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나락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조이스 박 옮김 / 녹색광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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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일상, 너무나 평온해서 그 평온함이 행복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평범한 일상. 그런 일상에 미세한 균열이 가거나, 조금 흔들리거나, 깨어질 때 사람들은 그 평온함을, 행복인지 깨닫지조차 못한 그 나날을 안타까이 여기며 그런 순간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잃어버리거나, 잃게 될 위험에 처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아무렇지 않은 나날들의 소중하게 깨닫는다. 요즘 내 평화롭던 일상, 그래서 미처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날들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마음이 심란해서 책도 잘 읽히지 않는데, 그럼에도, 그럴수록 책으로 피신하고자 책을 들고 읽으려 애쓰곤 한다. 피츠제럴드의 《행복의 나락》은 제목 때문이었을까 요즘의 내 눈길을 더 사로잡는다.

《행복의 나락》에는 한때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던 아름다운 순간들, 미처 행복인지 깨닫지 못했으나 잃어버린 후에야, 놓치고 나서야 그것이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알게 되는 이들. 그래서 그 행복했던 순간을, 빛나던 한때를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 그러나 다시 올 수 없음을 알기에 그런 순간을 가슴 깊이 묻고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행복의 나락>의 ‘록산’과 ‘제프리’ 두 사람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커플이다. 그들은 젊고, 아름다우며, 건강하고, 풍족한 데다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한다. 둘만 지내도 지루할 틈이 없다. 아니 오히려 둘만 있을 때 더 즐거운 완벽한 한 쌍이다. 이 행복하기 짝이 없는 커플에게 일상의 행복,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 느닷없이 찾아온다. 시작은 아주 미세하기 짝이 없다. 포커 게임에 몰두한 제프리의 어깨에 얹으려고 록산은 손을 뻗는다. 그런데 제프리는 손이 닿자마자 벌컥 화를 내며 거칠게 팔을 휘둘러 그 손을 뿌리친다. 록산에게는 생애 최대의 충격이다. 그 상냥하고 배려심 많은 제프리가 이렇게 본능적으로 거친 동작을 보이다니. 제프리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자신이 록산에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지? 그러나 이 일은 시작, 전조에 불과하다. 두 사람의 삶은 그때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말미암아 행복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록산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와 록산이 대체 무엇을 했기에 삶은 이들에게 치명타를 날리는 걸까?’(99쪽). 록산에게 삶은 너무 빨리 왔다가 가버린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쓰라림이 아니라 연민’이며 ‘환멸이 아니라 오직 고통’이다’(115쪽). <행복의 나락>은 삶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음을, 인생의 발아래에는 언제든, 누구의 인생이든 ‘거센 물결이 철썩거리고 있음’을 ‘지도에도 없는 갈라진 틈이 번뜩이는 깊은 아가리를 드러낼 수 있음’(88쪽)을 보여준다.

만일 록산의 삶에 제프리가 들어옴으로써 그녀의 저 행복한 나날들이 언젠가 나락으로 기울 수 있다고 누군가 경고했다면, 그렇다면 록산은 자기 인생에서 제프리를 지워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록산은 그런 경고를 가벼이 넘기면서 제프리의 환한 웃음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을 것이다. 록산만이 아니다. 《행복의 나락》에 등장하는 대다수 남녀들은 자신에게는 버거운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런 상대를 사랑하기를, 선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겨울 꿈>의 ‘덱스터’는 ‘주디’라는 이름의 화려하고 제멋대로인 소녀를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그녀로 말미암아 삶이 휘둘리더라도 주디에게 자기를 던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덱스터는 어릴 때부터 반짝이는 것 자체를 원한다. 종종 그는 자신이 왜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가장 좋은 것을 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로 인해 때로는 알 수 없는 거절과 금지를 맛보기도 한다. 주디는 완벽하게 반짝이는 것이다. 덱스터를 사랑하는 것처럼 연기할 수는 있지만 결코 사랑하지는 않는 주디. 덱스터는 그럼에도 주디를 갈망하고 또 갈망한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삶이 어긋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주디는 덱스터가 늘 꿈꿔온 반짝이는 그것 자체이기 때문이며, 그가 ‘잠시 장악하고 소유하는 들뜨고 열광적인 설렘’(191쪽)이기 때문이다.

