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포토 보기

 

공간초록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 본 모래를 시네마떼끄의 인디스데이를 통해 보게 되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초록에서는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인디스데이는 없었다는 점이다.

감독에게 묻고 싶은 점이 많았는데 아쉽긴 하지만 앞으로의 작업을 기대하며 영화를 보며 느낀 점을 여기에 남긴다.

 

모래(My Father’s House)는 영문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아버지의 집이며 그 집이 모래 위에 지어진 위태로운 집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아버지의 위태로운 집을 통해 가족 또한 모래위에 만든 허물어지기 쉬운 관계라는 것을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이 영화는 아파트 값을 둘러싼 자본주의적 욕망(감독조차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가족의 관계 아님(비-관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문제작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의미있고 그렇기에 당혹스럽다.

의미있는 점은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는 가족관계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그 이면에 숨어있기 때문에 그렇고, 당혹스러운 것은 최근에 느낀 나의 가족 또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감독의 가족 또한 문제적인 가족이기에 어쩌면 우리네 가족(이렇게 보편화하는 것은 문제이긴 하지만 한국의 가족)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지 하는 점에서 당혹스럽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얼핏 너무도 쉬운 질문이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 고민스러운 질문이다.

쉬운 답은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할 수 없는...

그렇기에 우리는 주어진 가족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가족은 다음과 같은 의미 부여 속에서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파트라는 대상을 통해서만 어느 정도 가족과 가정을 꿈꾸는 아버지.

딸이라는 대상을 통해서만 가족을 생각하는 어머니.

새로운 가족을 이루면서 이전의 가족과 현재의 가족을 비교하고 더 나은 가족을 꿈꾸는 여동생.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통해 가족의 문제에 직면한 감독.

 

너무도 제각각이며 파편화된 가족이라 모두들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이런 관계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잖이 의문이 든다.

그렇기에 이 영화 속에서 이른바 가족의 '관계 있음'은 상징적이지만 매번 과거의 사진 또는 가족 사진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속에서는 이렇게 잘 봉합되어 있지만 현실은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져 파편화되어 있다.

잔인할 정도로 영화 속에서는 매번 가족은 혼자이다(몇몇 부분에서는 아니지만).

관계 속의 소통은 전혀 없다. 그저 감독이 가족의 일원이라는 점이 위안이 될 뿐...

그래서인지 나는 이 영화가 아버지가 구축한 가족 자체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위태롭다고 비판하기 위해 시작했다가 가족 구성원 각자가 구축한 가족 또한 파편화되어 있고 위태로운 가족이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중앙과 지방, 강남과 비강남, 그리고 버블경제, 부동산투기에 사로잡힌 허영에 가득찬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비판적으로 그려내다가 자신도 그 허영 속에 있음을 알아채고 당황해하는 영화일 뿐만 아니라 가족 관계란 결혼과 제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계 아님(비-관계)'의 제도적 가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관계 회복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파편화된 관계를 이어줄 매개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관계 맺음의 매개는 자본이라고 생각된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영화의 프레임에 딱 한번 동시에 등장하는데 이때도 아파트 재개발이 가능할 것이라 하는 소식, 즉 자본에 의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기의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여전히 상품과 그 광고를 통해 꿈꾼다.

근대는 그렇게 시작했다.

근대적 가족을 행복한 가정으로 상정했고 그렇게 스윗 홈은 문화주택을 통해야만 가능하며 그 속에서 행복한 가정은 피아노를 치며 함께 노래부르며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지금도 여전히 상품 광고 속에서 행복한 가족은 그렇게 꿈꿔지고 있다.

수많은 의식주 광고들을 보라.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가?

또 다른 매개는 존재할까?

그게 아니라면 다시 전통적인 가부장제적(권위적) 가족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가?

지금 당장 내세울 만한 해답은 없는 것 같다.

다시 가족의 관계를 새롭게 고민해야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이때 우리가 생각하고 실험해야할 관계는 이미 주어진 관계의 회복 또는 복귀가 아니다.

구성원들에 의해 주체적으로 만들고 허물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다시 구성하자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뱀발이지만 강유가람 감독에게 기대하고픈 점이 있다.

강감독이 아버지의 허황된 꿈을 비판하기 위해 카메라들 들었다가 가족의 실재에 봉착하면서 느꼈을 곤욕과 당혹감이 그에게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곤욕과 당혹감이 앞으로의 작업에 소중한 의미를 북돋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우리 시대 가족의 실재를 드러내고 고민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고통스러운 작업일 것이다.

