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화사가인 린 헌트는 서구에서의 인권 탄생을 서간소설로부터 찾고 있다. 서간소설을 통한 작가와의 교감으로부터 타인과의 교감, 즉 '동정' 현재 사용하는 용어로는 '공감'을 당대인들은 배우게 되고 이 배움을 통해 비로소 타인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타인과 같다는 '평등'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과의 공감만으로 '인권'은 탄생하지 않는다. 저자는 유럽의 전 근대 사회에 만연해 있던 고문이라고 하는 형벌을 통해 그 형벌이 사라지게 되는 것과 결부하여 드디어 인권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즉 '신체의 개인화'가 그것이다. 타인이 고통받는 것을 나도 알고 동일하게 고통받을 수 있다는 '신체의 개인화'가 그것이다.  

이렇게 인권은 탄생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는 혁명을 통해 탄생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여전히 세상에는 고문도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인권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사회로 보인다. 저 MB정권이 자행하고 있는 작태를 보라. 용산참사로부터 쌍용자동차사건까지.  

이 점 또한 저자는 알고 있다. 서구는 나치에 의해 인권이라 것을 송두리채 잃어버린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린 헌트는 한 편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인 '자명성'을 주장한다. 여기서 이견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랑시에르의 '평등' 개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그 내용을 더욱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다만 랑시에르가 <타자의 입장>에서 우려하는 차이의 망각효과인 인도주의로서의 인권은 구별하자. 이것은 "정치를 도덕으로 이끌고, 고통 받는 자들을 향한 의무에 완전히 흡수되었으며, 결국에는 열강들의 전략 지정학적 치안들을 수반한 '타자의 입장'이다."(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 228쪽)

 

애정소설이 프랑스혁명을 촉발했다?


연합뉴스 | 2009-07-30 10:44:09

 
'인권의 발명'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18세기 유럽에서는 서간소설(epistolary novel) 열풍이 일었다. 주로 편지 형식으로 젊은 남녀가 전통적인 권위와 자유로운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암울한 사랑이나 비극적인 운명으로 빠져드는 내용으로 된 소설들이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내놓기 직전에 '신(新)엘로이즈'(1761)라는 애정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으며,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파우스트'에 앞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유럽 근대사 전문가인 린 헌트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UCLA) 교수는 '인권의 발명'(돌베개 펴냄)에서 흥미로운 논리를 펼친다. 사회 어두운 곳에 감춰져 있던 인권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 첫 번째 계기가 바로 서간소설의 유행이라는 것이다.

전지적 시점으로 쓰인 소설과 달리 서간소설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편지를 통해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독자가 주인공을 실존 인물으로 착각하거나 자신과 동일시하기 쉽다.

서간소설 독자들은 잘 알지 못하는 타인들도 자신처럼 내면에 감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배워 나간다. 신분이나 나이, 성별 등 사회적 경계를 넘어서 '공감'을 하기 시작한 이 시점이 바로 '평등'의 의미를 처음 깨닫는 순간이다.

"독자는 일상의 감성적 밀도를 이해하고, 자신 같은 대중이 스스로 도덕적 세계를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권은 이 같은 감정이 뿌려진 온상에서 자라났다. 인권은 오직 대중이 타인을 근본적으로 동등하게 생각하도록 배울 때에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해서 인권이 바로 고개를 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인권의 탄생을 부추긴 그다음 계기로 '신체의 개인화'를 꼽는다.

근대 이전에는 유럽, 나아가 전 세계에서 고문이 횡행했다. 흔히 사람들은 고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은 인권이 확산됐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순서를 정반대로 바꿔놓는다. 인권 의식이 퍼지면서 고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문이 사라지게 되면서 인권이 마침내 탄생했다는 것이다.

고문이란 인간 신체를 사회적, 종교적 질서 안에서 마음대로 주무르는 행위다. 그러나 인체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18세기에는 사람의 몸이 사회나 종교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것이며, 다른 사람의 몸과도 분리돼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는다.

