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의 씨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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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 중 《회색 여인》과 《사악한 목소리》두 권을 먼저 읽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조금 실망하고 심드렁 하던 참에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를 읽기 시작했다. 표제작인 <석류의 씨>부터 읽을까 하다가 순서대로 보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 단편 <편지>를 읽기 시작하고 몇 쪽 지나지 않아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아, 역시 이디스 워튼이구나, 참 잘 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묘하게 비아냥대는 듯한 문장! 소설의 즐거움은 단지 줄거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역시 문장의 맛에도 있지! 이디스 워튼, 그녀는 어쩜 이렇게 심리 묘사에 탁월할까, 그런 생각들이 든다. 게다가 <편지>는 어쩜 이야기도 이렇게 재미난지.
 
리지 웨스트는 가정교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여인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은 유명한 미국 화가인 빈센트 디어링 씨의 딸 줄리엣을 가르친다. 줄리엣을 가르친 지는 2년 째. 그런데 아이는 리지의 뜻대로 잘 되지 않고, 아이의 부모는 화가인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딸의 교육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견디다 못한 리지는 그래도 딸에게는 관심이 있어 보이는 디어링 씨에게 어느 날, 큰맘 먹고 줄리엣에 관한 교육 상담을 신청한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를 가르치는 일의 힘겨움을 토로하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만다. 아니 그런데, 그 틈을 타 이놈의 디어링 씨는 갑자기 리지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위로하려 드는 게 아닌가! 여기서부터 웬만한 독자들은 오, 안 돼 리지! 그러지 마! 하는 심정이 들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이 여자가 또 불구덩이로 들어가는구만 혀를 쯧쯧 찼다. 아니나 다를까, 이 디어링 씨는 이윽고 흔한 래퍼토리를 읊는다. ‘어린 줄리엣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은 위층의 어머니 때문’이며 ‘자기 아이에게 무익한 충격만 주고 그런 충격을 다독일 적절한 돌봄을 베풀어주는 것조차 아까워한 어머니’라는…. 물론 아내가 “병자” 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면서 아픈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며, 걱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지만, 그놈 말에 따르면 결국 딸의 교육이 엉망인 것은 다 아내 탓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디어링 씨의 아내는 왜 위층에만 있는 것일까? 왜 아픈 것일까? 혹시 그녀도 집안에만 갇히다시피 한 건 아닐까? 그녀가 아픈 건 디어링 씨 때문은 아닐까? 원치 않는 결혼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런 것들과 담을 쌓고 싶어서 위층에서 내려오지 않는 건 아닐까, 아니 내려 올 수 없는 상태인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고, 그렇기 때문에 디어링이라는 남자와 리지가 더 가까워지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독자의 걱정을 저버리고 안타깝게도 리지는 디어링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잘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가 화가라서 예술을 알고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말도 잘 통해! 그러니 먹고사는 것에 급급해서 가정교사로 이집 저집 떠돌며 일하느라 연애라고는 해보지도 못했던 리지가 이 남자에게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독자는 아무래도 디어링에 대해 못미더운 감정이 가시지 않는다. 게다가 리지, 도망쳐 이 여자야! 하고 외치고 싶은 순간이 또 한 번 더 찾아온다. 딸과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빈센트 디어링! 그동안 그를 애타게 기다리던 리지는 빈센트가 돌아오자 기쁜 마음으로 그의 집을 찾아가는데, 이상하다! 딸과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무거운 얼굴로 아내가 사망해서 상속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아닌가. 아내가 죽었는데 어린 딸은 친척 집에 맡겼다?! 아내는 왜 급작스럽게 죽었을까? 아무리 병을 앓고 있었다하더라도 너무나 뜻밖의 일이다. 게다가 딸은 왜 그대로 놔두고 와? 정상적인 상태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모든 정황이 이상하다고 한번쯤은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리지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의 잘 생긴 얼굴에 폭 빠졌기에 빈센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를 미국으로 떠나보낸다. 편지해요, 꼭 편지해.....!

리지는 그에게 편지를 수없이 보낸다. 그러나 그로부터 답장은 점점 뜸해지더니 이윽고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를 이해해보려 애쓴다. 아내의 사망 때문에 정신이 없겠지, 어린 딸을 홀로 돌보느라 힘겨울 거야. 미국에서 다시 정착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등등. 때로는 분노에 차서 냉정하게 거의 헤어지자는 투로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답이 없다. 그래, 이렇게 끝인 거로구나. 리지도 체념하기에 이르고, 독자들도 그 희멀건한 남자 빈센트란 놈은 그렇게 젊은 처자를 농락하고는 미국으로 튀었구나 한심한 놈, 하고 혀를 차면서 이렇게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나는가 보다 싶다. 이 무렵 리지의 마음 상태를 이디스 워튼은 이렇게 쓴다.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또 한 번 워튼에게 감탄한다.