실재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대부분 회피하고자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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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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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는 말그대로 '삶의 방식'이다. 즉, 개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세계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인지를 지속적으로 강요한다. 교육을 통해서 매체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세계가 구성한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그런 삶의 방식이 누가 만든 방식이고 누가 작동시키는지를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그런 삶의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의 삶을 '인간쓰레기(잉여인간)'로, '벌거벗은 목숨'으로 '생존'만을 영위하는 삶이라고 문제제기한다. 결국 이 책은 근대 자본권력의 권력유지를 위한 '유동하는 근대'로의 변화가 사람들의 삶에 부딪치게 되고 그렇게 불확실한 사회에 맞게 살도록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해결책은 전혀 없다.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스스로 "질문은 던지지만 명쾌한 답변은커녕 답변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답변이 독단적이고 시기상조이며, 사람들을 호도할 여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요컨대, 앞에서 말한 변화들로 인해 사람들은 불확실성이 만연한 상황에서 예상 손익을 계산하고 결과를 평가하면서 계획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런 불확실성의 원인을 탐구하는 일, 그리고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그런 장애물들을 통제하려 할 때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도전에 (개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단적으로) 대처할 우리의 능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드러내는 일, 이것이 내가 이제껏 노력해 왔고 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될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이처럼 바우만은 불확실성이 만연한 유동하는 근대에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의 구축이 지닌 문제들을 아주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아주 거시적인 것까지 망라하여 제시하고 있다. 인간쓰레기의 탄생과 확대도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사안이다. 어떻게 보면 바우만의 문제제기는 지나친 감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를 아예 잠재적 쓰레기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점을 다시 확인해야한다. 인간쓰레기 또는 벌거벗은 생명을 명명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자본권력이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존중과 자기 비판의 계기를 찾아야 한다. 더불어 우리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바우만은 이 점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에서 얘기하고 있다. 나아가 삶의 방식도 그들이 만드는 것에 개별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인간들의 '연대'를 통해 만들어야한다는 점에서 결코 우리를 쓰레기로 보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쓰레기가 아니다. 우리들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한에서 말이다. 이건 가난과도 관련이 있다. 부유해 지려고 하는 삶은 어쩌면 자본권력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런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하면 이미 쓰레기가 되는 삶이 되는 거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만든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면 전혀 쓰레기가 될 이유가 없다. 그런 잣대로 이웃과 세상을 보는 건 이미 스스로 인간쓰레기가 된 삶을 나타내는 것이니 오히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NGO 등이 실행하는 각종 사회 개혁프로그램 또는 이른바 약자 또는 타자에 대한 긍적적이고 실천적 활동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은 한편으로 우리가 하는 작은 실천이 의미없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실천으로 만족하거나 안주하는 삶의 방식 또한 자본권력이 만든 것이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조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런 작은 실천이 자본권력의 삶의 방식을 거스르는 또는 빗나가게 하는 행위이면 오히려 자본권력을 문제삼을 수 있는 행위라는 것도 바우만의 숨은 얘기기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바우만의 말은 작고 큰 실천적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실천적 행위 또한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방식일 때 더욱 암울한 현재를 형성한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고민은 오히려 작은 실천이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실천이 자본에 포섭 또는 활용되지 않을까 더 고민하고 깊이 생각하고 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행위를 중단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작은 실천적 행위가 실은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니까.

 