"법률적으로 인가된 고문이 종식된 것은 재판관이 그것을 포기했거나 계몽사상이 그것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고문이 종식된 것은 고통과 인격에 대한 전통적 틀이 깨지고 한 단계 한 단계 새로운 틀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침내 자신의 신체를 소유하게 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몸과 감정, 고통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면, 다음으로는 자연스럽게 이를 널리 알리고 못박아두려는 실천적 움직임이 뒤따른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미국에서는 '독립선언'을, 프랑스에서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했으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인권의 역사는 아직 '해피엔딩'을 맞지 못했다. 인간은 18세기 들어 인권을 찾아냈으나 인권은 '장기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가장 큰 벽은 민족주의다. 사람들은 점점 집단 폐쇄적이고 방어적으로 변했고 타인에 대한 혐오감을 쌓았다.

이는 제국주의라는 극단적 형태로 변질됐고 제2차 세계대전은 '6천만명의 죽음이라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인간의 야만성'을 보여줬다. 전쟁은 끝났지만 인권의 보장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인권이 보란듯이 짓밟히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이 "인권의 역사에서 '자명성(自明性)'을 가장 중시한다"고 밝혔다. 인권이란 사실 모호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권이 사라져 없는 상태가 돼야 인권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는다. 그럼에도 인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당연히 존재하며, 존재해야만 하는 진리임을 모든 이들이 아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게 바로 자명성이다.

자명성을 희망하면서 책을 마무리하는 저자는 '공감'의 문제를 다시 한번 꺼내 든다.
"인권의 역사는 결국 수많은 개인들의 감정, 신념, 실천으로 권리를 가장 잘 방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당신은 인권의 의미를 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의를 겪을 때 당신은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권의 진리는 역설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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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기억에 대한 차가운 기억화(공유기억)가 추모와 미화를 통해 어떻게 변질 왜곡되는지 아래 거창 등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권력자의 대리인들에게 내맡겨서는 안되며 우리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발굴하고 문제제기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새롭게 구성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그 구성은 종결이 아니라 끝없는 진행으로 말이다. 아래 <기억과 전쟁>에 대한 연합뉴스의 리뷰와 출판사 리뷰를 같이 올려둔다.  


연합뉴스 | 2009-07-10 16:57:03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억과 전쟁'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소재한 청연마을과 탄랑골, 그리고 박산골의 세 마을에서 한국군 11사단 9연대는 빨치산의 보급원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이곳 주민 719명을 학살했다. 이른바 거창 민간인학살사건이다.

유족들은 사건 직후부터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탈냉전과 민주화라는 변화와 더불어 반세기가 지난 2004년 거창사건추모공원이 준공됐다.

김백영 광운대 교수와 김민환 박사는 최근 출간된 '기억과 전쟁'(휴머니스트 펴냄)에 실린 '학살과 내전, 공간적 재현과 담론적 재현의 간극 : 거창사건추모공원의 공간 분석'이란 논문에서 거창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실을 둘러싸고 여전히 계속되는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혼란을 조명했다.

논문 저자들은 거창사건추모공원이 "'빨갱이' 혐의를 벗고 '양민'이 되고자 발버둥쳐온 유족들과 여전히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해야 하는 한국 정부 양자가 진실을 덮어둔 채 정치적으로 타협한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먼저 추모공원의 명칭 문제를 지적했다.
유족들은 '거창양민학살사건'이란 이름을 내걸고 50년 동안 싸워왔지만, 국가는 남한군이나 미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을 결코 '양민'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아닌 '거창사건'이라 명명했다고 풀이했다.

국가는 '양민학살'이라는 위험한 담론을 거세한 채, '사건'과 '일부 군인'이라는 용어를 써서 의미를 축소해 국가폭력의 진실을 은폐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전북 남원군, 순창군, 경남 산청군, 함양군, 전남 함평군 등지에서도 거창과 같은 민간인 학살사건이 발생했으며 추모공간이 역사적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 민간인 희생자들의 위패도 함께 봉안해야 한다고 거창지역 시민단체들이 유족회에 제안했지만, 유족들이 거부했다고 말한다.

