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 여행 -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신들의 이야기
최순욱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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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유럽 신화라는 게 따로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었다.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들을 알기쉽게 설명해줘서 정말 재밌고 유익한 책.

 

북유럽 지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춥고 척박한 자연환경을 상징하는 '거인'들과 대결하는 오딘, 토르, 프레이야, 로키 등의 신들. 신이기 때문에 백전백승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골탕도 먹고,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기도 하며, 죽기도 한다는 점에서 북유럽 신들의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느낄 수 있었다.

 

2011년에 제작된 미국 영화 <토르>를 같이 보려고 하는데,

영화가 왠지 별로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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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1 - 종달새 꼬제뜨
빅또르 위고 지음, 송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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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전에 알라딘 서점에서 레미제라블 6권 세트를 24000원에 구입했다. 최근 1권을 읽었는데, 주말에 우연히 본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통해 12월에 휴잭맨과 앤 해서웨이 주연의 '레미제라블' 영화가 개봉될 예정이라는 걸 알게됐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ㅋㅋㅋ 영화 꼭 봐야겠다. 소설도 빨리 읽어야겠다! (수능 이후 미친듯이 영화를 보고 있다. 최근에 늑대소년, 내가살인범이다, 내가 고백을 하면, 남영동1985를 봤다;;)

 

처음 장발장은 빵을 훔친 죄로 5년 징역을 언도받았다. 여러 차례 탈옥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형량이 늘어나 결국 19년의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전과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편하게 잠을 잘 수도, 배불리 먹을 수도 없는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대체 인간 사회는 때로는 부조리한 부주의를, 때로는 무자비한 경계를 그 구성원에게 다 함께 받게 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불쌍한 한 인간을 결핍과 힘겨움 사이에 영원에 처박아 둘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우연으로 이루어진 재산 분배에서 가장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 따라서 가장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을, 사회가 그렇듯 가혹하게 다룬다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158)

 

다시 보니까, 어제 본 영화, '남영동1985'와 그저께 본 다큐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가 떠오르면서, 국가가 개인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등의 의문이 좀 생겼다.

 

장발장은 곳곳을 부유하다가 다뉴 주교를 찾아가게 되는데, 자신에 대해 어떤 경계도 하지 않는 주교의 행동에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된다. 그날 새벽 성당에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다가 경찰에게 잡혀 돌아오게 되는데 주교는 도난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준 것이라고, 거기에 은촛대까지 보태어 주면서 장발장을 체포 위기에서 구해준다. 거기에 더해, 장발장에게 내가 당신의 영혼을 산 것이니, 부디 바르게 살라며 당부를 한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 등 갖가지 자선 사업을 하여 명성을 얻게 된 마들렌느란 자가 장발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부분은, 이게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좀 스릴있었다! 그리고 마들렌느의 정체를 의심하는 자베르란 인물의 등장이 긴장을 더 고조시켰다! 극 속에서 선량한 주인공의 과거 잘못을 끝까지 파헤쳐 결국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직업정신 지나치게 투철한 인물이 꼭 있기 마련인데, 자베르가 그러하지 않나 싶다. 이 자베르에 의해 결국 마들렌느의 정체가 밝혀지고 말겠지ㅠ 장발장의 전체 이야기를 잘 모르니, 이어지는 얘기가 궁금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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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터키사 -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터키 처음 읽는 세계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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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비단길을 통해 동양과 서양을 이어 주는 길목,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의 1500년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곳, 

여행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나라라고 얘기되는 곳.

이곳에 언제쯤 갈 수 있을까ㅠ

 

터키는 기독교가 가장 먼저 뿌리내린 곳이기도 하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바울이 선교활동을 펼치던 중 세계 최초로 만든 교회가 안티오크에 있으며, 안티오크 신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국민의 95%가 무슬림인 터키에서 기독교가 가장 먼저 뿌리내렸다니.. 기독교의 초대 교회 7곳도 모두 터키에 있다고 한다.

 

터키가 돌궐과 한 계통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터키가 실제로 돌궐이 나라를 세운 552년을 건국 기원으로 삼는다는 사실은 좀 신기했다. 또 탄지마트 칙령이 발표됨과 동시에 미드하트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군주제가 실시된 줄 알았는데, 40년 정도 뒤에 일어난 사실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책에서 특히 예니체리의 외모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예니체리는 술탄의 친위 부대로서, 신과 술탄 외에는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 이들은 다른 이슬람교도와 달리 콧수염 외에 수염을 기르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래서 턱 부분은 전부 면도하고 콧수염만 옆으로 길게 길러 감아올렸다. 머리는 정수리 한 움큼만 남기고 박박 민 뒤, 뵈르크라는 흰색 보호대를 썼다. 전투에 져서 포로가 되었을 때, 적이 머리털 뭉치를 잡고 목을 쉽게 자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 예니체리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력을 이용해 재산을 쌓고 이익을 얻는 일에 끼어들었으며, 17세기부터는 반란을 일으켜 술탄을 죽이거나 폐위시키기도 했다."

 

이슬람 세밀화에 대한 언급도.

