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실, 끈 따위를 잡아매어 마디를 이룬 것, ‘매듭’- 매듭은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한 목숨을 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옭아매기도 한다. 관계도 그렇다. 그래서 매듭은 종종 인간관계에 비유되고는 한다.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는 매 장마다 ‘애슐리 매듭서’라는 책에서 선별한 온갖 매듭짓기가 소개된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매듭들은 각 장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 또는 사건과 관련을 이루거나 무언가를 상징한다.
추석이 끝난 뒤 출근하는 아침, 문득 그 온갖 매듭이 떠올랐다. <시핑 뉴스>에 소개된, ‘애슐리 매듭서’의 밧줄 묶는 방식은 대부분이 처음 보는 것들로, 그 종류도 어마어마해서 무척 신기했다. 매듭 묶는 방식이 이토록 많다니,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 책 시작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보통 크기의 매듭인 교차점 여덟 개짜리 매듭의 경우 밧줄을 256가지 방식으로 ‘위와 아래’로 배치할 수 있으며 이 ‘위와 아래’ 배치 방식 중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매듭이 되거나 아예 매듭이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다.”
밧줄을 묶는 방식만 256가지이다. 하물며 밧줄도 이럴진대. 인간의 삶의 방식은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그런데도 이 땅의 많은 이들은 하나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강요한다. ‘위와 아래’ 배치 방식 중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매듭이 되거나 아예 매듭이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남과 똑같은 방식의 매듭을 짓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 루저, 머저리가 되고 만다. 추석이나 설과 같은 명절은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끼리’ 그런 상처를 주고받으라고 만들어진 악몽 같은 날은 아닐까.
연휴 기간에 이틀 동안 집에 다녀왔다. 우리 집은 내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가족끼리 내기 모노폴리 게임을 하면서 신나게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다 왔다. 게임에 이겨서 돈도 땄다. 그런데 애인은 그런 모양이 아닌지, 가족, 그것도 한 단계 건넌 친척들이 던진 무례한 말들에 잔뜩 상처받고 돌아와 며칠을 앓는다. 작년처럼 훌쩍 떠나버릴걸, 괜히 가족 생각해서 집에 갔다가 병만 얻어온 셈이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쏟아낸 장본인들은 도무지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겠지. 모노폴리로 딴 돈이라고 몇 만원 주면서 애교 아닌 애교를 부려도 웃던 얼굴이 금방 어두워진다. 어차피 한 다리 건넌 친척이 한 말이니까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전해들은 나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본인은 오죽할까. 남과 다른 매듭을 짓고 있다고 해서 인생 실패자 취급을 하는 그 어른이란 이들에게 욕을 퍼부어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쨌든 애인의 가족이지 않은가.
<시핑 뉴스>의 주인공 ‘코일’도 가만 보면 온갖 상처는 가족으로부터 받는다. 어릴 때부터 자라는 동안 내내 가족에게 멸시와 조롱, 놀림을 받고 세상 둘도 없는 한심한 인간 취급을 당한다. 물을 무서워하는데도 코일의 아버지는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는 그를 수영장으로, 개울로, 호수로, 바다로 던져 넣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기라도 하듯이. 그런데, 개헤엄조차 배우는 데 실패한 아들의 모습에서 아버지는 마치 악성 세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듯 다른 실패들이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코일은 말을 똑똑히 하는 것도 실패, 바른 자세로 앉는 것도 실패,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실패, 태도도 실패, 야망도 능력도 실패, 사실상 모든 것에서 실패했고, 그것은 아버지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여진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이 남과 조금 다른 삶을 살면 그것을 자기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이듯 말이다. 커서는 또 어떤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아내는 늘 외도를 일삼으며 이 세상 온갖 고통은 있는 대로 코일에게 던져주고는 그를 떠난다. 심지어 이 여자는 데리고 간 어린 딸들까지 누군가에게 팔아넘겨 버린다. 설상가상. 병든 부모, 코일에게 자존감이라고는 심어줄 생각조차 못했던 그 부모는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부모가 그토록 아끼던 형은 장례식에 참석도 하지 않는다. 끝까지 참 가혹하다. 다행스럽게도 코일은 딸들을 되찾지만 이 실패한 무능력자 코일이 어린 딸들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때 한 사람이 등장한다. 부모의 장례식 때문에 멀리서 나타난 코일의 고모 ‘애그니스’- 애그니스는 코일에게 제안한다. 이 상처뿐인 도시를 떠나 코일 집안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뉴펀들랜드로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가족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또 다른 가족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코일은 이 손길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이 책의 시작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뒤로는 뉴펀들랜드에서의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물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에게 바다와 배, 거친 날씨뿐인 이 지역은 그리 살기 좋은 곳이 되지 못할 게 뻔하다. 그런데도 그는 이전까지의 삶과 다른 방식에 적응하면서 서서히 변화해간다. 자존감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어던 그, 가족으로부터 ‘뚱땡이, 코찔찔이, 못난 돼지 새끼, 흑멧돼지, 바보 멍청이, 악취 폭탄, 방귀 뚱보, 기름덩어리’와 같은 모욕적인 말을 줄곧 듣고 살던 그에게도 새 인연이 찾아오고 서른여섯 해 사는 동안 처음으로 칭찬받는 일도 일어난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하냐고? 뉴펀들랜드의 척박한 자연환경과 싸우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곳 주민들에게는 타인의 삶을 쉽사리 재단하는 일이 드물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기도 벅차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가 단단한 ‘애그니스’도 한몫 거든다. 코일은 그곳에서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서서히 상처를 회복하고 자존감까지 느끼면서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된다. 그에 비하면 뉴펀들랜드에서 마주하게 된 가족, 아니 코일 집안의 오랜 비밀은 또 한 번 코일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애그니스와 그의 어린 딸들을 제외하면 가족은 코일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래서 잘라버려 마땅한 ‘매듭’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코일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어떤 의미로는 과거의 썩은 밧줄들, 그러니까 부모나 아내, 형과의 인연이 코일 그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끊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그 옛날 상사병에 걸린 뱃사람은 낚싯줄로 느슨하게 ‘진정한 연인 매듭’을 만들어 사랑하는 이에게 보냈다. 매듭이 느슨한 상태로 되돌아오면 그 관계는 제자리걸음. 단단하게 묶여서 돌아오면 사랑이 맺어지는 것, 매듭이 뒤집혀서 돌아오면 배를 타고 떠나라는 무언의 충고였다고 한다. (<시핑 뉴스>, 28쪽)
코일에게는 그 자신도 몰랐겠지만 매듭이 뒤집혀서 돌아왔던 것이고, 자기 스스로 떠날 정도의 과감성도, 용기도 없었던 그였지만, 그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걱정해준 다른 사람(애그니스)의 손에 이끌려 배를 타고 떠난 것이다. 살다 보면 많은 이들에게 이런 순간이 다가온다. 그런데 또 많은 이들이 매듭이 뒤집혀서 돌아왔는데도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무시한 채 계속 그 매듭, 그 관계에 매달렸다가 불행을 자초하기도 한다. 추석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잘못된 매듭으로 인해 상처받았을까. 가족이라는 매듭은 쉽게 끊을 수도 없다. 끊을 수 없다면 배를 타고 조금 멀리 떠나는 것도 한 방편이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얽혀 있는 한, 가끔 상처받는 일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계속 서로 꽁꽁 묶여 피를 흘리는 지경이 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피 흘리고 돌아온 사람에게는 애그니스처럼, 묵묵히 그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도 하나의 단단한 매듭이 되어주는 일일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일이 바로 그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