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얼굴>이 고산 등반에 관한 소설인 줄 알았다면 내가 이 책을 읽었을까? 몇 해 전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을 인상 깊게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고독한 얼굴>을 좀 더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두 가지 다 가능한 이야기다. <고독한 얼굴>이 고산 등반을 다룬 줄 알았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을 읽지 않았다면 설터의 이 작품을 지금보다는 좋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몇 해 전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을 읽어버렸고, 그 후 예전보다 더 에베레스트니, 히말라야니 등등 그 높은 산을 등반하는 일에 비판적인 시선을 갖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독한 얼굴>을 읽었으니 이 책의 문장이 아무리 아름답고, 이 책에서 아름답게 그리고자 한 인물 ‘랜드’(실제 모델 게리 헤밍 Gary Hemming)의 그 숭고한 등반 행위에 의구심을 갖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은 고산 등반을 매개로 한 동서양 두 문화, 즉 1910년부터 시작된 서구 히말라야 원정대의 등반 역사에서 숨겨진 행위자였던 동양의 셰르파의 삶에 주목하여 인류의 고산 등반 역사를 훑는다. 히말라야 같은 고산을 등반하려면 그 지형을 잘 아는 지역 주민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 원정대의 등반에 참여해 물품 운반부터 루트 개설, 요리, 청소 등 모든 막일을 담당한 존재가 바로 에베레스트에 사는 소수민족 ‘셰르파’이다. 이들의 역할을 주목하면서 이 책에서는 왜 서구의 등반가들이 ‘천박한 물질주의’에 결여된 ‘영성을 구현’하기 위해, 마치 군사 작전처럼 저 산을 ‘정복’하기 위해,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지 고찰한다.
대부분의 고산 등반을 다룬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 그렇듯이 <고독한 얼굴>에서도 이 셰르파들의 존재는 지워진다.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 작품의 배경이 히말라야가 아니라 알프스이기 때문에 셰르파가 애초에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셰르파와 같은 역할을 한 존재가 전혀 없었을까? 이 작품에서는 오롯이 서구의 백인 남성들, 그들의 등반 과정에만 주목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영웅과도 같다(그에 비해 언뜻 스쳐지나가듯이 그려지는 일본 등반가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보라! 얼마나 부정적인가!) 미국이나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등 이른바 선진국 출신의 그 등반가들은 대개 자기들만의 힘으로 루트를 개설하고 등반을 시작해 정상에 오르거나 또는 실패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 등반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랜드는 캘리포니아에서 교회 지붕을 수리하던 사람인데, 높은 곳에 극도로 적응을 잘하는 것인지, 애초부터 타고나기를 신처럼 산을 타는 인간인지 특별하게 뭔가를 준비하지 않는데도 빼어나게 암벽을 타고(물론 위험한 순간도 맞닥뜨리지만), 심지어 위험에 처한 조난자들을 구출하기도 한다. 그래,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전설적인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다고 하니 그렇다고 받아들이자.
그러나 <고독한 얼굴>의 문장, 문장들은, 그러니까 설터가 묘사하는 그 고산 등반의 과정은 말 그대로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에서 묘사하는 서구인들의 시선, 높은 산을 오르는, 오를 수밖에 없는 서구 원정대의 시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을 보자.
창문을 통해 이웃집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집들은 마치 집 안에 있는 질병 때문인 것처럼 언제나 블라인드를 드리우고 있었다. 실제로 집 안에는 질병이 있었다. 소모된 삶이라는 질병이. (20~21쪽)
더 우아한 방법일수록 더 드물다. 완벽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가장 위험한 시도가, 비록 죽음을 초래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정당성에 의해 아름다워진다. 암벽에는 약점이 있고 결함이 있다. 그 약점과 결함으로 암벽의 매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것이 정상에 이르는 길이다. (88쪽)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174쪽)
“거대한 암벽은 대가를 요구하잖아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맞아요. 우린 모든 걸 다 바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죽을 필요는 없어요.” (194~195쪽)
그는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지극한 순수의 전형이었던 삶, 절대 망가뜨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삶을 지나와버린 모습이었다. 갑자기 너무 늙어버린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한때 그가 경멸했을 법한 얼굴이었다. (270쪽)
이렇다 할 꿈도 희망도 없이 캘리포니아에서 교회 지붕 청소를 하며 살아가던 랜드는 어느 날 문득 ‘소모된 삶’이라는 질병을 느끼고 프랑스로 떠난다. ‘샤모니’를 오르기 위해서이다. 지난날 함께 산을 오르던 ‘캐벗’을 만난 것이 큰 자극제가 된 것이다. 그렇게 떠난 그는 남다른 등반 실력과 어쩐지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이미지, 무리 짓지 않고 다니는 고독한 분위기 등으로 등반가들 사이에서(그리고 곳곳의 다양한 여성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하고 결정적으로 알프스의 ‘드뤼’에서 고립된 조난자 두 사람을 구출함으로써 산악계의 영웅이 되고 엄청난 명성을 얻는다. 당연히 이 명성은 그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명성과 부, 그리고 여자(물론 그 전에도 여자들이 그만 보면 홀린 듯이 줄줄 따른다)- 그러나 랜드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애초에 질병 같은 소모된 삶을 벗어나 산이 주는 긴장과 전율에 몸을 맡겼던 사람이 아닌가, 그렇기에 랜드는 이 성공과 명성을 계속 누릴 인물이 아니다. 그는 고독한 늑대처럼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사람이니까.
