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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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몇 개의 풍경이 떠올랐다.

첫 번째 풍경. 대학 신입생 때 몇 번 보지 않았는데도 호감을 느낀 선배가 있었다. 당당하고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성격도 서글서글했던 그 선배. 나보다 몇 학번 위인 선배는 학교에 가면 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과방에서는 잘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가 “나는 주로 저기 있다”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총여학생회’였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생에게 총여학생회는 참 신기한 공간이었다. 배고프거나 술 마시고 싶으면 언제나 그곳으로 오라던 선배, 알고 보니 선배는 우리 학교 총여학생회장이었다. 학교를 싫어했던 나였음에도 학교에 갈 때마다 총여학생회실 문을 열고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매춘의 역사> 같은 책을 읽었고, 그 선배가 권해준 페미니즘 관련 책이나 선배의 생각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곳에는 선배와 비슷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주로 술을 마시면서 함께 지내다 보니 그곳은 내가 학교에서 드물게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고, 또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는 총여학생회 꼬마 선전부장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선전부장을 맡은 선배의 조수 정도랄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수요집회를 나가게 되었고 엄마 몰래 기활(기지촌활동)을 다녀오기도 했다. 기활을 간다는 말을 엄마한테는 끝내 숨긴 이유를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니 그때도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안다. 아마도 <매춘의 역사>를 읽을 때 집에서는 숨겼던 것과 마찬가지 심리였을 것이다. ‘절대 그런 게 아닌데 왠지 그런 것’으로 오해받을까봐 아예 숨기는 그런 마음. 그런 활동을 하다가 이상한 마음이 싹텄다. 총여학생회실에 진을 치고 살던 그 선배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당찼는데, 수요집회에서 만난 할머니나 기활에서 만난 여성의 삶과는 무언가 괴리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이런 활동’을 하는데, 그들의 삶이 정말 좋아지는 걸까? 나아지는 걸까? 우린 혹시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만족감, 그들을 어딘가로 이끈다는 느낌, 그 엘리트 의식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문득 내게 그런 의혹이 찾아왔다.

두 번째 풍경. 지인 중에 CEO 자리에 오른 분이 있다. 평사원으로 시작해 그 회사 회장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음에도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회사 대표 자리에 오른 분이다. 그분은 주변 여직원들의 본보기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그분이 그런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다른 평범한 여직원들도 언젠가는 자기도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또 다른 여성들의 희생이 자리한다. 그분의 자식을 돌보는 일은 다른  여성 가족 구성원(시어머니, 친정엄마, 시누이 같은)의 손에 맡겨졌고, 어느 정도 연봉이 오른 뒤에는 가사도우미 여성의 손에 그 일은 넘겨졌다. 지금도 그분 집안일은 가사도우미 여성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그분은 많은 연봉을 받겠지만, 그분 집안일을 돌보는 또 다른 여성이 얼마나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가끔 그분은 미투사건과 관련해서는 여느 남성과 마찬가지 발언을 한다. 그래서 그분은 성공한 여성 CEO임에도 내게는 명예남성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분을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명예남성이나 마찬가지인 여성들 숫자가 많아지는 것, 유리천장을 깬 명예남성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전체 여성의 삶의 질을 올리는 데 얼마나 기여를 할까?    

세 번째 풍경. 얼마 전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의원이 57명 당선돼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의원 비율은 여전히 10%대를 벗어나지 못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최하위권 수준이다. OECD 회원국의 여성 의원 비율은 2017년 기준 평균 28.8%이다. 한국은 이보다 약 10%포인트 낮은 수준인 것이다. 물론 한 달 만에 창당한 ‘여성의당’ 정당 투표수가 20만을 넘겼고 페미니즘 가치를 내건 후보들이 지역구에 출마하는 등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정치 세력화를 이루고 있는 현상은 눈여겨볼만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저기 국회의원 자리에 앉은 여성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평범한 여성의 삶을 주목하고 그들을 위해 일할까? 이번에 당선한 한 여성 후보는 차별금지법과 관련, “동성애 문제는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는 무지에 가까운 발언을 했으며,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낙선한 어떤 여성 의원은 과거 파업 노동자들을 “미친놈들”이라고 표현하거나 급식 조리종사원들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급식소에서 밥 하는 아줌마들이다. 그냥 동네 아줌마들”이라며 “옛날 같으면 조금만 교육시켜서 시키면 되는 거다. 밥하는 아줌마가 왜 정규직화 돼야 하는 거냐.” 발언하기도 했다. 이런 여성 의원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서 평범한 여성의 삶이 달라질까? 글쎄, 나는 회의적이다.

<99% 페미니즘 선언>은 이런 나의 의구심, 회의감에 답을 준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 아래 그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데 일정 정도 기여해온 ‘자유주의 페미니즘’, 소수의 1퍼센트를 위한 그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반기를 든다.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는 “모든 국가와 기업의 절반을 여성이 운영하고 가정의 절반을 남성이 꾸린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나아질 것”이라며 여성 경영인들에게 (자본주의 시장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라”로 충고하면서 여성들이 재계에서 이를 악물고 거둔 성공이야말로 성평등을 이룰 왕도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많은 연봉을 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1퍼센트의 여성들 숫자가 많아지는 것은 대다수 여성의 삶을 바꾸는 데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유리천장을 깨고 그 1퍼센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자본주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고, 나의 노력 또한 거기에 일조하면서 집안일이나 돌봄 노동 같은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노동은 터무니없이 낮은 급여를 받는 다른 여성에게 미뤄지기 일쑤이다. 전 세계에 걸친 돌봄 노동 사슬로 단단히 얽힌 이 억압은 특권층 여성들이 일부 가사 노동을 피하고 전문직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그 1퍼센트에 속하지 않는 여성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성차별적인 억압과 착취,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요구하며 ‘여성들이 고분고분 복종하며 침묵을 지키기 원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동맹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해야 한다고.

