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크리스티앙 보뱅의 <마지막 욕망>을 읽는 내내 기형도의 시가 떠올랐다. 두 작품 모두 사랑을 잃어버린 이의 심정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형도의 <빈집> 속 ‘나’는 사랑을 잃어버린 후 문을 잠그고 빈집에 갇히기를 선택한다. ‘나’의 침잠과 은둔을 뜻할 수도 있고 사랑을 잃어버린 후의 세계가 더는 이전의 세상과 같지 않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보뱅의 작품 속 ‘나’는 사랑을 잃고 세상을 등지기로 한다. ‘나’는 좋아했던 오래된 책들의 페이지를 열 때면 사랑하던 이, 그러니까 ‘당신’이 준 철필을 사용하곤 했는데 이제 그 철필로 천천히 ‘나’의 정맥을 연다. 칼날은 먼저 옷감 속으로, 다음에는 피부 속으로, 마지막으로 살 속 깊숙이 파고든다. 가장 먼 곳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곳으로 긋는 칼날…. 저항이 점차 줄더니 곧 사라진다. 피는 마치 블랙베리나 라즈베리의 거품처럼 솟았다가 솜털처럼 미지근하게 흘러내린다. 나는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등지기를 선택함으로써 욕망, 한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욕망의 세계 또한 벗어난다. 그렇기에 이 죽음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시도한 나의 욕망일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다 그 사랑을 잃어버린 후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위대한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 아니라 고통”(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 수업>)이라는 말처럼 사랑의 세계에는 온갖 고통이 존재한다. 어떤 이는 욕망하는 이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고통스럽고, 또 어떤 이는 기적처럼 원하는 이의 마음을 얻어 함께 똑같은 언어로 이루어진 사랑의 세계 안에 살다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떠남으로써, 또는 그 둘의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가 더는 전과 같지 않음을, 사랑이 무너져 감을 지켜봄으로써 고통스럽다. “사랑이 시작되는 이유도 별로 없지만, 사랑이 끝날 때는 더더구나 아무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기에(<마지막 욕망>, p.129) 저무는 사랑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인간의 목숨만큼이나 욕망과 사랑의 세계도 유한하기에 소멸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렇기에 너를 잃어버린 나는 문을 닫아걸거나 세상을 등지거나 또는 그와 비슷한 여러 형태의 은둔으로 담을 쌓는다. <마지막 욕망>의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후 더는 살아갈 욕구를 느끼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또 다른 사랑을 꿈꾸지 않겠지만 사랑을 잃고도 사람들은 살기 위해,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다음에 찾아올 사랑은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리라 기대하면서. “인생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마음을 열수록 우리는 더 취약해진다는 사실”(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을 알면서도 또다시 그 취약함에 기꺼이 자기를 내던진다.
블랙베리나 라즈베리의 거품처럼 솟았다가 솜털처럼 미지근하게 흘러내리는 피는 죽음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사랑은 나눌 때 느꼈던 것이기도 하다. 당신은 ‘블랙베리처럼 내 입술을 짓눌’렀으며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는 장미, 체리, 산딸기, 오렌지향이 피어난다. 그런데 사랑을 속삭이며 느끼던 블랙베리는 이제 죽음의 피가 되어 내 몸에서 흘러내린다. 보고 싶어 죽겠어, 죽을 만큼 사랑해, 죽고 싶을 만큼 좋아, 죽을 것 같아…. 사람들은 사랑을 말할 때 죽음의 표현을 종종 한다.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 사랑과 삶, 죽음의 충동은 묘하게도 공존한다. 열정과 광기로 촉발된 사랑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파괴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은밀할수록 더욱 그렇다. 애절하기 때문일까. <마지막 욕망> 속 두 사람의 사랑은 은밀하기 짝이 없다. 숨겨 둔 보물을 찾듯이 편지를 주고받고 그 편지는 오직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쓰인다. “단어 밑의 단어들. 흑백의 생채기가 가득한” 그 편지들은 그들을 “휩쓸었던 광기, 몸짓으로 접힌 주름 속의 광기를 모사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다른 것을”(<마지막 욕망>, p.60)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딸을 둔 여자이고 그런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의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어떤 사랑. 그래서 은밀하고 애절할 수밖에 없던 그 사랑.
