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기억 전쟁 - 1935~1955년 2 근대 일본의 문화사 8
나리타 류이치 외 지음, 정실비 외 옮김 / 소명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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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문화사 시리즈 8번째인 이 책 <<감정, 기억, 전쟁>>은 7번째 책인 <<총력전 하의 앎과 제도>>처럼 1935년~1955년을 연속적인 관점에서 보는 '총력전체제론'에 기반한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전편의 앎과 제도에 대한 논의와 함께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패전, 그리고 '전후 민주주의'를 살아간 일본의 주체, 예를 들어 국민, 여성, 민중, 오키나와인, 히로시마인 등의 주체 형성사가 연속적이었음을 밝히며 이에 따른 두 제국주의(일본, 미국)가 저지른 폭력(아시아와 일본)을 의도적으로 망각한 것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이 망각을 두 제국주의에 돌리기 보다는 주체 자신으로 돌리면서 성찰을 주장하고 있어 여전히 오래된 글들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그간의 연구가 패전 전의 제국주의와 패전 후의 '민주주의'를 단절로 봄으로써 과거를 억압, 배제했다면 이 연구들은 과거의 '負'를 연속적으로 고찰함으로써 현재의 '負'와 망각된 과거를 드러내며 성찰할 수 있게 하는 미덕이 존재한다. 이는 한국사에서 일부 경제사가들이 주장하는 '富'의 연속과는 완전히 다른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전전 제국주의와 전후 민주주의의 연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성찰을 이끌 수 있는 의미있는 글들이라고 생각된다.


뱀발) 그런데 이 책 제목의 '감정'은 어떤 의미에서 제기된 것일까? 읽고 나서도 왜 감정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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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2 1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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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의 편성 - 1920~1930년대 1 근대 일본의 문화사 5
고모리 요이치 외 지음, 한윤아 외 옮김 / 소명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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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문화사 5권인 <<내셔널리즘의 편성>>은 1920~30년대 일본 내셔널리즘의 모습을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을 통해 보여준다. 이 책에 속한 글들이 책 제목에 어느 정도 부합하겠지만 그래도 총론격인 <마르크스주의와 내셔널리즘>과 <학교음악은 어떻게 '국민'을 만들었는가>이 가장 잘 드러내주는 듯하다. 


총론 격인 <마르크스주의와 내셔널리즘>에서 일본 내셔널리즘을 절대주의적 천황제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절대주의적 천황제는 정치가들의 기획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민중들의 실천에 따른 대응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절대주의적 천황제는 그냥 주어진 제도가 아니다. 메이지기 절대주의적 천황제는 자유민권운동의 저항과 대외 정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뒤늦게 민중을 국민=신민으로 동원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이제 국민=신민이 보통선거제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상황을 맞자, 즉 다이쇼 천황이 메이지 천황과 같은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하여 국민 통합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근대 천황제가 기능부진에 빠졌을 때, 앞서와 마찬가지로 뒤늦게 권력 강화로써 '국체'론이 등장한 것이다."(64~65)


결국 천황제 자체가 위기 상황에서 내셔널리즘에 의한 국민=신민의 통합장치로 교묘하게 기능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또한 기획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민중의 국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음악에 한정되지만 <학교음악은 어떻게 '국민'을 만들었는가>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글에서 국민은 네이션의식을 불러오는 '식가'과 컨트리의식을 불러오는 '창가'의 '제창'을 통해 동일한 신체를 포착하도록 하고 또한 그런 동일한 의식을 교사와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 실천함으로써 교묘하게 '국민'으로 편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일상성/이상성의 문화와 과학>의 이상에서 변태(동성애)로, 변태에서 엽기로, 엽기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역사적 과정은 도약을 포함한 해석의 과잉일지라도 주목된다. 특히 '첨단이 상품화되는 시대'에 대한 분석은 현재적인 의미에서도 곱씹을만한 내용이다.