"세밀화가들은 신의 시선으로 높은 곳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듯이 화폭을 구성했다. 말, 나무, 꽃, 사람을 그릴 때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기보다는 신의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이를 위해 이미 대가들이 앞서 그렸던 그림을 베끼고 또 베꼈으며, 자신만의 스타일이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그림의 결함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천박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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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 한일 젊은 세대를 위한 서경식의 바른 역사 강의
서경식 지음, 형진의 옮김 / 반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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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재일조선인이 약 60만 명이라고 한다. 일본 국적을 갖게 된 사람을 포함하면 약 100만 명 정도가 될 거라 한다. 1910년까지 일본에 있는 조선인은 유학생이거나 외교 사절에 한정되어 극히 소수였고, 191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30년대에 전쟁터에 나간 일본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노동 인력의 이주와 강제 연행으로 재일조선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종전 당시 23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전체 조선인의 대략 열 명 중 한 명에 해당하는 수치라고 하는데, 이렇게나 많은 줄은 몰랐다.

 

1922년 일본에 호적령을 개정해 조선인인 일본으로 호적을 옮기는 것을 금지했다. 내선일체, 일시동인을 외치면서도 호적으로 통해 차별의 구실을 남겨놓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이 조선인에게 병역을 부과한 것은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인에게 무기를 쥐게 하는 것이 일본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근대 국가에서는 "병역 없이 투표 없고, 투표 없이 병역 없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징병제가 실시되자 참정권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5년 1월에 귀족원령과 중의원 선거법이 개정되었는데, 귀족원에는 7명의 조선인이 칙선(천황의 지명으로 선출)되고, 중의원에는 조선 출신 의원 23명의 의석이 마련되었다.(p121 참고)

물론 현재 재일조선인들에게는 어떤 참정권도 없는 상태이다.

 

일본은 패망한 후 조선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들의 일본 국적을 부정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프랑스가 알제리에 취한 방식과 달랐다. 오스트리아, 알제리 인들에게는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재일조선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 결정적 문제였다.

 

현재 재일조선인의 80% 정도가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나머지는 무국적 상태로 남아있다. '조선적'만을 가진채로 무국적 상태로 남아있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중 일부는 언젠가 하나의 국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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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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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공물 부과기준은 단순히 '호'에 따른 것인줄 알았는데, 요역 동원했던 방식처럼 토지 8결 단위로 그 안에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앙에서 공물을 부과할때 각 고을 토지의 상대적 규모가 고려되지 않아 작은 고을 부담이 가중되고 윤회 횟수도 늘어나는 폐해가 생겼다. 또 수취 과정에서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부과량을 늘리거나 순서를 조정하는 일이 생겨 이런 문제점을 막는 자구책으로서 '사대동'이 시행되었다. 사대동은 1년치 공물가를 예측해서 가능하면 고을 안의 전결 전체에 고르게 나누는 것이다.

 

선조대에 이미 현물로 공납을 바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물론 이때까지 이러한 경우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고 수령의 자율적 권한에 의해 퍼져나간 것이었다.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에 이미 현물납부가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은 좀 의외였다. 하지만 공물작미가 제도화되기 전까지는 방납의 폐단이 발생할 여지가 매우 컸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공물작미를 허용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선조 때에 납부 방식을 쌀로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결당 균일한 공물가를 정했고 이것이 나중에 대동법으로 흡수되었다.

 

대동법을 이론적으로 설계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조익이었다. 대동법 시행에 대해 제기된 여러 반론을 조목조목 반박했다.(책 74~75에 걸쳐) 한편 김장생은 대동법의 취지와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즉각적인 실시는 반대했다. 양전의 시행과 장리의 부패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의 마련 등 방법적 차원에서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결국 인조대 경상도를 제외한 강원, 충청,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흉년으로 인한 미곡 생산량의 감소와 운반비의 부담, 운반 과정에서의 위험, 중복 수취 등의 문제로 시행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삼도대동법을 경대동으로 바꿔 시행하게 되는데, 경대동이란 서울 관아에 내는 공물만 미, 포로 거두고 지방 관아의 수요는 이전 방식대로 수취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경대동 실시 후에도 방납의 폐단, 공물 부과의 불균형이 시정되지 않았고 대동법 실시 반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재정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대책으로 양전론과 호패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병자호란 직후 대동법에 대한 논의가 산발적으로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현물 대신 미, 포를 납부하게 했던 관행을 '대동법'이라는 국가 법규정으로 제도화하는 것은 법적 강제력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됐다는 변화를 수반하는 동시에, 지방 재정 수요에 따라 추가징수가 발생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각 관의 수요를 국가재정의 틀 안에 통합시켰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 무명 1필에 쌀 5두로 미, 포의 교환비율을 고정하되 해마다 풍흉을 반영해 변동시켰는데, 이는 대동법이 얼마나 세심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규정에 없는데도 민에게서 수취하던 것들을 대동법 안으로 흡수하여 대동미를 지급했다. 또 비록 정부가 거두는 물품 자체는 아니지만, 그 물품을 운반하는 데 수반되는 노동력 동원을 포함한 다양한 신역들도 모두 대동미로 지급했다. 대동사목은 정부가 공물주인에게 시가보다 낮게 지급했던 물품의 가격을 시가에 따라 지급하도록 규정했다."(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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