또한 이런 점에서 바우만은 중요한 점을 언급한다. 근대 자본권력이 만든 삶의 방식은 이미 전제된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그 잣대에 맞춰 살아가야만 하는 개별존재로 파편화시킨다는 점이다. 즉, 혼자서 고군분투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 자본권력이 만들고 작동시키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답도 어느 순간 나와 있는 듯하다. 그가 지속적으로 얘기하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연결을 의미하는 '연대'와 '공동체적인 삶'이 그것이다. 연대와 공동체적인 삶만이 우리가 쓰레기가 되지 않는 법이다. 더 나아가 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 각각의 역할과 각각의 생각과 각각의 고민과 각각의 행위가 어울어져 갈등하고 불화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그런 연대야말로 인간쓰레기를 양산하며 권력을 향유하고 하는 근대 자본권력의 힘을 중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타 존중과 자기 비판의 공간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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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나의 학문적 토양은 크게 두 갈래의 상이한 토대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역사라는 학문의 과학성 및 실천성과 관련이 있다. ‘막바지민주화 운동 과정에 위치했던 나의 대학시절은 무엇보다 실천성이 삶의 기준이었다. 더불어 나는 역사가 과학임을 먼저 배웠다. 이를 상징하듯 내가 다닌 사학과는 실천사학과였고 단과대학은 인문과학대학이었다. 다른 하나는 역사의 과학성과 실천성을 부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 1992년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한국 사회 특히 학문 시장에 불어 닥친 근대 이후 또는 탈근대의 사상적 조류이다. 이 때문에 분과학문의 위상은 흔들렸고 그 경계는 차츰 허물어졌다. 역사는 이제 과학이라기보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 역사는 사실과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 단지 이야기일 뿐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두 가지 상반되고 모순적인 학문적 토양은 내게 음양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상이한 이 두 가지 토양 중 하나만을 굳이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역사가 과학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과학은 곧 진리가 아니며 해당 시대의 담론이기에 부정할 이유는 없다. 다만 어떠한 과학이며 누구를 위한 과학인지가 문제이다. 여기서 학문의 실천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나는 역사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때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경험의 이야기이다. 또한 타자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역사는 획일적이고 유일한 경험의 권력화를 거부하고 주체들 각각의 사실적 경험과 그 주체들이 속한 시공간의 또 다른 경험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한번 말해지고 그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말해져야 한다. 또한 말하지 못한 타자의 경험은 계속 발굴되어야 한다. 벤야민이 말한 저 유명한 파울 끌레의 천사처럼 말이다. 더불어 발굴된 타자의 경험에 대해 각각의 주체들은 서로 맞대고 생각하며 사유할 수 있는 정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더군다나 사유하는 것조차 빼앗긴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토대 위에서 나는 다른 시기도 아닌 일제시기, 그것도 자본가단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폭력적인 지배 권력을 문제 삼기 위한 것이며 이를 한국 근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시기부터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일제시기는 현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든 그 이후든 지배 권력은 자본을 둘러싸고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배 권력을 문제 삼는 것은 자본과 권력과의 메커니즘을 문제 삼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 틀인 일제시기를 민족이라는 한 가지 측면만으로 볼 수는 없었다. 민족이라고 하는 틀로 일제시기를 보면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 갇힐 수밖에 없겠지만 또 다른 틀과 함께 시차를 두고 보면 지배와 저항의 바깥도 확인하고 사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각각의 내부적 차이도 드러낼 수 있다. 흔히 지배와 저항의 바깥 또는 경계로 의미되는 회색지대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지배와 저항각각의 간극과 틈새 속에서 만들어지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지배와 저항의 간극과 틈새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일제시기 식민 권력을 다시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우선 지배의 간극과 틈새 확인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간극과 틈새는 자본과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드러나기도 봉합되기도 한다. 이를 확인한다면 일제시기는 물론 이후 한국 사회의 자본과 권력 메커니즘을 문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시기 조선 상업회의소 연구』(선인, 2011)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2007년 작성된 나의 박사논문 일제하 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의 산업개발전략과 정치활동을 기초로 구성되었다. 기본적인 내용은 이후 학술지에 게재하면서 수정하였고, 별도로 발표한 글도 목차에 맡게 첨부하였다.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서론에서는 조선 상업회의소 연구의 필요성과 이러한 연구의 의의를 드러냈다. 특히 지배 권력을 획일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층위를 구분하여 살펴봄으로써 식민 권력과 식민 정책의 특징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점을 강조했다. 1부는 조선 상업회의소의 성립과 그 구성원에 관한 글들이다. 일제시기 조선 상업회의소는 조선의 식민경영과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총독부와 함께 혹은 독자적으로 조선의 개발에 뛰어들었다. 우선, 기존의 민족별 상업회의소를 없애고 일본인 중심의 상업회의소를 성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소극적 조직으로 남길 바라는 조선총독부와 적극적 이익단체이길 바라는 상업회의소는 충돌하였다. 상업회의소 는 연합조직인 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를 성립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연합회는 이후 주로 대상업회의소의 의도에 따라 운영되었다.

2부는 조선 상업회의소의 산업정책 수립과 이에 대한 정치활동을 살펴본 글들이다. 연합회를 기반으로 한 조선 상업회의소는 산업분야를 모두 망라하는 조선 산업개발정책의 수립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산업조사위원회의 설치로 이어졌다. 산업조사위원회는 상업회의소의 자문안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총독부의 참고안을 가지고 조선 산업개발정책을 결정하였다. 상업회의소의 요구와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산업개발정책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통치안정화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산업개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상업회의소는 조선총독부의 소극적인 식민정책을 비판하며 시급히 해결해야할 산업개발 ‘4대요항을 결의하고 그 실현운동에 뛰어들었다. 상업회의소가 제기한 ‘4대요항은 철도건설, 관세철폐, 산미증식, 수산개발과 그에 필요한 자금의 보급이었다.