유족들은 희생자 719명을 5만평이나 되는 광대한 추모공간에 안장해 다른 지역의 '불순한'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조건으로 국가와 타협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2005년부터 3년간 각종 학술대회 등을 통해 진행한 '20세기 전쟁기념의 비교문화사' 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를 단행본으로 정리한 것이다.

1ㆍ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 전쟁의 경험이 어떻게 국가와 지배층에 의해 통제되고 재규정돼 지배권력의 강화에 기여하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규명했다.

미국, 프랑스, 일본 등 각국의 역사학 저술과 역사적 정치 담론이 이뤄지는 언론매체, 역사교과서 등을 소재로 삼아 공적인 전쟁 담론에 대한 포괄적이고 세분화된 분석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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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기억과 트라우마의 기억
― 이 책의 특징 1

19세기 이래의 근대 국민국가에서 전쟁기념은 국민을 분열에서 통합으로 이끄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공적인 전쟁 담론은 희생을 미화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력전을 겪은 20세기에도 이러한 행태가 유지되었는지의 여부는 다양한 공적 담론의 영역과 매체들을 두루 살피지 않고는 쉽게 결론지을 수 없다.
《기억과 전쟁: 미화와 추모 사이에서》는 역사학 저술과 역사적 정치담론이 행해지는 언론매체, 그리고 역사교과서 등을 소재로 삼아, 공적인 전쟁담론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세분화된 분석을 시작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사안은 20세기 특유의 총력전이 낳은 ‘트라우마(trauma)’을 치유하고 이를 새로운 정체성 형성의 전기(轉機)로 삼기 위해 어떠한 공적인 ‘내러티브(narrative)’가 창출되었으며 그것이 국민들에게 실제로 어떠한 효과를 끼쳤는가 하는 점이다.
《기억과 전쟁: 미화와 추모 사이에서》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내러티브들의 구성과 성격, 효과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다각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20세기에도 전쟁기념이 여전히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도구화되었는지, 아니면 보다 성찰적인 의식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리고 공적인 전쟁기념의 성격과 방식이 국가별, 지역별로 어떤 차이를 갖고 있었는지를 규명하고 있다.
《기억과 전쟁: 미화와 추모 사이에서》는 20세기 전쟁기념의 문화적 매체를 점검하고 있다. 현대의 전쟁기념문화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문화적 매체가 나타나는 점에 주목한다. 섬세한 문화적 매체를 동원함으로써,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해 보이는 체험의 의미를 어떻게든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문화적 매체를 통한 전쟁기념은 어떠한 고유의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는지, 여기에서는 과연 희생의 의미에 대해 반문하고 깊은 애도와 성찰을 유도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는지, 아니면 여전히 희생을 미화하고 도구화하는 구태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기억과 전쟁: 미화와 추모 사이에서》는 20세기 전쟁기념 문화 전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대안적 기념 문화를 찾고 있다. 이데올로기화된 모습이 완연한 사례와 기념 문화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대비시켜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괄적인 이론 틀을 만들려고 한다.
기억 이론은 종래의 ‘역사’가 자민족중심주의, 엘리트주의,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공연한 믿음을 지녀왔던 점을 문제 삼으며 등장했다. 기억 이론은 그간 도외시되었던 타자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었다. 즉, 민족적 타자, 사회적 타자 또한 시간적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는 일방적이고 폐쇄적인 자기 정체성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20세기 전쟁기념 문화의 연구는 제국과 식민지, 중심과 주변부, 사회적 주류와 비주류 간의 차별성과 상호관계에 주목하는 시각이 요청된다.