이 사랑은 생텍쥐페리의 <남방 우편기>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세상과 멀리 떨어져 저 하늘 위를 날아다니며 살아가는 ‘베르니스’와 이 지상에 속한 여인 ‘주느비에브’의 사랑은 보뱅의 ‘나’와 ‘당신’의 사랑과 조금은 닮았다. 다른 남자의 아내인 주느비에브를 사랑하는 베르니스…. 베르니스는 하늘 위에서 세상을 두루 살피며 마음속의 연인 주느비에브를 그리워한다. 지상에 발을 디디고 살기보다는 생의 거의 모든 순간을 하늘에서 보내는 베르니스는 관습, 관례, 법과 같은 이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들이 그에게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주느비에브는 철저히 지상에 속한 여자로 그것들이 그녀 인생의 테두리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두 사람의 짧고도 뜨거운 사랑은 끝내 파국을 맞이하리라는 것은 누구나가, 어쩌면 그들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 곧 탄생과 같은 의미를 지녔던 베르니스는 주느비에브가 살던 기존의 삶을 텅 비우려고 애쓰며 그녀에게 새 삶을 안겨주고 싶지만 어쩐지 그 노력은 물거품처럼 보인다. “어떤 순간에는 가장 단순한 몇 마디 말이 위력을 발휘해 아주 쉽게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지. 그건 맞는 말일세…. 하지만 삶은 분명 그와는 다른 것이라네.”(<남방 우편기>, p.188)라는 베르니스의 친구의 말은 그래서 뼈아픈 진실로 다가오기도 한다.
자신이 속한 세속적인 삶에서 동떨어져 있기에 주느비에브는 베르니스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의 품 안에서는 아이의 죽음도, 남편의 원망과 질타도 잊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마치 <마지막 욕망>의 ‘나’가 이른바 ‘세상의 지성에 금세 지루해져버린’ 것과도 같다. “언제나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전쟁과 돈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들” “성찰 없이 그런 일을 과장해서 떠드는 잡담”, “영혼과 혀를 빠르게 고갈시키는 입에서 나오는 소음”(<마지막 욕망> p.71)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거짓으로 웃거나 침묵하다 마침내 거기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당신’을 사랑하기로 선택했던 ‘나’- 그런 그들에게 이제 “진정한 언어는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마지막 욕망> p.71)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랑들은 결국 이 지상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유리될 수 없기에 사랑은 어느 순간 ‘나’ 또는 ‘당신’의 품을 떠나고 그것을 잃어버린 이들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혹은 죽지는 못하더라도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 놓인다. 사랑이 이런 고통을 동반하기에 ‘나’는 이렇게 묻기도 한다. “사랑이 저주임을 알고 있느냐고, 당신에게서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서는 살아 있게 남겨두고, 일상을 벼락에 맞아 불타버린 황폐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마지막 욕망>, p.59)을 알고 있느냐고. 또한 그 사랑으로 인해 ‘나’는 다정함과 잔인함이 욕망의 이면에 서로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또 존재는 부재로 인해 성장했기에 부재를 피할 수는 없음도 깨닫는다. 더불어 탄생은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때로는 나아가는 일이 포기나 멀어짐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음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상처를 주는 건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둘러싼 어두운 밤이며 밤의 외피임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그런 ‘나’는 다시 사랑이 가능해진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달지 않은 달콤함. 폭력적이고 상냥한 부드러움…(<마지막 욕망>, p.22)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사랑을 잃고도 또 다시 사랑을 찾는 것이리라. “당신이나 내가 아니라 ‘우리’에게 머물러 기쁨을 주었던 사랑”(p.60)이 여전히 이 세계를 이루는 언어의 진정한 저자라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