<오, 붉은 머리의 마녀>의 ‘멀린’에게도 ‘주디’ 같은 존재가 있다. 어느 날 서점에 불쑥 들어와 그에게 잠깐 동안의 일탈을 선사하고 사라진 여자 ‘캐롤라인’이 그렇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서점 일에 잠시 일탈과 소란, 즐거움과 반짝이는 한때를 선사한 그녀 캐롤라인.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워서 멀린 같은 평범하고 소박한 남자에게는 결코 꿈을 꿀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저 먼 별 같은 존재인 캐롤라인. 그럼에도 멀린은 그 한때를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평생 간직하며 살아간다. 잊을만하면 캐롤라인은 그의 앞에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 그 반짝이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환상은 너무나 멀리, 저 멀리에 있고, 현실은 그의 발아래 자리하고 있기에 멀린은 환상의 여인 대신 현실 속 여인인 ‘올리브’와 결혼해 그럭저럭 살아간다. 덱스터가 주디 대신 ‘아일린’이라는 평범한 여자와 결혼을 약속하듯이……. 덱스터는 아일린이 ‘자신 뒤에 드리워진 커튼, 빛나는 찻잔을 젓는 손, 아이들을 부르는 목소리 정도’의 존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아일린과의 평범한 삶을 선택함으로써 ‘이제 불꽃과 사랑스러움은 가버렸고, 밤의 마법과 시시각각 달라지는 시간과 계절에 대한 경이감, 가냘픈 입술이 아래로 드리워지며 그의 입술에 다가와 그를 눈동자의 천국까지 인도해 주는 일, 그런 것들은 마음속 깊이’ 묻혀버린다. 많은 이들의 삶이 그렇듯이…….

덱스터와 멀린 같은 남자들만이 반짝이는 것, 환상에 자기 자신을 기꺼이 던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 돋은 잎>의 ‘줄리아’ 역시 너무나 잘생긴, 그래서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남자 ‘딕’을 마음속에서 내치지 못한다. 그토록 주변에서 말리는 상대임에도 그와 함께 하기를 기꺼이 선택한다. 심지어 딕은 줄리아가 생각한 사람과 아주 거리가  먼데도 그녀는 끝까지 딕이 그렇지 않으리라 믿고, 그 믿음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줄리아의 이 환상을 깨지 않으려고 애쓰는 ‘필’은 어쩌면 환상이 깨진 뒤의 환멸을, 그 환멸이 주는 고통의 씁쓸함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아닐까. 그래서 나 또한 멀린이 캐롤라인의 진실을 알게 되지 않기를, 어쩌면 나조차도 알게 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때로 ‘진실이란 아주 진부’하기에.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된 후에는 찬란하게 빛나던 한순간 대신 ‘쑥대밭이 된 서점’ ‘엉망이된 책들, 한때 아름다웠으나 찢어진 진홍빛 램프의 잔해들. 반짝이는 부서진 유리 입자들’(28쪽)이 더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서른다섯 살에서 예순다섯 살까지의 세월은 설명할 필요 없는 혼란스러운 회전목마처럼 수동적으로 사는 멀린 앞을 스쳐 돌아갔다. (...) 대부분의 남녀들에게 이 30년의 세월은 점차 인생에서 물러나는 일로 채워진다. 처음에는 젊음의 무수한 즐길 거리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수많은 피난저가 있는 앞자리에서 물러나서는, 피난처가 훨씬 줄어든 줄로 후퇴하는 것이다. 여러 야망이 사라지며 한 가지 야망만이 남게 되고, 여러 오락거리가 한 가지 오락거리로 줄고, 많은 친구들이 소수의 친구로 줄어들다가 그들에게도 무감각해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강하지 않은데 강한 자가 되어 고독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는 포탄들이 지긋지긋한 휘파람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고, 두려움과 피로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린다. (<오, 붉은 머리의 마녀>, 53~54쪽)


생의 초반은 반짝이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반짝이는 것들을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때로는 그 반짝이는 것 자체가 결코 반짝이는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삶은 잿빛 우울함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환멸의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반짝이는 것, 덱스터의 ‘겨울 꿈’과도 같은 것들은 그래서 저 멀리, 결코 닿지 않을 곳에 둔 채 살아가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갖지 못했기에 환상이 깨지는 일도 없을 테니까. 덱스터는 주디와 결혼해서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시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더라면 더 많은 것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덱스터에게 주디는 언제나 늘 영원히 반짝이는 존재로 있어야 했다. 그 실체가 환멸을 불러일으켜 삶의 쓸쓸함과 비애를 더욱 배가해줄 뿐이라면 반짝이는 것 자체로 있어야 하리라. ‘삶의 후반전이란 삶에서 이것저것을 잃어가는 기나긴 과정’(131쪽)이므로 이 지상에서의 삶을 버티기 위해서는 그 짧고 깊은 행복을 영원히 간직하며 살아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반짝이는 것 자체에 감춰진 진실과 그 진실이 보여주는 환멸도 삶은 아닐까. 그 환멸의 고통조차 삶은 아닐까. 만일 그런 환멸과 그것이 주는 고통을 알지 못했다면 덱스터도, 멀린도, 줄리아도, 또 록산도 자신들의 ‘겨울 꿈’이 언젠가는 사라지기에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그래서 더 찬란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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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02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랑 리뷰 보니 읽고싶어지네요~!
민음사에서 나온 피츠제럴드 단편선이랑 중복된게 몇개 있는거 같아서 고민됩니다 ㅋ

