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 도시문화의 근대 일본근대 스펙트럼 1
하쓰다 토오루 지음, 이태문 옮김 / 논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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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인에게 백화점은 생활의 일부이다. 물론 백화점에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건을 사던지 그렇지 않던지 백화점은 현재 도시문화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확연하다.
백화점을 도시의 일부가 아니라 '문화'라고 말하는 것은 백화점이 단지 물건만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라 유행을 논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도시문화의 총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런 백화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하면서 도시의 일부로 아니 도시문화의 일부가 되었는가? 그리고 백화점이 어떻게 도시문화를 이끌어갔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일본의 예를 통해 대답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본의 예(미쓰코시 등등)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예와는 다르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백화점이 설립된 것은 일제시기로 일본의 백화점들이 서울, 부산 등 도시에 지점을 설치하였고, 이에 고무 또는 경쟁관계로 한국인들의 백화점도 설립된다. 결국 한국에서의 백화점 설립도 일본의 백화점과 유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백화점과 비교해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볼 수 있고 또한 도시문화와 관련해서도 한국과 일본의 차이와 유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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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 - 근대의 시선 일본근대 스펙트럼 2
요시미 순야 지음, 이태문 옮김 / 논형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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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무도 쉽게 접하는 '박람회'라는 장이 어떻게 어떤 의도하에 이루어지고 발전했는지 또한 그 속의 대중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포섭되갔는지를 서구와 일본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거칠게 얘기하면 '박람회'는 제국이라는 틀을 확장하고 과시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스펙타클한 장으로 성립하여 발전하다가 소비라고 하는 근대적인 행위의 장으로 변모하여 근대사회를 '소비사회'로 만드는데 큰 역활을 수행하는 장으로 전환하였으며 현재는 거대한 '대중오락'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근대성'을 파악하는데 박람회 또한 중요한 장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박람회로부터 분리되어 유사한 '근대성'의 확립에 일정한 기능을 수행한 박물관, 백화점, 올림픽 등에 대한 지적도 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성 또한 이러한 박람회를 통해 살펴볼 수 있고 일본의 경우를 통해 비교할 수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백화점과 같이 우리나라의 박람회 참가와 박람회 개최는 서구와 일본을 살펴보지 않고는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의 박람회와 근대성을 살피는데 중요한 전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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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선 - 일본의 자유주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와 조선문제
한상일 지음 / 새물결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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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로 사용된 그림은 동화가 가능하다는 상징적인 만화.   

"조선인이 입고 있는 흰색은 어떤 색으로도 염색할 수 있기 때문에 염색하는 사람의 의도와 기술에 달려 있다."
 
일본 근대 지식인 중 조선을 이해했던(?) 지식인 중 한 명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조선인식에 관한 비판서. 요시노의 성장과 영향받았던 사람들을 분석하고 이후 요시노의 조선문제에 관한 언설들을 분석하면서 일본에서는 민본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한 진보적인 자유주의 지식인이었고, 한편으로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 및 일본정부의 식민지정책을 실랄하게 비판한 지식인이었만, 결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거나 조선민중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한 지식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요시노를 당시 일본의 시대적 조류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폐지하려는 입장이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고 식민지민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식민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인 동화주의자' 또는 '부드러운 제국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식민지기 일본지식인의 조선인식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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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 우리시대의 새로운 지적 대안담론 프런티어21 20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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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정치를 둘러싼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가지 선언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정치, 민주주의, 정치적인 등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다.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현재 제출되고 있는 가지 그릇된 선언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개념에 의해 야기되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정치는 공동체의 삶을 지도하는 기술 , 민주주의가 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삶의 방식이라면 정치는 민주주의적 다자의 법을 공동체적 삶의 원리로 전환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정치개념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크게 가지 대별되는 지점에서 이해하며 정치에 대해 선언하고 있는데 번째가 정치의 종말이다. 이미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고 그에 따라 다자의 합의에 따른 정치는 이상 필요 없기에 정치는 종말을 구했다는 것이다. 번째는 다자의 합의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는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며 이로 인해 수많은 소수자들이 배제되고 억압되고 있다는 논거 속에서 정치와 경제를 구분하는 순수한 고대 정치로의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논의가 그것이다. 랑시에르는 모두를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를 교정할 쓰려고 상상하는 술책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삶의 방식으로 보는 플라톤의 이론으로 비판한다.