"강렬한 자극으로 가득 찬 사회가 한층 더 강렬한 자극을 요구하면서 엽기적이든, 변태적이든, 그로적이든, 테러적이든, 범죄적이든, 살인적이든, 악마적이든 결국 현대사회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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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전하의 앎과 제도 1933∼1955년 1 근대 일본의 문화사 7
사카이 나오키 외 지음, 이종호 외 옮김 / 소명출판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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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문화사 시리즈 중 7번째인 <<총력전 하의 앎과 제도>>는 이른바 총력전 체제에 관한 연구 논문을 모은 것이다. 총력전체제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연구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최근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는 푸코의 통치성 연구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주목되는 이 책의 글은 <총력전체제와 지식인>이며 이 글에서 정리한 총력전체제에 대한 정의를 아래 정리해둔다.


"'총력전체제'론 이란 전시 전후에 대한 전통적인 자기양해에 정면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전시의 총력전체제는 단순히 억업과 강제를 가하는 권력만이 아니었고, 오히려 다양한 사회조직에 전시변혁을 가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과정에 개입하고 그것을 조직하려는 권력이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자발성 또는 주체성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위해 육성하고 동원하려고 한 권력이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재편성을 위해 육성하고 동원하려고 한 권력이었다."(201)


여기서 총력전체제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주체성을 육성 동원하는 권력이라고 하고 있지만 동일한 시기의 또 다른 연구 논문인 <테크놀로지의 지배, 지배의 테크놀로지>에서 당시 지배테크놀로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배테크놀로지는 근대 초기에 통계학 등 여타의 방식을 배치함으로써 주권의 영역을 통합하려 했던 유럽의 관방학파 경제학자의 시도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근대 관료제와 공장 조립라인의 훈육 기술을 거쳐, '주체성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자기통치하는 능동적인 시민주체를 구축하고 하는 노력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196)


