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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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번스의 <밀크맨>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트위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리트윗 중 정희진의 찬사, “압도적! 문장의 구조, 내용 모두 완벽하다”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거의 흥미가 없었음에도 그 한마디 때문에 책을 사서 이틀 만에 끝냈다. 맨 처음, 이 작품에 흥미가 일지 않았던 까닭은 순전히 ‘북아일랜드 분쟁’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밀크맨>은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알라딘에만 리뷰가 10개나 있어서 신기한 마음에 몇 개 펼쳐서 훑어보았다. 많은 이들이 영국과 북아일랜드 사이의 분쟁을 언급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소재 때문에 주제까지 얼마쯤 예상 가능한 그런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예컨대 전쟁문학이 그렇다. 전쟁을 소재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은 조금 뻔하지 않은가? 물론 작가가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분명히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마쯤 예상 가능함’ 때문에 흥미가 떨어지기는 한다. 내 기준엔 ‘국가 분쟁’도 거기에 속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들이 <밀크맨>을 이야기할 때 ‘북아일랜드 분쟁’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 책은 일찌감치 내 흥미를 벗어났었다. 그런데 정희진이 압도적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의 책 고르는 안목을 높이 사는 터라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이 작품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분쟁을 소재로 삼기는 하지만 그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아니, ‘북아일랜드 분쟁’에 대한 작품이 아니다. 배경을 이루고는 있지만 꼭 그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해도 읽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심지어 작품 안에서 그 어떤 페이지에서도 북아일랜드니, 영국이니 하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옮긴이의 주를 제외하고). 영국 여왕 이름과 왕 이름이 잠깐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또한 중요하지 않다. ‘물 건너 나라’, ‘길 건너 공동체’, ‘물 이쪽’, ‘길 이쪽’ 등등 지역 이름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니 혹시라도 나처럼 이 책이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분쟁을 다룬 정치, 역사적 책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이 책을 멀리하는 이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을 몇 쪽 읽은 상태로 완전히 반해버린 까닭은 화자의 ‘목소리’ 때문이다. 이 작품은 열여덟, 10대 여성의 목소리로 이루어진다. 10대 소녀가 화자인 작품이 한 두 개인가? 그게 뭐가 신선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처럼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화자는 보통 그런 분쟁을 겪은 당사자인 ‘남자’이거나 분쟁 주동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분쟁으로 삶이 파괴된, 그런 인생을 살아내는 ‘소년’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밀크맨>의 화자는 열여덟살 소녀, 이제 갓 성인기로 진입한 여성이다. 그리고 그녀는 분쟁의 한가운데서 테러리스트로서 국가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치는 멋진(!) 영웅 ‘밀크맨’을 지켜보면서 찬양하거나 칭송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추악한 면을 폭로한다. 그리고 그녀는 밀크맨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이다.


아무개 아들 아무개가 내 가슴을 총으로 찌르고 고양이 같은 년이라고 하면서 나를 쏘려고 한 날이 밀크맨이 죽은 날이었다. 밀크맨은 국가암살단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그가 총을 맞은 일이 나에게는 전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 밀크맨이라는 사람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루머가 쫙 퍼져 있었고 나는 열여덞살이고 그는 마흔한살이었기 때문이다. (<밀크맨>, 9쪽)