 

그렇다면 랑시에르가 제기하는 정치,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공동체를 지도하는 기술이 아니라, 불일치하는 인간 행동 형태이며 인간 집단의 결집과 명령을 작동시키는 규칙들에 대한 예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통치 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 거치는 주체화 양식이다.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이중의 -명제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 하나가 공통-되게-있음이라는 생각과 단절할 것을 전제한다. -명제는 정치의 사유와 권력의 사유를 분리할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치안과 정치(평등)라는 원리가 충돌하는 장소이며,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맺어지는 형태들의 체계인 것이다.

더불어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사실 정치의 특정한 주체의 본성과 행위들을 사유하는 것이지, 그것들을 언제나 권력 주체의 문제로 가져가는 일반적 주체 이론으로부터 연역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주체화는 불가능한 동일시를 발명하는 것이며 대규모의 탈정체화의 경험이다. 이는 논쟁적이고 계쟁적인 주체들을 발명하고, 중심과 주변, 보편과 특수 사이의 치안적 나눔을 다시 쪼갬으로써 가능해진다.

나아가 평등은 도달해야 목표가 아니라 전제하고 입증해야 하는 출발점이다. 해방하는 행위는 약속된 평등으로 향하는 수단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불평등주의적 전제들을 거부하고, 평등과 불평등이 대결하는 모든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전제들을 논박하는 몰두하는 실천들의 집합이다.

결국, 정치는 항상 치안 질서를 불안정한 방식으로 자리 옮기는 것이었다. 치안 질서는 출생, , 능력이 통치하기 위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각자에게 각자의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정치는 틈에 존재한다. 틈은 모두의 평등한 능력을 긍정하며, 지배를 위한 어떤 토대도 존재하지 않음을 긍정한다. 틈은 과거의 추억 속에 정리해야 환영이 아니라, 하물며 도래할 평등에 대한 약속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계속해서 발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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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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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각각 지능과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지능과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지능을 연결시켜 우월한 자의 '설명' 통해 지능의 진보를 추구하는 방식은 바보만들기다. 오로지 해방된 무지한 스승의 의지와 해방할 학생의 의지, 학생의 지능과 책의 지능이 연결되어야만 앎의 해방을 통한 삶의 해방이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해방의 방식은 가정에서만 가능하며 무분별한 그래서 질서 자체인 사회에 적용한다면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해방은 오로지 인간(개인) 해방만이 존재하며 결국 개인을 넘어선 해방은 없다?!

그렇다면 앎의 평등은 유토피아나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일 뿐이다. 진보를 말하는 자들은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하며 지도만이 그래서 더욱 세련된 설명만이 사회의 평등을 이룰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평등을 위해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한다. 그리고 사회의 불평등은 평등으로 진보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지도를 자신들의 합리적 교육을 받을 것을 강제한다. 그러나 진보주의의 이러한 고리야 말로 구식의 새로운 버전(구식의 승리)이며 평등을 무한 지연시키고 불평등을 무한 증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은 인간의 평등에서 기초"한다. 불평등인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평등이 가정되어야 한다. 물론 협약에 의해 평등이 사라졌다 해도 흔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를 모방, 흉내내야 하며 이것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유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한편, 평등은 '의견'이며 '진리' 수는 없다. 그래서 평등을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이다. 말하고 번역하고 소통하여야 한다. 따라서 평등의 입증은 상대방의 지능의 평등을 인정할 가능하다. 그리고 자유를 평등의 기술로, 지능의 존중으로, 타자의 인정이다. 그래서 기술을 전유하고 이성을 정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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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에서 랑시에르는 진보와 진보주의자들이 승리한 구식에 대한 승리는 "제도화된 불평등의 절대적 승리"이며 " 제도의 본보기가 되는 합리화라는 "이며, "거기서 오래 지속되는 구식의 권력이 세워지는 견고한 토대가 있다"(227~228)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문자 그대로 정의하면 "진보적 인간이란 걷는 , 다시 말해 보고, 실험하고, 자신의 습관을 바꾸고, 자신의 앎을 검증하고 이렇게 끝없이 가는 인간"(222)이지만 이제 진보적 인간은 또한 다른 것으로 "진보의 의견에서 출발해서 생각하는 인간, 의견을 사회 질서에 대한 지배적 설명의 서열 승격시키는 인간"(222)이다.