사회ㆍ문화적 맥락으로서의 기억 연구
― 이 책의 특징 2

《기억과 전쟁: 미화와 추모 사이에서》는 무엇보다 공동체적 기억, 즉 ‘기념(commemoration)’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라는 점에서 독창성을 지닌다. 근래 국내 학계에서는 ‘기억’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집단기억’, ‘대항기억’, ‘기억전쟁’ 등과 같은 용어가 웅변적으로 나타내주듯이, 기억의 문제는 본래적인 철학, 심리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새로이 점검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경향은 과거의 문제에 보다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사회·문화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엄밀한 방법론으로서의 기억이론은 부재하다. 기억의 이론이 더욱 사회·문화과학적인 차원으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기념’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이 개념은 한 사회 또는 특정한 사회집단이 자신의 과거를 관리하는 형식을 부각시킨다. 한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원, 생존과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특정 인물이나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지속적으로 ‘기념’해야 할 필요성을 가진다. 따라서 기념이란 한 공동체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배타적 행위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상징적 행위들, 즉 역사(이야기)서술, 종교적 의례, 축제, 예술적 형상화 작업, 그 외에 국경일 제정과 같은 각종 법적, 정치적 조치들이 두루 포함되며 이를 통해 배타적인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이 만들어진다. 기념행위는 개개인의 일상에 직접 호소하기보다는 일정한 사회공간 내에서 나름의 공적인 위상을 갖는다.
이와 같은 ‘기념’ 개념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기억이 어떠한 필요에 따라, 어떠한 형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관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준다. 이론적으로 불명확한 ‘기억’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이러한 문제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기념이라는 틀을 통해 《기억과 전쟁: 미화와 추모 사이에서》는 기억을 행하는 주체와 그 주체가 과거를 재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체, 그리고 그 재현 결과의 수용자층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고 이를 지역별, 사안별로 비교 분석하고 있다.
본래 기억에 대한 근래의 논의는 그 자체가 현대 사회가 낳은 정체성 위기의 산물이다. 그 이전까지 기억이란 주로 개개인들의 고유한 체험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기억은 민족이나 국가, 계급 등의 집단적 주체와 관련된 역사와는 일견 무관한 것으로 다루어져왔다. 그러나 역사가 본연의 역할을 못하게 되자 기억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역사는 본래 집단적 주체의 과거를 현재의 우리와 유기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우리 존재의 준거와 지향성을 밝혀주는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른바 ‘세계화’의 물결에 의해 기존의 민족주의 및 여타의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들이 크게 약화됨으로써 점차 퇴조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흔히 ‘탈역사(posthistoire)’라고도 표현되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간 역사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억압되고 무시되어 왔던 사적인 기억들이 주목받게 되었다.
기억은 과거와 관계맺는 종래의 ‘역사적’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가능하게 한다. 기억은 과거와 우리의 관계가 편향적이고 분산적이며, 일시적이고 우연적임을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 논의를 통해 과거에 대한 기억이 반드시 역사의 이름으로 일원화될 필요는 없으며 그 밖의 다양한 구성 방식을 취하면서 다양한 정체성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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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를 다시 무대에 올리며, 헤게모니와 형식주의의 한계들(주디스 버틀러) 

 

1. 주체 구성에 관한 라캉적 견해가 헤게모니 개념과 궁극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가?  즉, 빗금친 주체라는 '불완전한' 주체의 구조적인 정초적인 한계와 역사적 투쟁과정의 '불완전한' 주체가 양립할 수 있는가?

2. 보편자가 특수자들 간의 관계 속에 있음을, 또한 그 관계와 분리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는 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편자가 정치 생활의 능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개념이 되려면 라클라우와 제릴리가 검토하는 특수자들 간의 관계는 문화적 번역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가?

"권력은 안정적이거나 정태적이지 않으며, 일상생활 내부의 다양한 국면에서 개조된다. 권력은 상식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감각을 구성하며 한 문화의 지배적 인식소들epistemes로 위장된다."(31쪽)

 

보편성은 스스로를 부정적인 것으로, 따라서 자신이 그러하다고 생각했던 바의 대립물로 볼 뿐만 아니라,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넘어가는 순수한 이행을 겪으며, 그리하여 스스로를 이행으로 - 즉, 자신의 본질적 활동으로 부정을 지니며 스스로가 또한 부정에 종속된 것으로 - 알게 된다.(44쪽) 

 

보편성이란 의미심장한 의미의 증식과 반전을 거치는 하나의 이름으로, 따라서 그것을 구성하는 '계기들' 중 어느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보편성에는 그것과 대립하는 특수한 것의 흔적이 불가피하게 떠돌아다니며, 그것은 보편성이 유령적으로 이중화되고 그 특수한 것이 보편성 자체에 부착되어 그 주장의 형식주의를 필연적으로 불순한 것으로 폭로하는 형태를 띤다.  