자신의 고뇌에 마음껏 빠져들 여유가 있었다면 이런 사념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서 일을 해야 했다. 세탁부에게 요금을 치르고, 마담 클로팽의 청구서대로 매주 돈을 지불해야 했고, 검소한 습관에도 감당해야 할 온갖 소소한 ‘잡비’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언젠가 병들고 일할 능력이 없어질 날이 온다는 두려움이 일할 수 있는 동안 일하도록 그녀를 몰아댔다. 그런 두려움 없이 지내본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 단조로운 불행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병들고 ‘자기 한 몸 거둘 수 없게’ 되는 데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편지>, 《석류의 씨》, 35쪽)


가난한 처자는 애인을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다. 먹고살아야하는 공포가 그녀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가 그에게 버림받고도 그 슬픔에 폭 젖어 있기보다는, 이제 또 혼자라는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언젠가 병들고 일할 능력이 없어질 날이 온다는 두려움’이 그녀에게는 더 크다. 그 먹고사니즘의 공포는 그녀를 압박하지 않은 적이 없다. 리지는 그런 ‘두려움 없이 지내본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보다도 언젠가 병들고 ‘자기 한 몸 거둘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더욱더 크다. 그런 공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100여 년 전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제 한 몸 돌봐야 하는 여성들의 공포를 뉴욕 상류층 출신의 이디스 워튼이 이처럼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는 100여 년이 지난 현재의 여성들도 여전히 고개를 끄덕일 절대 공포이다.

어쨌든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리지는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는다. 아, 물론 리지가 로또를 산 건 아니다. 이 무렵 가난한 처녀나 청년에게 로또란 얼굴도 모르던 부자 친척이 갑자기 죽으면서 그녀 또는 그에게 유산을 남기는 일이다. 리지에게도 뜻하지 않은 그런 행운이 주어지고, 그녀는 이제 물질적으로 더는 쪼들리지 않는다. 먹고사는 것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부유하게 지내다 보니 주변에서는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주기도 하고 리지도 이제는 다즐링인지 디어링에 관한 기억도 서서히 잊혀가, 그 새 남자를 만나볼까 싶어진다. 그런데 그는 아, 너무나 잘 생긴 다즐링과 비교가 된다. 그의 이름은 벤.... ‘어깨가 좁고 각진 체형’에 ‘희미한 감정의 흔적에도 전혀 변치 않는 둥그런 얼굴’, ‘아기 같은 뺨과 직각의 칼라 위로 드러난 푸른 사각턱’ 등등 리지에겐 너무나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벤 씨..... 리지는 그래도 ‘기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의 눈과 귀에 집중’(40쪽) 하려고 한다. 나는 이디스 워튼의 이런 문장에서도 포복절도한다. 아무튼 그런 찰나에 리지 앞에 다시 나타난 그 썩을 놈의 다즐링! 그는 예전과 달리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 잘생긴 얼굴은 어디 가지 않았다(어디 좀 가지 좀...). 그리고 리지는 그가 자신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지 않았음을, 답장도 씹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또 다즐링의 늪에 폭 빠져서는... 결국 독자들의 온갖 만류와 잔소리와 반대와 결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국 결혼하기에 이른다. 리지는 ‘항상 물질적으로 너무나 가난했기에 잔돈까지 세어가며 여윳돈을 계산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적어도 감정을 아낌없이 쓰는 즐거움은 알았’고 ‘부자가 물 쓰듯 돈을 쓰듯이 자신의 마음을 아낌없이’(26쪽) 다즐링에게 줘버리고 결국 그와 결혼까지 하고 만 것이다! 그 후 그녀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이 작품의 가장 큰 반전이자 재미는 디어링(이라고 쓰고 다즐링이라 부르고 있는 그 남자)과 리지의 행복해 보였던 결혼 생활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그 ‘나락’의 계기가 되는 사건에 있다. 디어링은 여러 차례 이상한 놈이라는 신호를 리지에게 보냈다. 한발짝 떨어져서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위층에만 있는 병든 아내, 딸의 교육에 관한 상담을 하는데 느닷없이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남자, 엄마가 죽었는데도 딸을 친척집에 그냥 놔두고 오는  남자, 갑작스레 아내의 죽음을 핑계로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편지 한 장 없는 남자. 이런 단서만 조합했어도 다즐링은 충분히 멀리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아니 다시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리지는 벤 씨의 ‘어좁’에 ‘아기 같은 얼굴’ 대신 어디지 음울해 보이는 잘생긴 예술가형 다즐링을 선택하고 만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을 알고 박차고 나갈 수 있었음에도, ‘집이 무너지면 폐허에서 도망’(66쪽) 친다는,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저앉고 만다. 그 무렵 여성이 무너진 집, 폐허가 된 집을 떠나기 쉽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제 폐허 위에서 거짓된 삶을 살아갈 리지의 인생에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편지>는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가장 현실적이다. 살인이 일어나지도 않고, 유령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는 나머지 세 작품보다 이 작품, <편지>가 가장 무서웠다. 현실에서 너무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여성들이 리지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살아갈 것이다. 그런 남자와 함께, 그런 남편과 함께. 그 삶이 더 공포이지 않은가?

