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aude Chabrol, <여자 이야기(Une affaire de femmes / Story of Women)>, 1988
최근 시몬 베유의 책을 읽으며 자발적 임신중단법에 관한 글들을 읽다가 오래 전에 본 영화가 떠올랐다.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여자 이야기(Une affaire de femmes/ Story of Women),1988>가 바로 그 작품인데, 이 영화는 시몬 베유가 자발적 임신중단법안을 상정하기까지의 프랑스 현실, 그러니까 그 무렵 프랑스의 낙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때문에 이 영화를 통해서 베유가 언급했던, 낙태가 불법이라 고통 아래 신음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한 후 중반까지는 평범한 어느 여성의 삶이 잔잔히 그려진다. 그런데 중반 이후 이야기가 격하게 흐르더니 영화 끝 무렵에는 충격적인 반전과 함께 관객의 뒤통수를 때리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더욱이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한결 충격적이다.
<여자 이야기>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두 아이의 엄마인 마리(Isabelle Huppert)는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남편은 전쟁터에 끌려갔고 두 아이와 살아남기 위해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순전히 그녀의 몫이다. 우연한 계기로 이웃에 사는 친구의 낙태를 돕고 그녀는 그 대가로 전축을 선물 받는다. 이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마리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자들에게 은밀히 낙태 수술을 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으며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곧 돌아오지만 그는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는 관심 없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할 뿐이다.
마리는 계속해서 불법 낙태 시술을 하며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점점 큰 집으로 이사를 가며 나치 치하 프랑스라는 암울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넉넉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우연히 사귀게 된 매춘부 친구인 룰루에게는 매춘을 할 공간으로 빈방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등 ‘돈’을 벌기위한 마리의 모험은 갈수록 위험해진다. 게다가 남편과 애정 없는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그녀는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성적인 쾌락까지 느끼며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게 된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가수의 꿈을 키우고자 본격적으로 개인교습까지 받게 된다.
그렇게 행복한 마리에게 느닷없이 큰 불행이 닥친다. 아내 마리의 방종한 생활을 지켜보던 남편이 급기야 경찰서에 그녀를 신고하는 것이다. 불법 낙태 시술을 하며 돈을 받았으며, 매춘을 알선했다며 그간 마리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가수가 될 생각에 꿈에 부풀어 있던 마리는 행복에 겨워 두 아이를 끌어안고 춤을 춘다. 그때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 그녀는 결국 감옥에 갇힌다. 변호사를 고용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변호사는 여자에게는 그런 중형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마리를 안심시키지만 어쩐지 마리는 점점 중범죄자들이 수감된 교도소로 이송될 뿐이다.
그리고 법정은 그녀에게 최고형을 선고한다. 낙태와 매춘 알선 등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일을 자행했고 그런 비윤리적인 일에는 최고형이 내려져 마땅하다고 선고한다. 전쟁이 끝난 뒤, 국가는 도덕 및 윤리, 사회 기강 확립이 필요했고, 그 선례로 이토록 비윤리적인 일을 자행한 여성은 마땅히 최고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윤리’라니? 도덕적이지 못하다니?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서 살인을 하고, 돈을 주고 성(性)을 사고, 그 수많은 불법 낙태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 아니었던가? 남자들의 ‘국가’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이 ‘윤리적이지 못하다’며 마리에게 최고형을 내린 것이다. 그 또한 남자들로 이루어진 법정이었다. 이 영화 후반부에 국가 윤리 확립, 사회 재건설 등의 말이 쏟아질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전쟁 치하에서 마리는 아이들과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말하는 ‘윤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다. 그녀를 찾아와 낙태를 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던 그 수많은 여자들의 사연을 들어보라! 전쟁으로 인해 남편이 끌려가거나, 전쟁터에서 죽거나 등등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처지가 허다했다. 그런데도 국가는 정작 그런 전쟁을 벌여놓고 윤리와 사회 기강을 말하며 그 여자를 처형하기에 이른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윤리를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그토록 파렴치한 ‘국가’는 여전히 이 지구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마땅히 개인의 선택이어야 하는 출산 및 낙태의 권리에 윤리와 죄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간섭하고 있다.
그저 노래하는 것이 즐거웠던, 가수가 되고 싶었던 여자 마리. 살기 위해 ‘윤리적이지 못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 마리. 그런 그녀에게 돌을 던진 국가는 과연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가? 마리를 연기한 이자벨 위페르는 신들린 듯한 연기로 이 작품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그녀의 도도하고 차가운, 그러면서도 노래를 부를 때는 마냥 행복하던 얼굴, 마침내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덜덜 떨던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여자 이야기>는 자발적 임신중단법과 여성의 권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