보편성이 그것의 문화적 접합과 관계하는 건 극복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보편자에 대한 어떤 초문화적 개념이든 그것이 초월하려는 문화적 규범들에 의해 유령적 존재가 되고 얼룩질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어떤 보편성 개념도 단일한 '문화'라는 개념 안에서 편히 머무를 수는 없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보편성 개념이 문화를 교환 관계로 이해할 것을, 또는 그 개념이 번역의 과업을 수행하 ㄹ것을 강제하기 때문이다.(46쪽) 

 

우리가 지배에 맞설 저항의 지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그 저항의 지점이 바로 지배가 작용하는 도구이며 우리가 그 저항에 참여함으로써 지배 세력을 부지불식간에 강화해 왔음을 깨닫게 될 때 일어난다. 지배는 바로 그것의 '타자'일 때 가장 효과적으로 등장한다. 그 변증법의 붕괴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와 저항을 구별하는 바로 그 도식이 지배가 저항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을 숨긴다는 것 보여주기 때문이다.(51쪽) 

 

주체의 항상적인 불완전함을 자기표상이 무너지고 실패하는 지점으로 여겨지는 실재가 가리키는 한계를 통해 이해하느냐, 아니면 사람들의 유동성과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사회적 범주의 무능력으로 이해하느냐의 여부는 중요하다.(54쪽) 

 

더욱이 모든 정체성의 '불완전함'은 그 변별적 출현의 직접적 결과다. 어떤 특수한 정체성도 다른 것의 배제를 가정하거나 실연하지 않는다면 나타날 수 없다. 그리고 이 구성적 배제 또는 적대가 모든 정체성 구성이 공유하는 동일한 조건이다.(56쪽)   

 

라클라우에 따르면 보편성은 발견되어야 하는 것임에 반해 "비어 있는, 하지만 근절할 수 없는 자리"로서 그러해야 한다. 그것은 발견되거나 표출될 수 있는 가정된 조건이나 선험적인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임의의 모든 특수주의들이 어떤 공유된 내용으로 통합됨으로써 그것들이 완전히 포함된 명부가 달성되는 이상이 것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보편성의 전망을 구성하는 건 그런 공유된 내용의 전적인 부재다. 

따라서, 그것이 그 자리를 채우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게 되는 한에서 어떤 정치구성체 내에서든 모종의 필연적 긴장이 출현한다. 하지만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이런 실패는 바로 보편성의 미래적 전망, 모든 정치적 접합의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특질로서의 보편성의 지위를 의미한다.(56~57쪽)

 

라클라우가 어떤 특수자에 대한 보편자의 '기생적 부착'이라 부른 바를 강조하면서 제릴리는 보편자가 오직 특수자들 자체의 연쇄 속에서만 발견될 것이라고 주장한다.(58쪽) 

 

라클라우는 모든 특수한 주장의 구조적 불완전함이 보편자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반면, 스콧은 보편적 주장이 특수자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나는 '성차'라는 바로 그 동일한 용어가 하나의 정치적 맥락에서는 특수자를, 다른 맥락에서는 보편자를 가리킬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스콧이 특수자와 보편자의 때로는 결정 불가능한 일치를 부각시킨다는 점을 제안하고자 한다.(59쪽) 

 

