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퇴근 후 도서관에 다녀왔다. 6월 희망도서로 신청한 책이 도착했다고 해서 저녁 먹고 잠깐 산책 삼아 나갔는데 갑자기 또 쏟아지는 폭우를 피해 한 시간쯤 도서관에서 머물다 나왔다. 도서관에 가서 서가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면 마음이 무척 편안해지는데, 사실 이런 기분은 서점에서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서점은 도서관에 비해 번잡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도서관에 가면 늘 가는 코너, 그러니까 주로 문학책이 꽂혀 있는 곳에서 서성이는데 검색해서 빠르게 원하는 책을 찾기보다는 이렇게 한가롭게 거닐다 뜻밖의 책을 발견하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 같다. 어제는 몇몇 새로운 작가의 책이 눈에 들어오기는 했는데 빌려오지는 않았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수요일인가 뭔가 해서 두 배로 대출을 받을 수 있어 총 10권을 빌려올 수 있었지만 그래봤자 다 못 읽고 반납할 걸 알기에 욕심을 내려놓고 다섯 권만 빌려왔다. 어제는 도서관을 나오면서 심드렁하게 속으로.... ‘에, 신간도 별로 없네. 우리집만 못해....’하고 나왔는데.... 그래, 그러니까 집에 있는 책부터 읽으라니까!!!
이사 전까지 책을 안 사리라!(사실 이사 가서도 더 늘리면 안 되긴 해. 읽는 만큼 팔거나 산 책은 다 읽고 사!) 다짐했지만 이렇게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빌려오고, 또 음, 에, 음... 그러니까 동거인 몰래 사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택배를 받는 대신, 서점에 들러서 한 권 두 권 야금야금 사는 거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미쳐 증말 이것도 병이다. 병.
그렇게 빌리고 몰래 산 책들....
헨리 제임스, <비둘기의 날개>
헨리 제임스의 신작!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출판사 책 소개에는 ‘헬레나 본햄 카터 주연, 영화 <도브>의 원작!’이라는데 영화는 잘 모르겠고, 믿고 읽는 헨리 제임스라 구매.....가 아니고 희망도서로 신청. ㅋㅋㅋㅋ ‘영국인 케이트 크로이와 머튼 덴셔는 약혼한 사이로, 너무나 결혼하고 싶지만 경제력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다. 머튼이 기자 일로 여행을 떠난 사이, 케이트는 부유하지만 알 수 없는 병으로 고통받으며 시한부 인생을 사는 미국인 밀리 실을 알게 된다.’는데.... 왠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벵하민 라바투트,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이 책도 희망도서로 신청. 요즘 핫한 책이다. 사서 볼까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뒀었는데..... 이사 가야 해... 아니 그것보다는 처음 만나는 작가라 아직 뭐랄까 덜컥 사도 괜찮을까 싶은 미심쩍은 마음이 있었달까. 아무튼 칠레의 젊은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세 번째 작품으로, 2021 부커상 최종심에 오른 논픽션 소설.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때마침 몇 주 전에 예약해놓은 이 책도 도착해서 같이 빌려왔다. 구어, 지역방언, 신조어, 노동 현장의 언어, 이주민의 한국어…. 성별, 연령, 계층, 국가도 모두 다른 다종다양한 언어 사용자와 이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 이를 둘러싼 삶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섬세하게 들여다본다고.
레이먼드 카버, <우리 모두>
사실 이 책 출간된 것 보고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내가 번역 시집은 잘 읽지 않는 관계로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카버임에도 사지 않았다. 그런데도 궁금한 카버의 문장들.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살 것 같다. 그런데 어제 살포시 도서관에서 몇 장 읽어본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에 들어.... ㅠㅠ (왜 우니?)
그러니까 이런 시......
나도 언젠가 서른다섯이었던 때가 있었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서른다섯 때 내 심장은 텅 비고 시들어 있었다!
그것이 다시 흐르기 위해서는
다섯 해가 더 지나야 했다.
이 강가의 내 자리를 떠나기 전, 나는 여기서
마음껏 오후 시간을 보낼 것이다.
강을 사랑하는 일은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다.
강의 원천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사랑하는 일.
나를 불어나게 하는 모든 걸 사랑하는 일.
_<물이 다른 물과 합쳐지는 곳>
프랑수아즈 사강, <패배의 신호>
지난번에 빌렸다가 결국 못 읽고 반납했던 책인데 서가에 얌전히 있어서 다시 빌려 옴. 궁금하지만 선뜻 사게 되지는 않는 사강의 책(미안하다 사강아, 그렇지만 내게 당신의 작품은 그래... 그래도 궁금한 게 어디야). <신기한 구름> 이후 4년 만에 출간했던 사강의 여섯 번째 소설로 그녀가 삼십대에 쓴 작품.