그래서 진보는 "새로운 설명"이며 "새로운 불평등화의 상승하는 "(225)이다. 이제 "사회는 스스로를 개선한다. 사회가 자신의 질서를 개선의 징표 아래 생각한다. 사회가 진보한다. 사회는 사회적으로만, 다시 말해 모두 다함께 그리고 질서 있게 진보할 있다. 진보는 불평등을 말하는 새로운 방식이다."(225)

그렇다면 "모든 교육학은 자동으로 진보주의적"(225)이며 "진보, 그것은 사회 전체의 허구로 승격된 교육학의 허구"이며 "교육학의 허구의 핵심은 불평등을 지연으로 표상하는 "이다. "열등함은 그저 지연 "이며 "우리는 지연을 메우려 지연 속에 직접 있어야"하며 "틀림없이 우리는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할 "(226)이다. 그래서 "학생은 결코 스승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인민은 결코 깨인 엘리트를 따라잡지 못할 "이나 "거기에 도달할 있다는 희망 그들로 하여금 좋은 길로, 개선된 설명들의 길로 나아가게 해준다. 진보의 세기는 승리한 설명자들의 세기, 취급된 인류의 세기"(227)이다.

결국 진보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은 무언인가? "설명을 개선함으로써 바보 만들기를 개선하는 "(228)이다. 그것이 "진보론자들의 고리"(229). 또한 "설명하는 체계는 시간처럼 자기 새끼들을 낳는 족족 그들을 먹어 치움으로써 영양분을 섭취한다. 새로운 설명, 새로운 개선은 생겨나자마자 수천 개의 다른 설명과 개선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죽는다." "설명하는 체계는 그렇게 갱신"(242)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성이나 평등을 실제 개인들에게 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개인들의 허구적 모임에 귀속시킬 것인지 선택"해야 하며 "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불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250).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한 인간들이 되는 것을 배우는 "이야말로 "해방된다는 말이 뜻하는 "라면 진보가 말하는 '지도' 통한 '평등' "불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하는 "(251) 뿐만 아니라 "재현된, 사회화된, 불평등해진, 개선되기에 좋은, 다시 말해 위원회에서 위원회로, 보고서에서 보고서로, 개혁에서 개혁으로 지연되어 결국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지연된 평등"(252)이다.

한편 "평등은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이다. 단지 '의견' 뿐이며 '진리' 아니기에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이다. 평등의 입증은 "상대자들의 지능의 평등을 인정 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257). 더불어 "자유는 적대적 입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편이 다른 편을 번역하는 평등한 기술" 있으며, "수사적 무분별 안에서도 멈추지 않고 발휘되는 지능의 힘에 대한 비교로부터 나오는 존중" 있으며, "이성을 가졌다는 자만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대가로 진리를 말한다는 자만을 그만두는 자에게 있어서 말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 있는지를 인정"하는 있으며 " 기술을 전유하고, 이성을 정복하는 것이 중요한 "(258)이다.

그러나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이다. 하지만 "보편적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을 "(26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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