보편성 주장이 합의를 끌어내고 자신이 언표하는 바로 그 보편성을 수행적으로 실연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주장들의 의미와 힘이 만들어지는 다양한 수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으로 번역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의미심장하게도 이것은 어떤 보편성의 단언도 문화적 규범과 별개로 일어날 수는 없으며, 국제적 장을 구성하는 다수의 규범들이 경쟁하는 조건 하에서 즉각적인 문화적 번역의 도움 없이는 어떤 것도 단언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보편성이라는 바로 그 개념은 원리상 언어적 경계를 넘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번역이 없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니면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번역이 없다면 보편성의 단언이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식민적이고 평창주의적인 논리를 통하는 것뿐이다.(61쪽) 

 

보편성이 언표되는 문화적 위치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번역의 위험부담을 떠안지 않는 유효한 보편성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바로 그 보편성 주장은 문화 내의 다양한 구문적 상연에 속박되어 있음을 또한 알게 된다. 보편성의 형식과 내용 모두 고도의 경쟁에 참여하며 그것들의 전장 외부에서 접합될 수 없다. 즉, 보편성은 "발생" 혹은 "적대자들이 공통의 공간에 속해 있지 않음을 가리키는 '비장소'이자 순수 거리다.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도 발생에 책임이 없으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균열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65쪽) 

보편성은 끝이 열린 헤게모니 투쟁에 귀속된다.(66쪽)  
보편자가 아직은 표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그 '아직은 아닌'이야말로 보편자 자체를 이해하는 고유의 단어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보편자에 의해 '실현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보편자를 본질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67쪽)

 

근대성의 주요 용어들은 혁신적인 방식으로 쉽게 다시 이용된다. 이는 바로 그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사전에 부여받지 못한 이들에 의해 그것들이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출현하는 건 일종의 배타적으로 보편적이지도 배타적으로 특수하지도 않은 정치적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그런 주장 속에서 보편성의 특정한 문화적 정식화에 본래적인 특수한 이해관계가 노출되며, 어떤 보편자도 그것이 출현해서 진행되는 특수한 맥락에 의해 변질되지 않을 수 없다.(69쪽) 

 

이미 확립된 담화에 '의지하려는' 건 동시에 '새로운 주장을 하는' 행위일 수 있으며, 이것이 꼭 낡은 논리를 확장하거나 주장자가 현존의 체제에 동화되는 메커니즘에 가담하는 건 아니다. 이미 확립된 담화는 오직 끊임없는 재확립을 통해서만 확립된 것으로 남아 있으며, 그리하여 그 담화는 그것이 요구하는 바로 그 반복 속에서 스스로를 내기에 건다. 더욱이 이전의 담화는 바로 그 담화가 말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화행을 통해 반복된다. 그리하여 반복적 화행은 확립된 담화의 과거에서 배타적 통제력, 정치의 영역에서 보편자의 범위를 정의하는 데 그 담화가 배타적으로 행사해온 통제력을 박탈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런 행태의 정치적 수행성은 정당성을 가정된 권위에서 그것을 갱신하는 메커니즘으로 전치하는 일군의 문화적 규범들을 재인용하고 재상연한다. 그런 변화는 담화 속에서 정당화의 유동성을 더욱 불확실하게 만든다.(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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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사에 대한 연구가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개념자체가 그 시대를 제한, 한정하고 있다는 가장 큰 이유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최근 들어 번역, 재번역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학문의 식민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개념사를 정리할 때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어떤 개념들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개념사의 대가인 코젤렉 같은 경우도 '기본개념'이란 것을 정하고 이를 "역사 기본개념 사전"으로 집대성하였다. 코젤렉이 규정하는 기본개념은 "역사적 운동의 선도개념으로서, 그 이후의 시기에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는"개념이고, 또한 "그것의 영향과 사용"을 분석해보면 특정 시기의 "구조와 거대한 사건연관이 해명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이유로 문명, 부국강병, 세력균형, 국민, 인종, 민족, 민주주의, 경제, 개인, 영웅 등 13가지 개념을 그 연구대상으로 정한 것인가? 더 읽어봐아겠지만 글에도 언급한 것처럼 개인적인 관심분야와 개념의 전파순서, 중요도 등을 고려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은 그 시대를 반영할 수 있는 개념을 선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텐데 개인적인 관심분야 등이 고려대상이 되었다니 그 한계가 명확할 것 같다. 일단 차근차근 읽어보기로 하고 이에 대한 한겨레의 글을 스크랩해둔다. 