푸코의 논의를 가져 온 것이지만 총력전 하의 앎과 제도를 지배의 테크놀로지로 보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총력전체제는 단순히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주체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시민주체와도 연결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일본의 전후사회에도 연속되는 것으로 파악가능한 것이다. 일제시기 총력전체제를 통치성과 연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갖춰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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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의 인상 - 조선 청년, 100년 전 뉴욕을 거닐다 동아시아 근대와 여행 총서 1
김동성 글.그림, 황호덕.김희진 옮김, 황호덕 해설 / 현실문화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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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불가능한 세계를 앎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방법은 상상의 힘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어야 하며 문학적이든 역사적이든 개인의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다. 이 책은 역사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다만 같은 시리즈면 함께 엮는 미덕은 왜 발휘하지 못하는지 아쉬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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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아시아 도시 - 공간과 도시 형태의 3차원 허구들 심산출판사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8
진이 김 왓슨 지음, 태혜숙 옮김 / 심산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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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김 왓슨의 <<새로운 아시아 도시>>는 이른바 아시아의 호랑이, 한때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NICs국가의 도시들(싱가포르, 서울, 타이베이)에 관한 책이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이 새로운 아시아의 도시들은 눈부신 경제 성장과 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현재 논쟁은 답보상태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녀의 주장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서있지 않다. 식민의 경험이 포스트식민의 경험으로 연결되었지만 이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식민, 반식민, 신식민, 포스트식민 모두)의 구조 속에서 아시아의 호랑이들은 근대화라는 '발전 민족주의' 형태로 전개된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그 반대편의 이른바 민중, 계급, 젠더 등의 소외가 공간 변화와 함께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진이 김 왓슨의 논의가 새로운 것은 아시아의 호랑이 국가, 특히 싱가포르, 서울, 타인완의 경제 성장과 발전의 비밀을 식민 및 포스트식민 공간의 변화와 문학 텍스트의 비교 검토를 통해 포스트식민 도시들의 근대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 텍스트를 통해 공간을 검토하는 작업은 그다지 새로운 방법론은 아니다. 하지만 진이 김 왓슨은 역으로 공간 변화가 어떻게 문학 텍스트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고 해석해냄으로써 기존 작업과 차별화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녀가 공간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세상을 연결하면서도 차별화하는 공유된 역사적 과정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들 중 하나가 지구화하는 자본하에 국가에 의해 내부적으로 생산되는 공간의 차별화를 추적하는 것'(28~29)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공간 변화를 문학 텍스트로 읽는 것은 르페브르의 공간 이론에서 기인한다.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에서 공간의 생산을 크게 세 가지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 첫 번째가 공간적 실천(실재)이며, 두 번째가 공간의 재현들(상징), 그리고 세 번째가 재현적 공간(상상)이다. 여기서 진이 김 왓슨은 이른바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기획가들의 추상적이고 관료적인 공간으로써의 공간의 재현들과 '공간과 연루된 이미지들과 상징들을 통해 직접 살아지는 것을 묘사하는 이들과 일부 예술가들의 공간'인 재현적 공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아시아 도시를 파악한다. 따라서 이 책은 식민도시에서 포스트식민도시로, 그리고 산업화된 경관들이라는 시계열적 구성을 토대로 그 시기 식민권력, 포스트식민권력의 공간 재현 양상과 그에 대한 재현된 공간으로써의 문학 텍스트를 비교 검토함으로써 포스트식민도시들의 근대성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미덕인 공간 변화를 문학 텍스트와 비교하는 작업은 르페브르의 공간 이론을 가져오면서도 세 공간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르페브르와 달리 두 공간의 관계로만 분석하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녀가 문학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그렇겠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르페브로의 공간 이론에 가장 중요한 공간의 실천(역사)이 빠져 있음으로써 추상적인 관료적 공간과 재현적 공간의 경합, 또는 결합만을 보고 실재의 더 다종다양한 도시의 의미를 추적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르페브르의 공간적 실천은 공간의 재현과 재현된 공간에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를 파악하지 않으면 공간의 재현과 재현된 공간을 단지 추상적인 담론 상태로밖에 파악할 수 없다. 담론 밖의 상상은 재현된 공간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한편, 제목과 같이 아시아 호랑이 국가들의 현재적 의미에서인지 모르지만 식민 도시에 대한 분석보다는 포스트식민 도시에 대한 분석에 치중하고 있다(3부 중 2부가 포스트식민시기).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식민 도시에 더 흥미가 있는데 세 도시의 식민지 경험을 분석하며 제시하는 1부의 경우, 물론 포스트식민 도시와도 연결되지만 해석상의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카스텔스의 도시 이론에 도움을 받아 식민 도시의 형태를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하며 '무엇보다 행적인 기능을 특징으로 갖는' 식민 유형의 정착지인 행정도시와 산업 중심지 혹은 고국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 수문 도시'인 무역도시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과 타이베이를 행정도시로, 싱가포르와 홍콩을 무역도시로 구분한다. 그런데 이런 분류는 포스트식민과 연결하여 도시와 국가를 혼용하고 있다. 즉 싱가포르나 홍콩은 도시이면서 국가이기에 새로운 아시아 도시로 파악할 수 있지만 서울과 타이베이는 남한과 타이완으로 확대 상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 이럴 경우 스스로도 밝히듯이 남한의 부산과 인천, 타이완의 가오슝 등은 무역도시에 속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에 대한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남한과 타이완을 상징하는 도시로 서울과 타이베이에 국한하며 둘 다 행정도시로 파악한다. 이는 상징불가능한 부분에 대한 삭제가 전제된 것으로, 그렇다면 그녀의 주장은 포스트식민으로 곧장 연속적으로 연결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세 도시를 비교분석하는 것보다 한 국가의 다양한 식민 도시들을 비교분석하는 것이 더 의미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이 김 왓슨은 그런 한계를 넘어 세 도시를 통해 세 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스피박의 <<서로 다른 아시아>>의 개념을 받아들여 아시아의 복수성까지 염두에 두고 사용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아시아 도시는 아시아의 복수성과 함께 도시의 복수성까지 염두에 둔 용어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연구를 촉구하는 측면은 한계를 무릅쓰고 일반화하고 있는 것은 이 점에 기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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