잠자냥 2021-03-02 12:14   좋아요 2 | URL
피츠제럴드 단편선은 곳곳에서 많이 나와 있어요. 양으로 따지자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의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1 , 2>가 아마 가장 많은 양을 수록하고 있을 것 같고요(같은 출판사에서 최근 나온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요>는 미출간 단편모음집입니다). 펭귄클래식 문고의 <아가씨와 철학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피츠제럴드 단편모음집입니다. 저는 예전에 펭귄클래식하고, 현대문학 단편선으로 읽었는데요, 최근 이 책으로 다시 읽으면서 느낀 이 책만의 장점이라면 일단 장정이 무척 예쁘고 ㅎㅎ ‘잃어버린 것들‘에 초점을 맞춰 다섯 편 엄선해 실었다는 점일 것 같아요. 그래서 여운이 남달랐습니다.

새파랑 2021-03-02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ㅋ 댓글보니 확 가지고 싶어지네요. 설명 너무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3-02 12:38   좋아요 3 | URL
녹색광선 이 시리즈 한 번 잘 눈여겨보세요. 장정이 일단 참 아름답고요(소장각), 현재까지 나온 다섯 권 모두 추천합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다 리뷰를 쓴 적 있는 책들이라 관심 있는 작품부터 리뷰 보시고 선택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잠자냥 2021-03-02 12:43   좋아요 2 | URL
피츠제럴드 단편 읽고 마음에 드신다면 이 시리즈의 푸시킨 단편선 <눈보라> 추천하는데요. 푸시킨 단편선은 민음사판 <벨킨이야기/스페이드 여왕>으로도 있는데, 이건 정말 비추입니다. 번역 문장이 정말 엉망이거든요. 암튼 푸시킨 단편선 읽으신다면 <눈보라>로...

Falstaff 2021-03-02 13:57   좋아요 1 | URL
앗, 제가 그래서 푸시킨 단편하고 척이 졌나요? 민음사.... 전 여태 왜들 푸시킨, 푸시킨 하는지 좀 이해가 덜 갔었거든요.
그리고.... 이 페이퍼는 잠자냥님 낚시가 분명한데, 읽은 단편도 포함되어 있는데 또 읽어, 말어... 괴민, 괴멸입니닷!

잠자냥 2021-03-02 14:29   좋아요 2 | URL
푸시킨 민음사판은 정말 정말 그 민음 세계문학 시리즈 중 비추입니다.
아, 그리고 폴스타프 님은 워낙 많이 읽으신 분인 데다가, 꽉찬 책을 좋아하시니까 이 낚시밥은 물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새파랑 2021-03-0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달에 녹색광선에서 나온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샀는데 ㅋ (가지고만 다니고 아직 읽진 못했습니다ㅜㅜ)
진짜 장정이 예쁘더라고요 ^^ 다섯권 밖에 안된다니 수집욕구가생기네요 ㅎ

잠자냥 2021-03-02 14:27   좋아요 1 | URL
아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사셨군요. 그 시리즈 중에 재미로는 <감정의 혼란>, 피츠제럴드 같은 단편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시고 싶다면 <눈보라> 추천드려요.

coolcat329 2021-03-02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시리즈...저도 3권 갖고 있는데, 참 이쁘죠. 작품도 다 좋았어요. 올해는 책 그만 사고 갖고 있는 책 읽자고 다짐했는데...😭

잠자냥 2021-03-02 14:28   좋아요 1 | URL
그럼 이 책은 내년에 사세요. 쿨럭; ㅋㅋㅋ

그레이스 2021-03-02 13: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이 찢어질까봐 비닐로 싸놓았는데...원래 장정 의도를 못살리고 있어요 ㅎㅎ

Falstaff 2021-03-02 13:54   좋아요 2 | URL
책을 비닐로 싸시면, 2~30년 지나면 책 망가집니다. 경험자예요. 오정희 <불의 강> 초판본, 흑흑....

그레이스 2021-03-02 13:57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새책을 그냥 못봐요.
버릇이 되서... ㅠ

잠자냥 2021-03-02 14:28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는 이 책 장정 재질이 천이라 그런지 고양이 털이 잘 붙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