 

[한겨레 2009.4.29]  

권력·주권·민주주의 등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사회과학 개념이 어떤 경로를 거쳐 한국에 자리잡게 됐는지를 탐사한 책이 나왔다. 서울대 외교학과 하영선·최정운 교수 등이 쓴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창비)란 책이다. ‘형성사’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형성·전파·정착의 사회사’다. 책에서 다뤄지는 사회과학 개념들 대부분 18~19세기 서양에서 만들어진 뒤 중국·일본을 거쳐 19세기 한국에 전파되고, 이후 치열한 정치사회적 대결을 거쳐 한국적 담론 질서의 의미망 안에 뿌리내린 것들이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개념은 13개다. 문명 개념을 필두로 부국강병, 세력균형, 국민·인종·민족, 민주주의, 경제, 개인, 영웅 등이 다뤄진다. 개인적인 관심분야와 개념의 전파 순서, 중요도 등을 고려했다는 게 글쓴이들의 설명이다. 책은 14년전 서울대에 만들어진 ‘전파(傳播) 연구’라는 작은 공부모임의 산물이다. 하영선·최정운 교수와 함재봉 미국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영호·김용직 성신여대 교수, 손열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 10여명이 참여했는데, 이들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한국 사회과학이 주문자생산 단계를 넘어 독자 브랜드로 성장하려면 공부의 목적과 대상, 방법, 실천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 첫 단계로 주목한 것이 사회과학의 ‘말’이었다.

글쓴이들이 볼 때 한국의 사회과학 개념은 ‘삼중의 전선’을 뚫고 어렵사리 자리잡았다. 전통 개념과 근대 개념의 문명사적 충돌이 첫번째 전투였다면, 두번째는 번역의 판본, 곧 ‘중국판이냐 일본판이냐’를 두고 벌어진 대결이었다. 마지막으로 국내의 첨예한 정치사회적 갈등을 돌파해야 했다. 하 교수는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달라진 천하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선택하는 것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결단의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삼중대결의 현장답사를 위해선 무엇보다 당시 문헌을 꼼꼼하게 읽는 일이 중요했다. <서유견문> <독립신문> 같은 개화 문헌과 이항로·유인석 등의 척화파의 문헌에서, 전파의 길목에 있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와 중국의 량치차오(양계초)의 글, 나아가 유럽 근대 사회과학의 기본서들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읽어야 했다. 19세기 조선어와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 지식은 필수였다. 하 교수는 “내가 쓰는 말들이 내 것 같지 않고 불편해서 들어가 봤더니 첩첩산중이었다”며 초창기의 어려움을 회고했다.

글쓴이들의 바램이 있다면, 책에서 다룬 개념들이 식민지기와 냉전시대, 21세기 탈냉전기을 거치며 그 안에 어떤 사회·문화·정치적 의미들을 담아왔는지를 추적한 후속편을 내는 것이다. 하나의 개념이 ‘형성’이라 이름붙일 수준에 도달하려면 오랜 시간의 침식을 견디며 고유한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 교수는 “개념사 연구는 세대를 이어가며 수행해야 할 작업”이라며 “후학들에게도 연구를 권하지만 들이는 공력에 비해 반대급부가 턱없이 모자라니 좀체 뛰어들려는 제자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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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은 더디다? 그래서 지금-여기를 직접 얘기하지 못하고 에둘러 조금 먼 과거를 가지고 얘기한다. 어쩌면 역사학이 이처럼 먼 과거 즉, 이미 차가워진 그래서 박제된 그런 기억과 대면하는 작업(이 작업이 쉽지 않다는 건 잘 알거다. 하지만 당대인들의 뜨거움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만을 하였으며 뜨거운 기억과 대면하길 피했다는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근들어 차가운 기억을 뜨거운 기억으로 전환하거나 뜨거운 기억을 직접 대면하며 고민하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 고민의 결과를 사회과학보다는 더디지만 그래도 현실세계에 쏟아내고자 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고무적인 일이다.  

