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상실과 발견>을 읽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나조차도 돌아보면 잃어버린 것들이 떠오른다. 지갑이나 그 지갑 안에 담겨 있던 신분증이기도 하고 핸드폰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이런 물건들이 지금까지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잃어버렸을 그 순간의 당혹감이나 잃어버린 물건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들 말고도 나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하고 자잘한 물건들을 잃어버리며 살아왔을 것이다. <상실과 발견>에 따르면 우리가 60세가 될 즈음이면 평균 20만 개의 물건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숫자이다.
어디 물건들만 그러할까, 때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그것을 잃어버림으로써 다른 것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그런 것들-어떤 존재일 수도 있다. 나만의 기록이리라 굳게 믿었으나 그 믿음이 깨져버려 다시는 쓰지 않게 된 일기장, 남다른 추억이 있어 절대 버리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 날 사라져버린 낡은 티셔츠, 엄마 손을 잡고 따라나서기를 즐겼던, 그러나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재래시장, 누군가가 가져가 버린 게 틀림없을 빨간 자전거, 집을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강아지… 특별한 기억이나 추억이 깃든 물건과 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섣불리 글자 몇 자로 끼적일 수 없는,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인연이 더는 닿지 않아서 또는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어서 나의 삶에서 사라져버린 이들이 있다. 그런 상실은 잃어버린 물건이나 추억이 안겨준 슬픔보다 몇 배는 더 깊고 진하게 생에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끌어안고, 더는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그 존재를, 대상을 그리워하면서 애달파만 하기에는 인생에는 또 다른 것들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지갑 대신 새로운 지갑을, 핸드폰을 살 수도 있고 그것들이 전에 쓰던 것들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일도 종종 겪는다. 물건은 그 안에 담긴 추억을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새로 사는 것들이 더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그렇지만 존재, 생명을 지닌 대상은 어떠할까? 어떤 대상과 대상을 서로 견준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종종 이런 일도 일어난다.
그러나 때로는 견주는 대상 자체가 서로 너무나 다른 존재일수도 있다. <상실과 발견>의 저자 캐스린 슐츠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기 얼마 전, 결혼하게 될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절대적인 사랑을 잃어버릴 즈음, 또 하나의 절대적인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이 두 존재-아버지와 반려자는 결코 서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큰 사랑이 나를 떠나려는 순간에, 또 다른 종류의 커다란 사랑이 다가온다는 것은, 그리하여 어쩌면 생의 비극을, 슬픔을 그나마 잊을 수 있게, 그것이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은 이 지난한 인생을 그래도 버티며 견딜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위로는 아닐까.
사랑이 또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꼭 이렇게 가족을 또 다른 가족으로 대체하는 형태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에서 잃어버린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그 공허가 외로움이 채워진다. 친구든 연인이든 잃어버리거나 떠난 사랑의 자리는 새로운 사람이 그 빈 공간을 매워주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때는 바로 이 사람이다, 라는 확신, 이 사람이라면 어떨까 싶은 ‘발견’의 시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제기하는 문제는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이며 “누군가를 발견한다는 건 한없이 경이로운”(p.233) 경험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발견에서 “절망이 아닌 경이”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애도의 이야기 구조가 상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듯, 사랑 이야기는 모두 발견의 연대기이며 특별한 발견의 개인적 역사”(p.112)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에 이어서는 사랑에 빠지는 상태, 즉 그 대상에 대한 정보를 갈망하는 상태가 된다. 사랑하는 상대를 알고 싶은 갈급함은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져 “사랑에 대한 갈망은, 그것이 육체적이건 감정적이건 지적이건 실존적이건, 언제나 ‘더 많이’ 요구”(p.162)하게 되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발견의 경이로움, 기쁨과 충만함을 던져주던 대상이, 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죽을 것만 같던 대상이 어느 날 너무나 익숙해지고 더는 발견의 기쁨을 던져주지 못해 그 대상에 대해 더는 알고 싶지 않은 상태, 아무것도 궁금하지도 않은 상태 또한 찾아온다는 것을…. 그렇게 한 존재를 잃어버리기를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잃어버림과 찾음, 상실과 발견이 따르기 마련인 사랑이 제기하는 문제는 삶이 꾸준히 인간에게 던져주는 문제이기도 하다. 잃어버리고, 발견하고 다시 또 잃어버리고…. 그렇게 인간은 삶의 모든 단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지만 또 잃어버린다. 게다가 “상실은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빈번하게, 더욱 파괴적인 내밀함으로 충격”(p.290)을 던져준다.
상실이 더욱 많아지는 인생, 그 쓸쓸한 생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사랑뿐만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모든 것들을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인생의 법칙임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나이듦이 아닐까, 제 나름의 성숙은 아닐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불화한 존재가 아버지임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아버지라는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슐츠처럼 아버지를 사랑한 적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었음에도 이제는 꽤 나이가 들었을,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부고를 듣는다면 이제는 조금 애도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일렁거렸다. 평안히 살고 계시기를, 세상 떠나는 그날에는 가까이에서 깊은 애도를 보낼 이들이 그래도 많기를…. 이 모든 생각을 가능하게 한 것은 슐츠의 글이 주는 힘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