소수의 특권 계층 여성이 기업에서 경력의 사다리를 오르고 특정 직업에서 더 높은 지위로 진급하게 하는 데 헌신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평등에 대한 시장 중심적인 관점을 제기한다. 겉으로는 차별을 규탄하고 ‘선택’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대다수 여성이 자유와 자율권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사회 경제적 제약을 고민하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진짜 목적은 평등이 아니라 ‘실력주의’다. 사회 위계를 없애기보다는 위계를 다양화해 재능 있는 여성들이 정상에 오르도록 권한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옹호자들은 몇몇 특권 계층 여성이 높은 자리에 앉고 같은 계층 남성과 똑같은 보수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에만 매진한다. 때문에 첫 번째 수혜자는 이미 사회 문화 경제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한 여성이고, 나머지는 모두 지하에 갇힌 채 버려진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억압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체로 젠더 억압의 원천이다.  성차별주의는 자본주의 구조 안에 내장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전에 없던, 두드러지게 현대적인 형태의 성차별주의를 확립했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여성의 억압을 재발명하고 전체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지위가 불안해지고 경력이 불안전하고, 정치 불확실성이 심한 사회일수록 젠더 질서도 흔들린다. 실업과 해고 위험이 높아질수록 가부장의 폭력도 심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99% 페미니즘은 소수의 자유를 보호하려고 다수의 안녕을 제물로 내놓기를 거부하며, 가난한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 인종 차별 당하는 이주 여성, 퀴어, 트랜스 장애 여성, 자본에 착취당하면서도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도록 부추겨지는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이 페미니즘은 전통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쟁점에 한정 짓지 않는다. 혹사당하고 지배당하며 억압받는 ‘모두’를 위해 서 있는 인류 전체의 희망이 되기를 목표로 삼는다. 그런 까닭에 99퍼센트의 페미니즘은 깊이 있고 광범위한 사회 변혁을 추구한다. 환경정의, 수준 높은 무상 교육, 아낌없는 공공서비스, 저렴한 서민 주택, 노동권, 보편적인 무상 의료, 인종주의와 전쟁 없는 세계를 위한 분투로써 99퍼센트의 모든 공동행동에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99퍼센트의 페미니즘은 반신자유주의일 뿐만 아니라 반자본주의이기도 한 것이다.

단순히 선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파업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여타 반자본주의, 반체제 운동과 연합해 반인종주의자, 환경주의자, 노동자와 이주민 기본권 활동가들과 연대해 오직 1퍼센트를 위한 페미니즘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이 페미니즘은 다른 모두를 위한 희망의 불빛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여성 파업 행동주의는 노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관념을 넓힘으로써 범위를 확장한다. 노동의 범주를 임금 노동에만 두는 것을 거부하고 집안일, 섹스, 미소 또한 철회한다. 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 역할로 고정된 무상 노동의 필수적인 역할을 드러내며 그동안 자본이 유용하게 이용했으면서도 정당하게 보상하지 않은 활동들에 대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또한 무엇이 노동이며, 누가 노동자로 간주되는지를 다시 정의함으로써 임금 노동과 무보수 노동을 통틀어 여성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과소평가를 깨뜨리고자 한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권력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을 여성 해방의 돌파구인 양 축하해 달라고 요구하는 여성 정치가에게 투표하자고 설득한다. 하지만 이 책의 지적처럼 ‘다른 나라에 폭탄을 투하하고 인종 분리 정책을 유지하는, 자국 정부에 의해 자행되는 집단 학살에  침묵한 채 휴머니즘이란 이름으로 신식민주의적인 개입을 지지하는, 구조 조정, 채무 부과, 강제적인 긴축 정책을 통해 여력 없는 사람들을 갈취하는 비열한 짓을 하는 지배 계급 여성에게는 페미니즘이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151쪽) 이 말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모든 억압은 같은 사회 체제에 뿌리내리며 그로써 강화된다. 그 체제를 자본주의라 명명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함께 싸움으로써 자본이 갈라놓은 문화, 인종, 민족, 능력, 섹슈얼리티, 젠더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 결국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고작 1퍼센트만이 차지할 수 있는 정상에 올라가려고 애를 쓰는 게 아니라, 여성을 비롯해 인간 모두에게 가혹한 이 시스템을 뜯어고쳐서 99퍼센트가 아닌, 100퍼센트의 ‘모두’가 조금 나아진 세상에서 살자는 것을 이 뜨거운 책은 제안하고 있다. 이 외침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이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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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4-2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출간 당시에는 제게 흥미롭지 않은 책이어서 패쓰했는데 잠자냥 님의 열정적인 리뷰에 땡투하고 구매합니다.

잠자냥 2020-04-27 13:07   좋아요 0 | URL
이 책 읽다 보면 다락방 님은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ㅎㅎ
얼른 읽으시고 리뷰대회 챌린지 하세요! ㅎㅎㅎ

다락방 2020-04-27 13:0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책 소개 보다가 흐음 별 다섯은 아닐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리뷰 챌린지라니 도전하고 싶지만, 제가 4월 여성성의 신화를 못읽고있어가지고 ㅠㅠ

잠자냥 2020-04-27 13:16   좋아요 0 | URL
이 책 짧아요! 글씨도 엄청 크고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