김영미 국민대 연구교수의 <그들의 새마을운동>도 그러한 움직임 속에 나온 연구서다. 가장 가까운 과거?인 박정희시대에 전개된 새마을운동을 기획하고 포장하고 이용한 입장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민중 특히 농민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다. 또한 민중의 경험세계를 통해 사건에 접근하는 생활사적 접근 방식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다만 간혹 드는 의문인 왜 이런 관점을 생활사적 접근 방식이라고 할까? 개인적 삶과 직접 관련있다고 해서라면 이미 개인적 삶과 정치를 결부시킨 일상사와 미시사가 있는데 말이다. 생활사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학계 내에서도 일상사와 미시사의 대안으로 쓰는 용어인 것 같은데 개념에 대한 정리가 안된 것 같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이를 소개한 한겨레의 기사를 스크랩해둔다.   

 

[한겨레 2009.6.10]   

“새마을운동을 성공한 농촌 근대화운동으로 미화하든 농민에 대한 억압적 동원체제로 비판하든, 정부 정책에 초점을 둔 국가중심적 접근이란 점에선 마찬가지입니다. 농민이란 존재는 철저히 지워져 있어요.”


민중 경험 기초로 생활사적 접근
“유신체제 이식위한 농민동원운동”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학계의 첫번째 연구서라는 점 말고도, 민중의 경험세계를 통해 사건에 접근하는 생활사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새마을운동 시기 모범 마을로 선정돼 두 차례나 포상을 받은 경기 이천군의 작은마을 아미리와, 새마을운동의 기수가 돼 <대한뉴스>에까지 보도된 농촌운동가 이재영씨가 책의 주인공이다. 책을 쓴 김영미(42) 국민대 연구교수의 논지는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 마을’과 ‘새 농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미리는 1930년대 일제가 펼친 농촌진흥운동에서도 모범 부락이었습니다. 과거부터 근대화를 위한 자발적 노력이 꾸준히 있어 왔던 곳입니다. 이재영씨 역시 1950년대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애향청년회라는 계몽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던 농촌운동가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정부의 정책보다 훨씬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이런 자발적 흐름이 박정희 정부 시기 가시적 결실을 맺게 된 데는 정부의 물질적 지원과 평가, 포상이 모두 마을 단위로 이뤄짐으로써 마을공동체의 자치력과 마을간 경쟁심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당시 마을공동체의 주도권을 둘러싼 신구세력간 권력 갈등이다.

“이농이 본격화되기 전이라 당시 농촌마을에는 중등교육을 받고 군대를 다녀와 근대성을 내면화한 청년 주체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연장자 중심의 마을 권력과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정부는 발전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충일된 청년들과 손잡음으로써 운동의 자발적 주도 세력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유신체제를 마을로 이식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연장자 중심의 마을공동체를 움직이기 위해선 국가의 권위와 행정력을 등에 업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청년들은 자기 마을을 박정희 정부의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실을 했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엔 3선개헌을 계기로 뚜렷하게 하락한 도시지역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농촌을 체제 유지의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던 박정희 정부의 의지 또한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의 동원 방식은 소외계층의 욕망을 자극해 체제의 자발적 동조자로 포섭한 파시즘의 대중 동원과도 유사하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농촌 마을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그토록 원하던 발전과 부를 성취했을까? 김 교수는 말한다.

“거주 환경이야 나아졌죠. 문제는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농가부채가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정부 시책에 따라 앞다퉈 고수익성 작물 재배에 뛰어들었는데 설비투자 비용은 물론 불투명한 판로와 널뛰는 가격 탓에 피해가 고스란히 농민에게 돌아갔던 것이죠. 80년대가 되면서 청년들은 더 빠른 속도로 고향을 등졌고, 농촌은 희망이 사라진 노인들의 휴식처로 전락합니다. 새마을운동은 역설적이게도 농촌 피폐화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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