<밀크맨>은 ‘스포일러’라고 할 만한 게 딱히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애초에 이 작품은 처음부터 중요한 모든 내용을 말하고 시작한다. 작품 첫 페이지에서 ‘나’와 ‘밀크맨’의 관계가 밝혀지고, 그가 결국 암살당해 죽는다는 사실까지 드러난다. 그 다음 쪽을 펼쳐보면, 사람들이 열여덟살인 ‘나’와, 마흔한살에, 유부남에다가 이 공동체(그러니까 국가에 반대하는, 테러리스트)의 우두머리와도 같은 밀크맨과 불륜관계였다고, 온 마을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는 달리, 밀크맨이 일방적으로 그녀를 스토킹했던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열여덟 소녀를 오직 자기가 꽂혔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의 모든 장점을 십분 활용해 스토킹하는 마흔한살의 위대한(!) 테러리스트이자 국가 반대자들의 영웅 밀크맨의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며 걸어서 집에 가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책을 읽으면서 집에 가고 있었는데, 밀크맨이 어디선가 나타난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말을 걸며 자신의 차에 타기를 종용한다. 나는 당연히 거절하는데, 그 뒤로도 밀크맨은 불쑥불쑥 그녀 앞에 나타나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행동한다. 그는 ‘나’에 대한 모든 것, 직장, 가족, 일을 마치고 저녁에 무얼 하는지, 주말에는 무얼 하는지도 다 아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거머리 같은 놈을 떼어낼 방법을 알지 못한다.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녀는 ‘일촉즉발인 사회에서 자랐’고 그곳에서는 ‘신체 폭력이 없는 한, 명백한 언어적 모욕이 가해지지 않는 한, 눈앞에서 조롱당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때문에 ‘일어나지 않은 일에 피해를 당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밀크맨은 옆에서 추근거릴 뿐이지 그녀의 몸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폭력이 아닌가? 게다가 열여덟인 나는 ‘개인공간 침해라는 게 뭔지 몰랐고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밀크맨은 이 공동체, 그러니까 국가에 반대하는 이들이 모여 살기에 국가에서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단정 지은 이 공동체의 우두머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나’가 속한 이 마을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테러와 연관이 있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도 가족이 연루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만 하더라도 오빠들 중 몇몇이 테러리스트로 국가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그러므로 이 밀크맨, 공동체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자신을 스토킹한다고, 협박하고, 통제하려 든다고 그 어디에도 호소할 길은 완전히 막힌 셈이다. 국가 소속 경찰을 찾아가는 방법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 그들은 적이고, 경찰을 찾아 갔다가는 밀고자로 지목되어 사살당하는 일을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나’가 속한 공동체를 범죄 집단으로 봤다. 경찰에게 ‘우리는 적이고 테러리스트이고, 민간인 테러리스트이거나 테러리스트 동조자이거나 테러리스트임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을지라도 용의자’였다. 그러므로 결국 모든 잘못은 ‘나’의 잘못으로 귀결된다.

더욱이 누가 내 말을 들어준다고 해도 1970년대의 이곳 사람들은 “쫓아다닌다”거나 “스토킹한다”는 말에 익숙지 않아 이해를 잘 하지 못한다. 성적으로 쫓아다니고 성적으로 스토킹한다는 말이 낯설 뿐이다. ‘그 말들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도로 가장자리로 천천히 차를 몰면서 여자를 물색하는 행동처럼 너무 이국적이고 여기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로 간주’되었다.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무단횡단하고 비슷한 정도의 위반으로 생각하거나 심지어 그보다도 가벼운 일로 취급될’ 것이다. ‘여자와 관련된 일인데다, 정치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나는 밀크맨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밀크맨의 여자’로 일컬어진다. 열여덟살인데도 당돌하게 유부남인 밀크맨과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까지도 그 소문을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그녀를 몰아세운다. 심지어 단, 한 사람 진실을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마저 그녀의 잘못이라고, 그건 네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상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런데, 그 이상한 행동이란 고작 ‘걸으면서 책을 읽는 행동’이다. 걸으면서 책 읽기는 안전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스스로를 저버리는 일이었으며 아무튼 이 공동체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비정상의 범주에 속했다. 이곳에서는 말이 왜곡되고 날조되고 과장되기 때문에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는 사이 밀크맨의 교묘한 폭력은 서서히 그녀를 갉아먹어 ‘나’의 일상은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밀크맨>에서 한눈에 보기에도 끔찍한 것은 ‘밀크맨’이라는 권력자, 이데올로기적 대의를 위해 헌신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한 사람의 삶을 짓밟는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그러는 주제에 상대가 자신과의 연애를 자랑스러워하고 즐길 것이라고 자부하기까지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괴물 같은 존재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나’가 속한 공통체의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 저열한 호기심과 거기서 비롯된 유언비어, 소문 등이 얼마나 한 개인을 파멸로 이끌어가는가이다. 이 작품에는 ‘나’를 비롯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 ‘문제 여성들(페미니스트)’, ‘핵소년’ 과 ‘알약소녀’ 등 이른바 ‘상도를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이 공동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정상을 벗어난 이들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정상을 벗어난 이들이 오히려 인간적이며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성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악, 그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 공동체 사람들은 그들이 ‘상도를 벗어난’ 이들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외면한다.