<석류의 씨>, <하녀의 종>에서도 이처럼 잘못된 선택으로 그다지 권장하기 어려운 남자들을 남편으로 맞아 살아가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 남자들에게는 숨길만한 과거가 있거나(<하녀의 종>의 ‘브림프턴 씨’), 굳이 숨기지는 않지만 불쾌한 과거(<석류의 씨>의 ‘케네스 애슈비’)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전처이거나 현재의 아내들은 병을 앓거나 그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그 아내들과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결국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그 남자들로 인해 병들었거나, 세상을 떠난 아내들로 인해 현재 고통 받는 사람들은 또 공교롭게도 현재의 아내(<석류의 씨>의 ‘샬럿 애슈비’)이거나 그 아내를 모시는 하녀(<하녀의 종>의 ‘하틀리’)이다. 여자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안정적인 삶과 보호를 받지만, 사실 그 보호는 속박일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자유를 감금당한 고립과 유폐라는 것을,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끔찍한 삶은 이 여인으로부터 저 여인에게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석류의 씨》의 세 단편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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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25 12: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디스 워튼 책이라니 읽어봐야 겠습니다 ^^ 수수께끼 이야기 같아요 ㅋ

유령보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그것은

사람이겠죠? 옷장에서 갑자기 귀신이 나오는것 보다는 사람이 나오는게 더 무섭다는 애기를 어디서 들어본거 같습니다 ^^

잠자냥 2022-03-25 14:09   좋아요 2 | URL
네, 역시 재미납니다. 유령보다 귀신보다 잘못 만난 사람이 더 무섭죠! 현실에서도 그렇고, 소설에서도 그렇더라고요- ㅎㅎㅎ

다락방 2022-03-25 16: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말이죠, 제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리뷰를 봤다면, 이 리뷰만 봐도 너무 재미있어서 기꺼이 책을 샀을것 같습니다. 후훗.
저는 그 남자 특유의 게으름과 무심함이 진짜 너무 싫었어요. 그리고 자신은 비록 유부남이지만 사랑에 빠져 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어쩐지 어깨 으쓱해지는 그 감정도 너무 잘 전해지더라고요. 너는 이런 사랑이란 감정, 남자와의 사이에 오고가는 이 교류 잘 모르지? 하는 그 어떤 젠체함 이랄까. 하여튼 재미납니다. ㅎㅎ 저도 이디스 워튼 워낙 재미있게 읽긴 하지만 이 책도 참 재미있네요. 후훗. 저는 아직 단편 두 개 더 읽어야 해요.

잠자냥 2022-03-25 16:38   좋아요 1 | URL
네, 정말 몰입도 최고에요! ㅎㅎㅎ
어우 그 남자 정말....... 휴 그 남자에 관한 묘사도 정말 압권이죠. ㅎㅎㅎㅎㅎ
나머지 두 편도 재미나게 읽으세요. 전 마지막 단편도 정말 재미나더라고요. 짧은데 강렬!

다락방 2022-03-25 16:51   좋아요 2 | URL
저는 읽으면서 <징구>랑 <로마의 열병> 생각도 나더라고요. ㅎㅎ

mini74 2022-03-25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썩을 놈의 다즐링! 에서 자냥님의 분노가 느껴집니다 ㅋㅋ 자냥님 리뷰 읽음 다 읽고 싶어집니다 ㅋㅋ 저 자냥님 글 보고 금색 사서 읽고있어요 ~~

잠자냥 2022-03-25 17:54   좋아요 1 | URL
ㅋㅋㅋ 다즐링 좋아하는 분들께는 좀 죄송하네요. ㅋㅋㅋㅋ 이 책 재미나요! 언제 읽어보세용~

독서괭 2022-03-26 0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너무 재밌어요!! 은근슬쩍 다즐링이라고 이름 바꾸신 것도 넘 웃기고요ㅋㅋㅋㅋ 읽으면서 느끼신 감정들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전 이디스워튼 순수의시대 사놓기만 하고 계속 못 읽고있는데 얼른 읽어봐야 할텐데요..🙄

잠자냥 2022-03-26 11:58   좋아요 2 | URL
깨알 웃음 포인트 알아봐주셔서 감사해요! ㅋㅋ 책은 더 재미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