이런 줄거리와 묘사는 앞서 말했듯이 에베레스트와 같은 높은 산을 오르는 서구 산악인들의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고독한 얼굴>에서 주로 배경이 되는 알프스와 몽블랑 등은 유럽에 위치하나 에베레스트는 네팔과 티베트 국경에 자리하고 있어 많은 서구인들이 ‘영적 구원’을 꿈꾸며 떠나는 장소였다. 그리고 현재도 그렇다. 게다가 쉽사리 등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남성성을 과시하는 경쟁’의 장이 되기도 했다. 정상을 ‘정복’하는 자에게는 명성과 부(富)가 주어진다. 그래서 너도 나도 앞다투어 산, 그 높은 산으로 떠난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사람이 대놓고 나는 명성과 부를 좇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그들은 <고독한 얼굴>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영성을 구현’한다는 생각으로 산에 오른다. 거기 약동하는, 꿈틀거리는 삶, 생생한 삶이 있고, 여기 이 도시에는 질병 같은 소모된 삶이 있을 뿐이다. 산을 이렇게 신성시하는 것, 등반이라는 행위에 어떤 영적인, 정신적인 고행이, 수도자와도 같은 고매하고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닐까. 실제로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에서는 1920~30년대 서구의 등반가들은 그 무렵 천박한 물질주의에 결여된 ‘영성을 구현’한다는 생각으로 산에 올랐고, 이들은 대개 금욕주의, 신비주의, 도덕주의적 성향이 강했다고 말한다. <고독한 얼굴>의 ‘버넌 랜드’가 딱 이런 인물이다(금욕만 빼고).
그런 까닭에 이 서구 원정대들은 히말라야의 셰르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산에 오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셰르파들은 자신들의 ‘영성적인 고급 스포츠 게임’의 훌륭한 조력자로서만 존재해야 했다. ‘근대가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이라면 등반은 숭고하고 초월적’이며, ‘근대가 시끄럽고 산만하다면 등반은 평화롭고 성찰적’이다. 또한 ‘근대가 편하고 지루하다면 등반은 어렵고 도전적이며 스릴이’ 있다. <고독한 얼굴>에서는 이 모든 것이 설터의 건조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으로 숭고하게 그려진다. 랜드가 그렇듯이(어쩌면 랜드의 실제 모델인 게리 헤밍이 그랬듯이) 설터도 이 서구 산악인들이 산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과도 같은 시선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이토록 속세의 모든 욕망을 초월한 듯한, 그 ‘질병’과도 같은 삶을 경멸하던 버넌 랜드는 어쩜 그렇게 여자를 향한 욕망만큼은 사그라들지 않는지, 그리고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여자들은 기꺼이 그를 위해 제 한 몸을 던지는지 산을 ‘정복’하듯이 이 여자 저 여자 ‘정복’하고 다니는 주인공의 행태에는 실소와 함께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고산 등반이라는 ‘스포츠’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며 여성 등반가들에게 배타적이었던 역사가 떠올라 더 불쾌해진다.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 히말라야 등반은 압도적으로 남성의 스포츠였다. 거의 배타적으로 셰르파들과 부유한 선진국 남자들만 참여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와서 페미니즘 운동의 등장으로 상당수 여성들이 등반이라는 스포츠에 발을 들였고, 셰르파 여자들, 즉 ‘셰르파니’도 등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여성의 등장에 남성 등반가들의 반응은 반대하고 적의를 품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등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저 숭고한 산은 남자가 오르는 것이고 여자는 그저 그 산을 오르는 고독한 행위자들을 위로해주는, 또는 그런 역할에 머물러야만 하는 존재란 말인가?
이렇게 고산 등반에 관한 전형적인 묘사로 점철된 <고독한 얼굴>은 설터가 온갖 자료와 기사를 섭렵해서 이를 바탕으로 호기롭게 상상력을 발휘했지만 좀 진부하게, 그리고 ‘등반’에 관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 채 써내려간 작품 같아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195쪽)라는 랜드의 이 멋지고 의미심장한 대사조차도 공허하게 다가온다. 설터가 이 작품을 통해 그리고자 한 ‘고독한 얼굴’의 주인공은 버넌 랜드였을 텐데, 어쩐지 이 속세의 욕망에서 결국 자유롭지 못한 못난 인간들을 바라보는 저 산의 그 얼굴이 아닐까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