덮친 남편 앞에 “여기 그 사람이 있다”며 연인을 당당히 소개하는 게 아닌가. 세르게이의 팔을 잡고 남편 앞에 선 카테리나는 말한다. “어디 나하고 이 사람을 심문해 보시죠. 어쩌면 당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도망가지 못하게 재빨리 방문을 잠근 뒤 주머니에 열쇠를 집어넣고는 앞섶을 풀어헤친 채 세르게이와 함께 침대에 눕는다. 그러면서도 남편을 계속 도발한다. “왜? 마음에 안 드시나? 한번 보라니까. 내 사랑하는 양반아, 얼마나 좋은지!” 그러고는 마침내 남편 앞에서 세르게이에게 정열적으로 키스한다. 이 광경을 낱낱이 지켜볼 수밖에 없던 카테리나의 남편은 격노한 끝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고야 마는데, 그마저도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카테리나는 자신의 권태로웠던 지난날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남편을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잘 들어 세료자! 다른 여자들이 어땠는지 나는 알 바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단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 내가 너를 원하기도 했지만, 네가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고, 또 네 술수 때문이란 사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에, 세료자 네가 나를 배신하거나, 내 대신 다른 여자를 택한다면, 나는, 결코 살아서는 너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41쪽)


카테리나의 이 극악무도한 잔인함에는 세르게이조차 몸서리친다. 카테리나는 자신의 욕망에 걸림돌이 된다면 연인인 세르게이에게도 불행이 닥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카테리나가 내뱉은 위와 같은 말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외도 상대에게 사랑만을 갈구하면서 끌려 다니던 가련한 비운의 여주인공들과 사뭇 다르다. 당당히 ‘내가 너를 원했다’고 말할 줄 아는 한편으로는 ‘너는 나를 유혹했고, 네 술수’라고 명확히 언급한다. 술수임을 알아도 나는 그 욕망에, 젊고 잘생긴 남자를 끌어안는 것을 ‘내가’ 선택했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를 배신한다면 결코 살아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이라니. 참으로 대단한 여자 아닌가.

그러나 이처럼 거칠 것 없이 잔인하고 당당한, 그 여자도 결국 한계를 보이고 만다. 아무리 욕망을 채우고자 몸을 던진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이 자기 자신을 옭아매고 만 것이다. 그의 ‘술수’인지 알았어도 이제 세르게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의 지은이가 레스코프, 그러니까 ‘남자’임을 상기해야만 했다. 단순히 욕망을 채우는 상대였더라면, 아니 그러다 보니 사랑하게 되었더라도, 그놈의 배신을 알았더라면 웬만한 여자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이를 갈면서 돌아섰을 것이다. 그리고 복수의 칼날을 세르게이에게 돌렸을 것이다. 레스코프가 여성 작가였다면 그렇게 썼을 텐데, 남성이라 그런지 복수의 칼을 세르게이에게 돌리지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 무시무시하게 강렬한 캐릭터를 일구어놓고도 막판에 조금 힘이 빠져버린 느낌이다. 그런 느낌은 이 책에 함께 실린 또 다른 작품 <쌈닭>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들었다. 레이디 맥베스 ‘카테리나’ 못지않게 당당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강렬한 캐릭터 ‘돔나 플라토노브나’- 그런 인상 깊은 인물을 창조하고도 그런 허무한 결말을 짓다니, 오호 레스코프여 오호 통재라.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레스코프가 빚어낸 이 두 여성은 너무도 강렬해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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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ue76 2020-04-0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여주의 대사가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는군요. 강렬합니다!

잠자냥 2020-04-07 20:40   좋아요 0 | URL
저것보다 더 시원한 대사들이 많습니다~ 한 번 꼭 읽어보세요. ㅎㅎ

유부만두 2020-04-08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만 봤는데요, 일꾼 세르게이가 영 매력적이지 않아서 (더럽고 냄새나겠다는 생각만....) 여주인공이 훨씬 더 우위에 선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영화에선 일련의 사건들이 별 특별하지 않게 반복, 처리 되어서 지루했어요.

잠자냥 2020-04-08 12: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더럽고 냄새날 거 같은 느낌 알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사실 책에서도 그래요. 그깟 세르게이 따위...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