때문에 <밀크맨>이 보여주는 지옥 풍경은 ‘밀크맨’이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런 괴물을 용인해주고 그가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인물이기에 언제나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하늘은 파란색만 있을 뿐인데, 파랗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이, 그래서 저녁놀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 노을 지는 하늘의 다양한 색깔을 볼 줄 아는 이들을 ‘위험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다름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이들을 모두 타자로 만들어버리는 파시스트적인 사람들, 그러면서도 소문과 루머와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즐기는 사람들, 그 소문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들.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그 자체에 있다. 그래서 ‘알약소녀’가 남긴 편지 속 한 구절, “힘든 날만이 아니라 언제나 꾸준한 타인에 대한 공포”라는 말은 <밀크맨>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닐까.

밀크맨은 죽는다. 스토커가 죽었으므로 ‘나’의 고통도 끝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과연 그러할까? 밀크맨이 죽었다고 해서 밀크맨 문제는 끝난 게 아니다. 사람들은 밀크맨의 죽음을 두고 또 다시 소문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도무지 말이 안 되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만들어 내고, 그러고는 그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살을 붙인다.’ 그런 이들 때문에 ‘나’(이자 '작가')의 ‘정신적 파탄’ ‘정신적 트라우마’는 끝없이 지속되었을 것이며, 그렇기에 이 작품의 목소리, 그 불안하고 위태로운 목소리가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온 것이리라. 온갖 유언비어, 가짜 뉴스, 소문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진실인양 믿고 추종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바로 지금 이 땅에서 ‘밀크맨’들은 끊임없이 탄생하고 활개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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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1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습니다, 잠자냥 님.
이 리뷰 덕에 저는 이 책을 반드시 읽기로 결심합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님.
제 책장에는 잠자냥 님 리뷰 읽고 산 책들이 쌓여만 가는군요..

(물론 리뷰 읽으면서 좀 스트레스 받기도 했어요. 열여덟과 마흔하나 유부남에서요 ㅠㅠ 책 읽기도 전에 스트레스 대박 ㅠㅠ 물론 그래도 읽을거지만 ㅠㅠㅠ)

잠자냥 2019-10-14 14:3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꼭 읽으셔야 합니다! 읽는 내내 정말 빡치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밀크맨은 물론 그 인간들... 하아... 노답 인간들이여. 부들부들... 그래도 작가가(자기 경험담이라네요 ㅠ_ㅠ) 이런 일을 파묻지 않고 글로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분명 큰 의미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그럼 또 독자들은 읽어줘야죠!

다락방 2019-10-14 14: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옳습니다!
작가의 경험담이라니, 딥빡이 딥딥빡이 되어 다시 후려치네요.
이런 일을 폭로하는 글이라니, 저도 당연히 읽어주겠습니다. 그것이 독자의 의무니까요!! 빠샤!

coolcat329 2019-10-2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싶어졌습니다. 어려울거 같아 패스했었는데, 꼭 읽어야 한다니...도전해보겠습니다^^;

잠자냥 2019-10-20 12:21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아일랜드분쟁 등등 역사적 배경을 전혀 몰라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리뷰에서는 쓰지 않은 이야기지만, 중간중간 블랙유머도 있고요,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책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coolcat329 2019-10-20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 아일랜드 역사를 전혀 몰라서 겁을 냈었는데, 용기가 납니다.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