3부는 일본 본국의 긴축재정에 대한 산업개발자금 요구활동과 ‘4대 요항중 철도문제로 집중하는 조선 상업회의소의 활동을 살펴본 글들이다. 1923년 때마침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인하여 조선 상업회의소의 산업개발 ‘4대 요항은 물론이고 그나마 수행되고 있던 조선의 개발 사업은 중지될 위기에 처했다. 상업회의소는 산업개발 ‘4대 요항의 실현을 위해 시민대회공직자대회등과 연합하고 일부의 조선인까지 포함시켜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산업개발의 필요성과 자금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상업회의소의 노력은 조선 산업개발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정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4대 요항중 관세철폐와 산미증식은 실현되었다. 한편, 조선 상업회의소는 산업개발자금의 확보와 함께 ‘4대 요항의 가장 중요한 항목인 철도문제에 집중하며 조선철도망 속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업회의소의 조선철도망 속성운동은 일본 정재계는 물론 조선총독부에까지 영향을 미쳐 조선철도망계획을 수립하도록 추동하였다. 그리고 철도망계획의 수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철도12년계획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일제시기 조선 상업회의소가 단순히 식민권력의 하부에서 식민정책의 수동적 수행자로 머문 것이 아니라 식민권력의 일부로서 식민정책을 능동적으로 입안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상업회의소의 산업개발전략과 정치활동이 조선총독부의 농업중심 산업정책을 철도 등 산업기반시설의 확충이라는 영역으로 확대되도록 견인하였음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개발에 소극적이었던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를 추동하여 긴축재정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의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도록 만들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렇다면 일본제국주의의 확장이 일본 내부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식민지 현장과 현장인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는 점도 분명하게 드러내어 준다. 그리고 여기서 일제시기를 민족만이 아니라 또 다른 관점인 지역을 통해서 살펴봐야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편 조선 상업회의소는 조선에 토대를 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중요한 경제 단체였다. 당연하겠지만 이들이 주장한 조선의 산업개발은 일차적으로 일본인이 대부분인 조선의 자본가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공공연히 조선의 산업개발을 조선 본위라는 이름 아래 추구하였다. ‘조선 본위가 정치적 수사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된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조선의 산업개발은 제국 일본의 이해와 떨어질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이라는 지역의 이해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일제시기 한국자본주의의 특징이 드러난다. 이는 제국주의라는 틀 속에서 자본과 지배 권력과의 관계가 제국-식민지라는 상하 관계로 단순화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불어 일제시기 조선의 개발과 성장이 또한 현재 한국자본주의의 성장과 발전에 어떻게든 연관되었다면 조선인 자본가가 아니라 조선의 자본가들에 대한 분석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이 책의 의미를 아무리 포장한다고 해도 아주 제한적인 사실을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는 사실들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대로 책으로 출간하는 이유는 첫째, 역사가가 사실 전부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파편적인 경험의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경험의 이야기가 존재할 것이라는 경험의 잠재성을 인식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말해지지 않은 타자의 경험이다. 셋째, 이미 드러난 것들과 경합하며 일제시기를 다시금 사유할 수 있는 장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존재한다. 그 위에 앞으로의 연구와 생산적 논쟁의 장이 형성되기를 바라며 또한 일제시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사유가 다시 가능해지길 간절히 희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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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에 의하면 잠재성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지닌 상태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연성이 개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연성은 "가능성을 실제로 줌, 잠재성이 그러한 것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며 "존재할 능력과 존재하지 않을 능력 사이에 휴지를 부여하는, 잠재성의 사건"이다.

그럼 우연성은 어떻게 촉발되며 또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일단 아감벤은 "이러한 '줌'은 주체성의 형식"을 띤다고 한다. 그래서 "우연성은 주체를 시험대에 올리는 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연성은 주체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때 주체성은 아감벤의 주장에 의하면 탈주체와 주체의 이중성을 의미하며 좀더 내 식으로 풀면 자신에 대한 탈주체화와 타자에 대한 주체화이지는 않을까?

정리하면 잠재성이 가능성이 되기 위해서는 우연성이 개입되어야 하면 이 우연성은 주체 즉 타자의 주체성을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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