이렇게 빌려왔다. 당당하게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몰래 산 책
몰래몰래 여러 권을 샀지만..... 그중 신간만 소개.
캐링턴, <귀나팔>
영국 태생의 멕시코 초현실주의 화가, 리어노라 캐링턴의 소설. 초현실주의 화가라 그런지 이 작품도 약간 초현실주의적인 면이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70에서 100세까지의 할머니들이 대거 등장한다. 심지어 주인공 할머니는 아흔두 살!!! 고양이를 키우며 멕시코로 추정되는 한 주거지역에서 아들 가족의 집에 얹혀산다. 나이 들었기에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 어느 날 친구가 선물해준 귀나팔을 받고서부터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잘 들리기 시작하는데....!
페르난도 바예호, <청부 살인자의 성모>
벌써 다 읽고 냉큼 100자평 써서 올리고 민음사 세계문학 꽂아둔 곳에 살포시 꽂아두었는데.... 책등이 너무 새 책 티가 나서 움찔움찔. ㅋㅋㅋㅋ 콜롬비아의 참혹하고 폭력적인 사회가 날것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
호세 에우스타시오 리베라, <소용돌이>
요즘 콜롬비아 문학이 봇물 터지듯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이 책도 그중 하나. 우리나라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으로 젊은 시인 아르투로 코바가 겪은 사랑과 폭력이 뒤엉킨 모험을 그리고 있다. 작가 사망 이후 여러 차례 영상화되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는 등 콜롬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처음 몇 장만 읽어봤는데 일단 문장 같은 것은 나에게는 합격점.
압둘라자크 구르나, <낙원>
압둘라자크 구르나 3종을 모두 장바구니에 담아뒀었는데 이렇게 야금야금 서점에서 한 권씩 사고 있다. 100자평, 리뷰 모두 남김. 그리고 책꽂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코너에 살포시 꽂아둠. 동거인은 모르는 것 같아. ㅋㅋㅋㅋㅋㅋ
디어드라 마스크, <주소 이야기>
이 책 부제가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하여’라는데 이거 너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근데 왜 아직 안 읽니?) 주소의 기원과 역사를 탐색하고 주소 체계와 거리 이름에 담긴 다양한 사회 정치적 이슈를 탐구한다. 저자는 미국 전역뿐 아니라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지역과 한국과 일본, 인도, 아이티,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전 세계의 사례를 취재하고 인터뷰했다고.
아무튼 고새를 못 참고 야금야금 서점에서 한 권씩 사들이고 있는 나.... 굿즈도, 10% 할인도 다 포기하고 서점에서 몰래 몰래 사는 나..... 다 읽고 냉큼 새 책이 아닌 척 책꽂이나 책탑 밑이나 중간에 밀어넣고 있는 나..... 이것도 참 병이다, 병. 책탑 사진은 그래서 없어요.
이 페이퍼, 최초에는 책탑 사진은 없었는데.... 아니 알라딘채콴자, 이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책탑 사진을 찍어올리기로 약속하고... 잠자냥은 어제 퇴근 후 호시탐탐 사진 찍을 기회를 노렸는데! 어제 따라 내리는 비에 동거인이 삼겹살에 소주를 먹자고 외쳤고.... 밖에서 주륵주륵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삼겹살에 소주 각 1병씩 마시고 집으로 들어오니, 이 인간이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원래 이 사람은 저녁마다 길냥이 밥주러 나가는 사람, 그렇다 나는 책에, 이 사람은 고양이에 진심인... 아니 미친자들...-_-;;) 나는 기다리다 못해 밥주러 안 나가냐고 물었더니 비도 많이 오고, 다른 사람이 이미 줬다고(동네에 같이 돌보는 사람들 많음 -_-;;) 오늘은 안 나간다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인간을 조종, 그렇다! 가스라이팅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널 기다리는 애가 있지 않아? 너가 가야지 맛있는 거 먹는 거 아냐? 비도 오는데 이거 하나 더 주던가..." 하면서 우리 둘째가 특별히 좋아하는 간식 런치보니또 치킨 맛을 주섬주섬 꺼내주었다. 그랬더니 이 조종하기 쉬운 사람은 으응, 그렇겠지 하면서 주섬주섬 나가더라능.... 그 틈을 타서 찍은 사진!

으응??? 왜 책이 더 많아? 본문에 소개된 것보다 더 많아! ㅋㅋㅋㅋㅋㅋ 그래요, 중고로 저만큼 샀어요. (옆에 둘째)

요즘 내 책상을 자기 돌침대 삼아 주무시는 이분.... 자다 노려보심. "시방 뭣하는 짓이여?"

귀여운 나를 찍어야지, 이따위 먹지도 못하는 짐덩어리 책을 찍냐? 닝겐은 참 이상하다 하는 표정......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렇게, 이번에도 책과 고양이가 함께 있는 풍경~ 사진 올리기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